“그때 신민당 총무국장인가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100명의 국회의원보다 동지 한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가슴이 끓어오르더라고요. 김두한씨가 국회의원 하셨으니까 나도 따라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건 나고 1년6개월 동안 도망다녔는데 잡힐 생각만 하면 무서웠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알아보고 신고하는 건 아닌가 싶고요.”
1991년 출소 후에도 그는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다 1998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쓰디쓴 배신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정작 내가 내 가족을 배신해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1999년 호텔 사업으로 소송이 걸린 이후 줄곧 신용불량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가족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조직 세계는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그가 크게 흔들린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3년 전에 딸이 교대에 합격했어요. 장하죠, 우리 딸? 어느새 커서 선생님 되는 학교에 다닌다니까 기특하고 고마웠어요. 그런데 제가 학비가 없었어요. 입학금을 마련해야 되는데 그 돈 몇백만원이 없어서 처음으로 후배들한테 전화를 했지요.”
순간 그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자존심 다 버리고 손 벌렸는데 아무도 안 도와줍디다. 그때 다시 돌아가서 애들 모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의리 없고 비겁한 데로 돌아가면 또 뭐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어요. 참았어요. 기도했고요.”
그는 항상 차고 다니던 금목걸이를 판 돈 120만원을 딸의 대학 입학금에 보탰다. 딸은 현재 지방의 한 교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우리 딸은 보습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자기 용돈이랑 학비 다 자기가 벌어서 씁니다. 얼마 전에는 엄마한테 한 20만원 보냈나 봐요. 참 장하죠, 우리 딸? 제가 너무 미안합니다.”
그는 가족의 신변을 알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행여나 예상치 못한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탓이다.
조직폭력배 두목을 했던 그에게 몸에 문신은 있는지 물었다. 그는 “몸은 깨끗하게 만들고 싶어 문신은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한 번 보고 싶다고 묻자 “참 의심 많은 사람이네”라고 웃으며 윗옷을 벗어 보여줬다. 김용남씨는 배가 조금 나왔지만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두꺼운 팔뚝과 탄탄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여러 친구들이 불쌍합니다. 그렇게 돈 벌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큰 의미가 없어요. 마지막이 좋지 않아요. 저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됐어요. 제가 여기서 실패하면 앞으로 누구도 그 세계를 빠져나와 교회로 오지 못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제가 힘을 못 쓰는 그때까지 유혹은 계속 올지도 모릅니다. 돈에 대한 유혹이요. 그 유혹이 고통이지요. 이게 제 벌이지요.”
조직을 떠나고 교도소에 있던 시절 가족의 생계는 그의 부인이 혼자 책임졌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였던 그는 아내 이야기를 꺼내자 움츠러들었다.
“아내가 고생 많이 했어요. 아이들 키우느라.”
-무슨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냥 이일 저일 하면서.”
-이일 저일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참 의심 많은 사람이네.”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던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는 “집사람이 그라쓰(glass) 닦으러 다녔지”라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그의 작은 두 눈에서 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카드 돌려막기 하면서 아이들 키웠지요. 제가 다 알아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도 셋방살이 하는데 영 미안해서.”
눈물을 훔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끔 반찬 해주러 지금도 이곳 저곳 나가요. 저녁에는 제가 안마를 해줘요. 제가 손힘이 좋아서 안마하면 집사람이 좋아해요. 어깨 아프면 아무 말 없이 어깨만 내 쪽으로 쑥 들이밀어요. 그러면 제가 주물러 주지요.”
수십 장의 성경 구절 쪽지가 붙어 있는 김용남씨의 지하 기도실, 십자가 바로 밑 최고 명당 자리에는 다른 성경 구절이 아닌 딸이 쓴 쪽지가 붙어 있다.
“아빠, 집사님 되신 거 축하 드려요.”
가족, 그것이 그가 만난 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