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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팔이’사건 20년, 김용남씨는 지금

鶴山 徐 仁 2007. 12. 2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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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팔이’사건 20년, 김용남씨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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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7년 4월 24일 ‘괴청년’으로 불린 폭력배 조직원 100여명이 통일민주당 서울 관악지구당을 습격했다. (photo 조선일보 DB) / 경찰에 검거될 당시의 전주파 두목, 용팔이 김용남씨. (photo 조선일보 DB)

 

1987년 4월 김영삼씨가 만든 통일민주당 창당대회 기간, 폭력배 조직원 200여명이 전국의 통일민주당 지구당 사무실에 쳐들어갔다. 이들이 사무실을 도끼로 깨 부수고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두르며 당원을 폭행하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당시 대학생이던 지금의 40대에겐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일명 ‘용팔이’ 사건으로 더 잘 알려진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 사건’은 전국 최대 조직 전주파의 소행이었다. 전주파 두목 ‘용팔이’ 김용남은 당시 37세. 경찰은 정치 깡패로 악명을 떨치던 그를 사건 발생 1년 6개월이 지난 1988년 9월 수원의 한 호텔에서 검거했다.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때 숱한 뉴스와 금메달 소식에 묻혀 ‘용팔이’는 쉽게 잊혀지는 듯했다.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주인공 박태수(최민수) 일당이 한 정당의 창당대회에 난입해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이 방영될 때 사람들은 잠시 용팔이를 떠올렸다. 용팔이 사건, 벌써 20년 전 이야기다.


“잠시 멈추십시오! 멈추세요!”


지난 11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서울 서초구 서초4동 서초초등학교 앞. 한 50대 남성이 횡단보도에서 교통정리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에 노란색 ‘정지’ 깃발을 들고 머리에는 교회 마크가 새겨진 모자를 썼다. 쌀쌀한 날씨 탓에 “멈추세요”라고 외칠 때마다 입김이 피어올랐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교인들이 “집사님,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네면 그도 역시 허리를 굽혀 웃으며 인사했다. 작은 키, 다부진 체격, 찢어진 작은 눈, 쉽게 잊혀지지 않는 얼굴. 그는 ‘용팔이’ 김용남씨다. 20년 전 쇠파이프를 들었던 그의 손에 노란색 ‘정지’ 깃발이 들려 있었다.


콧수염은 그대로지만 김용남씨 인상은 많이 변했다. 옛날 사진 속에서 본 험악한 인상은 찾기 힘들다. 오히려 조금 약해 보이는 인상이다. 1950년생인 그는 올해 57세. 간판을 만드는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2002년 10월부터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수요일 예배를 마치면 교인들과 함께 야간봉사를 다녀요. 유흥가에서 전도 홍보지를 나눠주다 보면 후배들이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좀 어색했어요.”


1998년 운영하던 대전의 한 호텔 운영권을 둘러싼 폭행 사건에 가담한 죄로 구속됐던 그는 1999년 출소 후 다시 조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하룻밤에 집 한 채 값도 써봤다”는 그는 모아 놓은 재산이 하나도 없었다. 가난이 어색한 일이었다. 그는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던 도중 유명 작곡가 조운파씨를 알게 됐다.


“조 선생님이 돈이 많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돈 좀 빌려 쓰려고 일부러 인사 드리고 친하게 지냈어요. 솔직히 돈 좀 떼어먹을 생각도 있었고요. 그런데 그분이 교회에 가자고 하시는 겁니다. 영 내키질 않았어요. 그래도 돈이 많다는데 따라가야지 어쩌겠어요. 나란히 예배당에 앉아 있는데 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돈 떼어먹으려는 사람을 교회로 데리고 간 그분이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러다 보니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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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서초초등학교 앞 횡단보도에서 교통정리 자원 봉사 중인 김용남씨.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그는 이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조직생활을 접고 고등어 장사를 시작했다. 주먹이 특기였던 그가 태어나 처음 주먹을 쓰지 않고 돈을 벌겠다고 나섰는데 쉽지 않았다.


“자반고등어를 한 상자 팔면 4000원씩 남아요. 저는 하루 20상자만 팔면 8만원, 한 달 240만원은 벌 것 같아서 간단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그렇게 안 됐습니다. 4년 장사했는데 빚만 1000만원 넘게 생겼습니다.”


서울 서초구 반포동 주택가의 한 건물 지하에 간판 제작을 하는 그의 사무실이 있다. 허름한 사무실에 직원 한 명이 있다.


“이제 문 연 지 반년 좀 넘었는데 아직 잘 안 됩니다. 이것도 어렵네요. 교회 다니는 분들이 많이 도와주고 계세요.”


그가 안내한 곳은 사장실이 아니라 사무실 한쪽에 마련된 기도실이다. 두 평이 채 안 되는 방. 안으로 들어서니 성경 구절을 적어 놓은 A4 용지 수십 장이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그를 격려하는 교인들이 전국에서 보내 온 편지와 성경 구절이다. 작은 책상이 하나 있고 책상 앞에 나무로 만든 십자가가 달려 있다. “뭐 대단하진 않지만 여기가 제 기도실입니다. 매일 두 시간씩 이곳에서 기도를 올립니다. 1년 넘게 하루도 빠지지 않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의 변화를 지켜 주시라고 말입니다.”


사실 그는 고통 속에서 살고 있다. 가난한 현실과 이 현실을 순식간에 바꿀 수 있는 유혹 속에서 버티고 있다.


“지금도 유혹이 끊이지 않습니다. 한 5억 빚 받을 것 있다면서 1억은 나 보고 갖고 4억은 자기 주라는 식의 연락이 종종 옵니다. 이제 그렇게 살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네 까짓 게 결국 돌아오지 않고 버티겠냐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럴수록 더 기를 쓰고 안 돌아가려고 참고 또 참습니다. 그러다 보니 5년이 지났어요. 목사님이 가끔 손을 꼭 잡아주시는데 큰 힘이 됩니다.”


김용남씨는 1950년 2월 2일 전남 순천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지만 동급생과 싸움을 벌이다 퇴학 당했다. 다시 남산공전(현 리라컴퓨터고)에 역도 특기생으로 들어갔지만 1학년 때부터 뒷골목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 김용남씨의 지하 기도실. 벽에 붙어있는 쪽지는 모두 성경구절이다. (photo 유창우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김용남씨와 함께 리라컴퓨터고등학교를 찾아 1972년 졸업생 생활기록부를 열어봤다. 그는 “졸업하고 거의 30년 만에 처음 모교를 찾는다”고 했다. 김용남씨의 생활기록부에서 ‘성적은 불량하나 근면한 학생’이라는 담임교사의 기록을 읽을 수 있었다. 행동발달사항에는 ‘근면검소하고 인내성이 강하나 준법성이 약하다’는 평도 있다. 김씨는 “밖으로 나다니며 사고를 치기도 했다”고 부끄러워했다. 2학년 석차는 60명 중 55등, 3학년 석차는 58명 중 26등. 고3 때 전국체전 금메달을 받은 내용도 기록돼 있다.


그는 이 시절 서울을 본거지로 하는 전주파를 만들고 행동대장을 맡았다. 그가 스물여섯 살이 되던 1975년 전주파 두목으로 올라섰다. 그는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장해 조직을 전국 최대 폭력조직으로 키웠다. “얼굴만 비쳐도 몇백만원씩 주던 때”라고 한다. 그러다 1980년에 삼청교육대로 끌려갔다.


“너무 힘들어서 죽으려고 했어요. 어머니 생각도 났고, 하나님도 처음 불러봤어요. 여기서만 꺼내 주시면 앞으로 착하게 살겠다고 빌었지요.”


그러나 그는 출소 후 다시 조직을 운영했다. 1982년 김용남씨의 결혼식이 열린 강남의 한 호텔에는 당시 인기를 누리던 연예인들이 모두 모였다고 한다. 그는 “관리하던 호텔과 입을 맞춰 내가 호텔 경리과장이라 속이고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결혼식날 개그맨도 오고 가수도 오고 비밀요정 기생들도 다 왔어요. 하객이 3000명 넘었으니까요. 1987년에 제 얼굴이 알려지고 나서야 장모도 알고 아내도 알게 됐지요. 제가 건달이라는 사실을요.”


1987년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암흑 세계 최강자는 어떻게 정치적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을까. 

▲ 1967년 남산공전 역도부 시절 김용남씨. / 김용남씨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 ‘근면검소하고 인내심이 강하나 준법성이 약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때 신민당 총무국장인가 하는 사람이 저를 찾아왔어요. 100명의 국회의원보다 동지 한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가슴이 끓어오르더라고요. 김두한씨가 국회의원 하셨으니까 나도 따라서 한번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건 나고 1년6개월 동안 도망다녔는데 잡힐 생각만 하면 무서웠어요. 길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나를 알아보고 신고하는 건 아닌가 싶고요.”


1991년 출소 후에도 그는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다 1998년 “나이 오십을 앞두고 쓰디쓴 배신을 당했다”고 한다. 이후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면서 “정작 내가 내 가족을 배신해왔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1999년 호텔 사업으로 소송이 걸린 이후 줄곧 신용불량자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가족과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조직 세계는 뒤돌아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그가 크게 흔들린 일이 딱 한 번 있었다.


“3년 전에 딸이 교대에 합격했어요. 장하죠, 우리 딸? 어느새 커서 선생님 되는 학교에 다닌다니까 기특하고 고마웠어요. 그런데 제가 학비가 없었어요. 입학금을 마련해야 되는데 그 돈 몇백만원이 없어서 처음으로 후배들한테 전화를 했지요.”


순간 그의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는 말을 잠시 끊었다가 다시 시작했다.


“자존심 다 버리고 손 벌렸는데 아무도 안 도와줍디다. 그때 다시 돌아가서 애들 모을까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의리 없고 비겁한 데로 돌아가면 또 뭐하겠냐는 생각도 들었어요. 참았어요. 기도했고요.”


그는 항상 차고 다니던 금목걸이를 판 돈 120만원을 딸의 대학 입학금에 보탰다. 딸은 현재 지방의 한 교대 3학년에 재학 중이다.


“우리 딸은 보습학원에서 아이들 가르치면서 자기 용돈이랑 학비 다 자기가 벌어서 씁니다. 얼마 전에는 엄마한테 한 20만원 보냈나 봐요. 참 장하죠, 우리 딸? 제가 너무 미안합니다.”


그는 가족의 신변을 알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행여나 예상치 못한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한 탓이다.


조직폭력배 두목을 했던 그에게 몸에 문신은 있는지 물었다. 그는 “몸은 깨끗하게 만들고 싶어 문신은 새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한 번 보고 싶다고 묻자 “참 의심 많은 사람이네”라고 웃으며 윗옷을 벗어 보여줬다. 김용남씨는 배가 조금 나왔지만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도 두꺼운 팔뚝과 탄탄한 어깨를 가지고 있었다.


“저는 지금 여러 친구들이 불쌍합니다. 그렇게 돈 벌려고 애를 쓰는데 결국 큰 의미가 없어요. 마지막이 좋지 않아요. 저는 이제 다시 돌아갈 수가 없게 됐어요. 제가 여기서 실패하면 앞으로 누구도 그 세계를 빠져나와 교회로 오지 못할 것 아닙니까. 하지만 제가 힘을 못 쓰는 그때까지 유혹은 계속 올지도 모릅니다. 돈에 대한 유혹이요. 그 유혹이 고통이지요. 이게 제 벌이지요.”


조직을 떠나고 교도소에 있던 시절 가족의 생계는 그의 부인이 혼자 책임졌다고 한다. 인터뷰 내내 흐트러짐 없이 꼿꼿한 자세였던 그는 아내 이야기를 꺼내자 움츠러들었다.


“아내가 고생 많이 했어요. 아이들 키우느라.”
-무슨 고생을 하셨습니까.
“그냥 이일 저일 하면서.”
-이일 저일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참 의심 많은 사람이네.”


눈을 맞추며 대화를 하던 그가 처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잠시 말을 멈췄던 그는 “집사람이 그라쓰(glass) 닦으러 다녔지”라는 말을 다 마치지 못했다. 그의 작은 두 눈에서 나온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카드 돌려막기 하면서 아이들 키웠지요. 제가 다 알아요. 얼마나 고생했는지. 지금도 셋방살이 하는데 영 미안해서.”
눈물을 훔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가끔 반찬 해주러 지금도 이곳 저곳 나가요. 저녁에는 제가 안마를 해줘요. 제가 손힘이 좋아서 안마하면 집사람이 좋아해요. 어깨 아프면 아무 말 없이 어깨만 내 쪽으로 쑥 들이밀어요. 그러면 제가 주물러 주지요.”


수십 장의 성경 구절 쪽지가 붙어 있는 김용남씨의 지하 기도실, 십자가 바로 밑 최고 명당 자리에는 다른 성경 구절이 아닌 딸이 쓴 쪽지가 붙어 있다.


“아빠, 집사님 되신 거 축하 드려요.”


가족, 그것이 그가 만난 신이다.

                                                                                       
                                                                                        김경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