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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18일 목요일. 파리 지하철과 철도 노조가 우파 정부의 연금 개혁에 반대하며 대대적인 파업을 감행했다. 이날 대부분의 지하철이 멈춰섰다. 파업의 여파는 금요일을 넘어 주말까지 이어졌다. 지옥에 가까운 혼잡이 예상되었지만 그나마도 도시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었던 건 파리시의 공용 자전거인 ‘벨리브(V?lib)’ 덕분이었다. 거리를 뒤덮은 자전거의 물결을 보며 “자전거만큼 남의 상황에 구애받지 않는 교통수단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바퀴의 힘은 네 바퀴보다 세다. 파리를 휘젓는 방법 중 하나인 ‘벨리브’가 등극한 지 3개월. 이제 파리의 곳곳에서 벨리브족(族)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1년 이용료 29유로(약 3만8000원)만 내고 사고나 분실 시 별도의 보증금을 보장하는 수표를 동봉하면 ‘벨리브족 되기’의 1단계 끝이다.
언제 어디서나 카드만 찍고 자전거를 찾아 다른 정류장에 다시 세워놓으면 된다. 벨리브를 탄 후 30분이 지나면 추가 요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장거리를 갈 때는 한 번 정도 자전거를 바꿔야 하는 점이 살짝 귀찮다. 그렇지만 이 정책이 ‘자전거 독점’을 겨냥한 파리시의 고육지책이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이해하기로 마음을 바꾼다. 얌체족은 어디나 많다. 만약 이런 추가요금제가 없었더라면 공용 자전거를 ‘고용 자전거’로 부리는 친구들이 제법 될 것이다.
어쨌든 내 주변에도 어느새 벨리브족이 꽤 늘었다. 두 바퀴의 힘은 라이프 스타일까지 바꾼다. 주말에 파티라도 열리면 지하철 때문에 밤 1시를 넘기지 않던 친구들은 이제 시간에 구애받지 않게 됐다. “집에 가는 거 괜찮아?”라고 묻으면 “벨리브가 있잖아”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귀가 시간이 자유로워지자 야간에 문을 여는 바와 클럽의 시간도 길어졌다. “젊은이들이 밤 늦게까지 있을 수 있어 매상이 많이 늘었지요.” 18구 몽마르트 근처에서 조그만 바를 운영하는 니콜라는 이렇게 말하며 즐거워했다.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는 젊은이들이 자전거로 귀가하면서 각종 클럽이 모여 있는 레알-샤틀레, 생 미셸 지구에서는 밤 1시가 넘어 벨리브 타기가 힘들 정도다. 들어오는 자전거는 별로 없고,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만 넘쳐난다. 그래도 싱글벙글, ‘자전거야 언제 오겠지’라는 생각으로 친구들과 못다한 수다를 떨고 있는 젊은이들을 보니 생기가 넘친다. 그들에게 양보하는 기분으로 300m 정도 걸으니 비교적 한산한 정류장에 자전거 한 대가 서 있다. 행운을 잡은 기분으로 자전거를 탄다.
야간에 자전거라니 위험하지 않을까.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하다. 파리시 일반 도로에서는 30㎞가 제한 속도이지만 그래도 야간에는 차들이 쌩쌩 달리니 조심해야 한다. 자전거는 인도가 아닌 도로에서만 타게 되어 있으므로 신호를 지키고 일방통행을 거스르지 않는 것은 자동차와 똑같다. 좀 더 안전하고 싶다면, 야광이 들어간 옷을 입고 안전모까지 써 준다. 이 정도면 ‘고수 벨리브족’이다.
밤낮으로 자전거를 즐겨 타게 되면 운동 효과도 상당하다. 거대한 체구 때문에 늘 스트레스를 받던 프랑스 친구가 있는데, 그는 요즘 지하철과 자가용을 ‘끊고’ 벨리브만 타고 있다. 덕분에 체중 감량 효과도 톡톡히 보고, 근육도 발달하고 폐활량도 좋아졌다며 싱글벙글한다. 벨리브는 도난방지와 안전을 위해 꽤 무겁게 제작되었는데 그 덕에 일반 자전거보다 운동 효과가 더 있다. 그는 “많이 먹어도 그만큼 운동을 해서 에너지를 쓰니 몸도 가볍고 마음도 즐겁다”며 벨리브를 타보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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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간의 자유, 운동효과에 더해 벨리브에 대한 칭찬을 하나 더 하고 싶다. ‘생활의 발견’이라고나 할까.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면서 지하철역 이름으로만 알고 있던 동네들의 구석 구석을 재발견하게 된다. 베트남 쌀국수집이 모여 있는 13구의 슈아지 거리에서는 쌀국수에 들어가는 구수한 국물과 허브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10구에 위치한 북역 뒤의 인도 거리에서는 어지러운 인도의 의상과 장식을 팔고 있는 가게들이 스쳐간다. 7구에선 가구점과 골동품 가게를, 마레 지구에는 소규모 디자이너들의 독특한 의상과 손을 잡고 산책하는 동성연애자들을 보게 된다. 11월이 되면 어디에선가 나무 때는 냄새가 난다.
자동차로 갔으면 너무 빨리 지나가 보지 못했을 것이고, 걷고 있었다면 너무 그 안에 있어 익숙하게 여겨졌을 것들. 자전거를 타면 냄새와 바람, 스치는 음악과 소리들이 동네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벨리브를 환영하는 것은 아니다. 파리의 자동차 운전자들은 가뜩이나 좁은 파리의 주차공간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벨리브 정거장으로 인해 더 좁아졌고, 두세 배쯤 늘어난 자전거와 함께 도로를 달려야 하는 데에 불편함을 느낀다.
택시기사들도 손해를 볼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에너지 절약과 환경오염 대책으로 자전거만한 대안이 없다는 데에 동의하며 이 모든 불편을 감수한다. 이런 사회적 합의가 있을 때 행정가들이 좀 더 과감한 정책들을 낼 수 있고, 자전거는 실질적 교통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이제 벨리브는 세계의 여러 도시로 수출되고 있다. 서울에서도 자전거 도로를 활성화하고 공용자전거를 도입하겠다는 소식이 들린다. 그동안 지나치게 자동차 중심이었던 정책에서 늦었지만 자전거를 장려하는 정책이기에 일단 환영한다. 파리시는 벨리브의 성공에 이어 비슷한 개념의 ‘공용 자동차 대여 서비스’도 선보인다고 하는데 이것도 언젠가 벤치마킹할까? 녹색 도시를 향한 파리시의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