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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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

鶴山 徐 仁 2007. 7. 11. 22:46


자는 이름이 丘요, 字는 仲尼이니, 그 先代는 宋나라 사람이다. 아버지는 叔梁紇이요, 어머니는 顔氏이니, 노나라 양왕 22년(B.C 551) 경술년 11월 경자일에 공자를 노나라 창평향 추읍에서 출생하였다.
공자는 아이가 되어 장난할 때에 항상 俎豆를 진설하며 예를 행하는 용모를 베풀었었다. 장성하여 季吏(창 고관리자)가 되어서는 料量을 平하게 하시고, 司職吏(축산담당자)가 되어서는 가축이 번식하였다.

公 25년(B.C 517) 갑신은 공자 나이 35세였는데, 소공이 제나라로 달아나 노나라가 혼란하니, 공자께서는 이에 제나 라로 가시어 高昭子의 가신이 되어서 景公에 통하였다. 경공이 尼谿의 토지로 공자를 봉해 주고자 하였으나, 晏영이 불가하다 하니, 경공이 의혹하였다. 공자는 마침내 제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왔다.

 

 

公 元年 임진은 공자 나이 43세였는데, 계씨가 강하여 참람하고, 그의 가신인 陽虎가 난을 일으켜 정권 을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공자는 벼슬하지 않고 물러나 詩書와 禮樂을 닦으시니, 제자가 더욱 많아졌다. 정공 9년 경자는 공자 나이 51세였다.
공산불뉴가 費邑을 가지고 계씨를 배반하고 공자를 부르자, 가고자 하였으 나 끝내는 가지 않으셨다. 정공이 공자를 中都의 읍재로 삼으니, 1년만에 사방에서 본받았다. 그리하여 아침내 司空이 되시고, 또 大 司寇가 되시었다. 10년 辛丑에 정공을 도와서 제나라 군주와 夾谷에서 會盟하시니, 제나라 사람들은 노나라 에게서 침략한 땅을 반환해 주었다. 12년 계묘에 중유로 하여금 계씨의 가신을 삼아 세 도읍의 성을 허물게 하고 갑옷과 병기를 거두게 하였는데, 맹씨의 집안에서는 成땅의 城을 허물려고 하지 않으므로, 포위공격하 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공 14년 을사는 공자 나이 56세였다. 정승의 일을 攝行하여 소정묘를 베시고, 국정에 참여하여 들으시니, 3개월   만에 노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 제나라 사람들이 아름다운 여자와 악사를 보내어 저지하니, 계환자가 이것을    받았으며, 郊祭에 또 제사지낸 고기를 대부들에게 주지 않자, 공자는 노나라를 떠나셨다.

나라에 가서 자로의 처형인 顔濁鄒의 집에 主人을 정하시었다. 진나라를 가실 적에 匡땅을 지나니, 광땅    사람들은 양호라고 여겨 拘留하였었다. 풀려나자 위나라로 돌아와 남자를 만나셨다. 위나라를 떠나 송나라에 가시니,    사마인 환퇴가 죽이고자 하므로, 또 송나라를 떠나 진나라에 가서 司城貞子의 집에 주인을 정하시고, 3년 동안 거주하다가 위나라로 돌아오셨는데, 靈公은 등용하지 못하였다. 계환자가 죽을 적에 강자에게 유언하여 이르되 반드시    공자를 불러 등용하라 하였는데, 그 신하들이 저지 하자 강자는 마침내 염구를 불러왔다. 초나라 昭王은 장차 書社의    땅을 가지고 공자를 봉해주려고 하였는데, 令尹인 子西가 불가하다 하니, 마침 내 중지하였다. 다시 위나라로 돌아오시니, 이때 靈公이 이미 죽고, 위나라 군주인 輒이 공자를 얻어 정치를 하고자 하였으며, 염구가 계씨의 장사가    되어 제나라와 싸워 전공을 세우자, 강자가 마침내 공자를 불렀으므 로 공자가 노나라로 돌아오시니, 실로 哀公 11년    정사년으로 공자 나이 68세였다.
러나 노나라에서는 끝내 공자를 등용하지 못하였고, 공자도 또한 벼슬을 구하지 않으시어 마침내 {서 전}과    {예기}를 敍하시고, {시}를 刪定하고 樂을 바로잡으셨다.

 

왕이 죽은 뒤 태자 의구는 동쪽의 성주로 도망가 B.C.770년 즉위하여 평왕(平王)이 된다. 이후 주왕조는 성주에서 존속하다가 B.C.256년에 秦에게 멸망한다. 이 기간을 동주시대라고 부른다.
주왕실이 동쪽의 낙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왕조는 이전 서주시대의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오히려 실력을 가진 제후가 패권(覇權)을 다투는 시대가 된다. 따라서 실제로 동주시대의 종말은 주왕조의 멸망시기가 아니라 진이 천하를 통일하는 B.C.221년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이 시대는 춘주·전국 시대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 시대 전반기 대부분의 역사가 『춘추(春秋)』라는 연대기에 , 후반기에 활약했던 외교가들의 언론을 중심으로 한 내용이『전국책(戰國策)』이라는 서적에 묘사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春秋)』는 원래 노나라의 연대기였던 것을 공자가 편집하여 개정한 것이라 하는데 그 내용은 B.C.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으로부터 B.C.479년 애공(哀公) 16년까지의 사 건을 기록하고 있다.
춘추와 전국의 분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한·위·조의 3家가 晉을 삼분하여 사실상 독립했던 B.C.453년을 그 분기점으로 보는 견해가 가장 설득력 이 있다. 따라서 『춘추(春秋)』이후에 30년 정도를, 또한 그 이전의 50년 정도를 더하여 춘 추시대(B.C.770∼B.C.453)라 하고 B.C.452년 이후를 전국시대로 규명한다.
이렇게 춘추·전국시대의 두 시기를 구분해 보면 춘추시대에는 아직 명목적으로 주왕의 권 위가 온전하여 서주 이래의 예적(禮的)인 제도가 다소나마 시행되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전 국시대에는 주왕이 완전히 권위를 잃고 이전의 예적 질서도 시행되지 않아 제후국이 서로 쟁탈을 반복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러나 이 두 시대에는 일관된 역사의 흐름도 발견된다. 그것은 분열로부터 통일로 향하는 움직임이다. 춘추시대에는 초기에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70여개국이나 분립하고 있었으나 점차 제후국 상호간의 공방과 동맹을 통하여 패자에 통솔되면서 일종의 제후국연합을 이루 게 된다.
더욱이 그 과정에서 약소국은 점차 대국에 병합되어 주권이 없는 지방도시로 전락하고 이에 따라 대국의 규모는 보다 확대되어 전국시대에는 진·초·제·연·한·위·조의 7대국으로 병합된다. 이리하여 진·한 제국에 선행하는 소제국의 대립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러한 추이의 배후에는 지배집단 내부의 변질과 군주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관료제의 성립 이라는 요인이 작용했으며 특히 농업생산의 발전에 따른 농촌사회의 변화, 화폐경제의 발달, 상업의 성행이라는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요인들은 춘추·전국 시대를 통하여 일 관되게 전개·발달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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