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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hoto 이상선 조선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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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파업 사태로 국민들에게 심려를 끼쳐 죄송하지만 배운 것도 많습니다. 교수들과 전공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자원봉사에 나서 혈액검사에서 창구업무까지 맡아가며 병원을 돌렸어요. 우리 병원의 123년 역사가 그냥 지나온 것이 아니구나, 이런 데서 저력이 발휘되는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28일간의 파업이 종결되고 병원이 완전 정상화된 지난 8월 7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구내는 언제 파업을 벌였는지 모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오후 늦게 만난 지훈상 연세의료원장은 “파업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고 갈등을 봉합할지 하루 종일 고민했다”며 “이미 파업을 경험한 다른 대학병원장들과 통화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연세의료원은 의사를 제외한 직원 평균연봉이 4700만원으로 동종업계 최고 수준이다. 이번 파업은 17년 만의 일이었다. 지원장은 “2005년에 병원을 대규모로 증축한 뒤 새출발하는 마음으로 재작년과 작년에 임금을 다른 병원에 비해 많이 올렸는데 이번에 노조에서 임금 14% 인상안을 들고 나와 기가 막혔다”며 “더구나 임금·단체협약 사항이 아닌 병원 경영권과 인사권에 관한 요구로 인해 노사 간에 입장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노조는 임금·단체협약안 이외에 1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의료보험이 적용되는 다인병실 확대,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를 줄이는 간호등급 상향조정을 핵심 요구사항으로 내세웠다. 소위 공익적 성격의 내용을 부각시켰던 것이다.
“노조가 그런 요구를 하려면 스스로도 그에 상응하는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진정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임금 14% 인상안을 내놓고 동시에 그런 요구를 하니 설득력이 없는 거지요.”
노사는 최종적으로 임금 3% 인상(노조의 최종 요구는 8.24 %), 비정규직 처우 개선 위해 임금총액 대비 1.7%의 별도 재원마련 등을 합의했다. 지 원장은 노조가 경영권과 인사권을 건드리기 위한 명분으로 공익적 성격의 요구를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연세의료원은 지난 7월 1일자로 발효된 비정규직보호법에 맞춰 비정규직 중에 자격 있는 사람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이미 56억원의 예산을 배정해 놓았습니다. 법적으로 2년 이상 근무한 비정규직 직원은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로 돼 있는데 기준 기간을 1년으로 줄이라는 요구는 무리입니다.”
다인병실 역시 연세의료원은 법정기준인 전체병실 대비 50%를 넘어선 54%를 유지하고 있다. 지 원장은 “노조는 몇 %로 올려야 한다는 구체적인 기준도 제시하지 않았다”며 “노조가 연세의료원의 또 다른 공익적 성격에는 눈을 감고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적자가 심한 재활병원·어린이병원·정신병원을 모두 운영하는 대학병원은 연세의료원뿐입니다. 제가 원장에 취임해서도 손해를 볼 줄 뻔히 알면서 어린이병원을 200병상 규모로 새로 지었습니다. 병원경영과 여러 공익적 요소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지 한두 가지 부문에서만 공익성을 높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지 원장은 “공익이 목적이라면서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 병원에서 확성기를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는 행동”이라면서 “병원에선 파업 자체를 금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술실·응급실·중환자실·전기실은 파업 중에도 인원을 빼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긴 하지만 병원 운영 시스템은 서로 연계돼 있어서 전체적으로 모두 마비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혈액검사나 엑스레이 촬영이 안되면 수술도 할 수 없고 응급환자를 진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 원무행정이 안되면 진료를 진행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노동부 감독관들이 시찰을 나와서 필수시설엔 인원이 배치돼 있으므로 문제가 없다고 가버리더군요. 병원과 제조업의 차이를 무시하는 겁니다. 게다가 병원에선 파업이 금전적인 손실만 낳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뺏을 수도 있는 데 말입니다.”
지 원장은 “파업기간 중에 가장 힘들었던 것이 바로 수술일정에 차질을 빚고 환자들을 다른 병원으로 보내는 등 제대로 진료를 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어떤 교수는 몇 년째 곁에 두고 아끼던 직원으로부터 농성장에서 박대를 당하고는 큰 배신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나마 보다 못한 교수들과 전공의들이 자원봉사에 나서면서 진료는 점차 정상화될 수 있었다. 전공의들은 의료지식이 있으므로 엑스레이 촬영과 혈액검사를 바로 배워 업무를 할 수 있었다. 백발의 교수들도 직접 원무과에서 접수를 받았다. 노조원들 중에서 업무복귀자가 늘고 진료가 차츰 정상화되자 노조도 노동위원회의 조정을 받아들이고 파업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병원의 원칙 고수 입장이 확고한 것도 노조의 판단에 영향을 줬다.
지 원장은 “파업을 시작하기 전부터 무노동 무임금, 불법행위 민·형사 소송, 부당행위자 징계라는 3가지 원칙을 미리 노조에 알렸다”며 “파업의 상처를 보듬고 선의의 피해자가 없도록 해야겠지만 앞으로도 이 원칙만큼은 끝까지 고수할 것”이라고 못박았다. 연세의료원은 파업이 시작된 뒤 5일 만에 돌아온 월급날에 급여를 지급하면서 명세서에 8월 분에서 파업일 만큼의 급여를 공제한다고 밝혔다. 노조 측에선 병원을 상대로 한 부당노동행위 고소를 취하하는 대신 민·형사 소송과 징계 철회를 압박하고 있지만 지 원장의 입장은 확고하다.
“설사 병원이 잘못한 게 있으면 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면 됩니다. 서로 잘못을 덮어주는 식으로 거래를 하면 장기적으로 원칙이 바로설 수 없습니다.”
지 원장도 간호등급 상향과 같은 병원 선진화 문제에서는 유연한 입장이었다. 그는 “1년 반 전에 간호등급이 3등급에서 2등급으로 올랐는데 갑자기 136명의 간호사를 새로 고용해 등급을 또 올리라는 것은 무리”라면서도 “경영여건이 허락하는 한에서 올려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세브란스병원은 지난 7월에 JCI(Joint Commission International·국제의료기관평가위원회)의 인증을 받았습니다. JCI평가는 그것으로 미국 병원의 순위를 매길 정도로 신뢰도가 높은 인증입니다. 만약 간호시스템이 선진적이지 않다면 인증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JCI는 환자가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퇴원 후 자택 요양에 이르기까지 질병치료의 모든 과정을 나누어 세밀하게 평가한다. 미국을 제외한 세계에서 2000 병상급의 병원이 JCI인증을 받은 것은 세브란스병원이 처음이다. 그만큼 인증이 까다로워서 2년에 걸쳐 3주씩 네 번이나 심사 받았다. 외국인들도 JCI 인증을 받은 의료기관은 안심하고 이용한다.
지 원장은 “노조가 JCI 인증을 받느라 고생한 것까지 따질 때는 정말 답답했다”며 “세계적 병원이 되면 구성원 모두에게 좋은 일이 아니냐”고 반문했다.
“정직과 신뢰가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서로 믿고 상대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면 글로벌 세브란스의 비전은 실현될 것입니다.” ▒
/ 박준동 기자 jdpark@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