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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호메트

鶴山 徐 仁 2007. 7. 11. 22:59

마호메트 (Mahomet ; 570?~632.6.8)

  고대 아라비아의 예언자(nabi) ·이슬람교(敎)의 창시자로서 아라비아 원음으로는 무하마드(Muhammad)라고 한다. 이슬람교도는 보통 라술라(Ras後ll嚆h), 즉 ‘알라의 사도’라고 부른다. 아호메트가 끼친 영향은 다음 세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이슬람교는 세계의 약 5억 명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믿는 산 신앙이기 때문에 그 종교적 영향력을 들 수 있다. 둘째, 그가 시작한 운동은 20년이 채 못 되어서 비잔틴 제국과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를 뒤흔들고 새로운 문명을 수립했으므로 역사적 영향력이 컸다. 셋째, 이슬람은 종교인 동시에 사회조직체계이기 때문에 정치적·사회적 영향력이 지대했다. 그밖에는 생애의 여러 면에 대한 마호메트의 행동기록(하디스)은 신자가 준수해야 할 규범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인격이 후세 이슬람교도의 일상생활과 사물에 대한 견해에 강한 영향을 미친 것도 중요하다.

  중년(中年) 이전 그의 경력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으나, ‘코끼리의 해’에 출생하였다는 전승(傳承)이 있으며, 570년경 아비시니아군(軍)이 코끼리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남(南)아라비아로 침입해 왔으므로 이 무렵에 출생하였다고 생각된다.

  마호메트의 하심 가문(家門)은 메카의 명문인 쿠라이시 부족(部族)의 일원이었지만, 아브두 샴스 가문(후의 우마야 가문)만큼 혜택받은 입장은 아니었다. 부친 압둘라가 일찍 죽었으므로, 마호메트는 조부에 의해 양육되었으며 조부의 사망 후로는 숙부 아브 탈리브의 보호를 받았다. 청년시절 그는 대상(隊商)을 따라 시리아 등지를 왕래하였으며, 그 사이 유력한 상인의 미망인인 하디자 밑에서 일하는 도중, 마호메트의 성실함에 큰 감명을 받고 그녀가 구혼을 하였다. 595년 마호메트는 십여 세나 연상인 하디자와 결혼, 3남 4녀를 낳았으나 남자는 모두 일찍 죽었다.

  610년경 마호메트가 40세 되었을 때, 그는 세속적 생활에서 이탈하여 메카 교외의 히라산(山)에 있는 동굴에서 명상생활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천사 지부릴(가브리엘)을 통하여 알라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한다. 그 내용이 바로 《코란》 제9장(응혈)에 적혀 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알라의 계시를 받게 되어, 드디어 그는 새로운 교(敎)를 창시할 것을 결심하였는데, 부인 하디자가 최초의 신도가 되었고,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가 점차 증가하게 되었다. 이것은 종전까지의 다신교(多神敎)를 부정하고 유일신(唯一神) 알라 앞에서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었으나, 이것은 메카 지배층의 이익에 위배되는 것이었으므로, 613년경 포교활동 개시 후 처음으로 박해가 가해지기 시작하였다. 615년에는 신도 일부가 아비시니아로 피신하자, 그곳 그리스도교도에게 환영받았으나 마호메트 자신은 전부터 타협을 해 두었던 야스리브(후의 메디나)로 이주할 준비를 하고 있었으므로, 622년 9월 24일 아부 바크르 등 70여 명과 함께 메카를 탈출, 야스리브로 갔다. 이를 히즈라(헤지라:聖遷이란 뜻)라고 하는데, 훗날 이 해를 이슬람력(曆)의 기원으로 삼게 되었다(622년 7월 16일).

  당시 메디나에는 내분이 있었으나 마호메트는 정치적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태를 수습하고, 메카에 대항할 수 있는 군대를 양성하는 동시에 이슬람 교단(敎團)의 모체를 만들어내었다. 무하지른(히즈라에의 동행자)과 안사르(메디나에서의 협력자)가 그 중추를 이루어 이슬람교도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624년에는 메카의 대상(隊商)을 습격하는 동시에 예배의 방향을 예루살렘에서 메카로 변경함으로써 메카 정복의 의지를 나타내었다. 이 대상 습격을 계기로, 바드르에서 메디나측과 메카측의 일대 결전이 벌어졌는데, 메디나측이 수적으로 우세한 메카측을 무찔러 의기가 충천하였다. 메카측은 마호메트 박해의 최선봉장이던 아부 자푸르가 전사한 후로는 아브두 샴스 일문(一門)인 아부 수피안이 부족장이 되어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듬해인 625년 우후드산(山) 밑에서 메디나측은 재차 메카측과 교전하여, 메디나측이 상당한 타격을 입었으나 마호메트의 사기는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그 후로는 당분간 내정(內政)과 포교에 힘썼다. 이 무렵 이슬람교도에 대한 협력이 기대되었던 유대교도와의 관계가 악화되었으며, 메디나측에 대해 대항하던 쿠라이저족(族) 등이 마호메트의 명령에 의해 멸망되는 일 등이 있었다.

  627년에는 메카군(軍)이 메디나를 포위하였으나, 페르시아 사람인 사르만의 헌책(獻策)을 받아들여, 도시 주위에 큰 도랑(한다크)을 파 방어에 성공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를 한다크 전쟁이라고 불렀다. 628년 메카 교외인 후다이비야에서 메카측과의 화약(和約)이 체결됨으로써, 이듬해에는 메카 시민들이 일시 대피한 가운데 메디나측 시민의 카바(Kabah) 순례가 행하여지기도 하였다. 630년 1월 마호메트는 메카로 군대를 진격시켜 10월에 메카에 도달하였다. 마침내 아부 수피안이 항복하고, 11월에 약간의 저항을 물리치면서 마호메트는 메카로 입성하여, 카바 신전에 안치된 많은 우상을 부수고 화상(畵像)도 지워버렸다. 그때의 감격은 《코란》 제17장(밤의 여행) 가운데 있는 “진리가 와서 허위는 망해 없어졌다”라는 말에 나타나 있다. 마호메트의 메카 정복 이후 아라비아 반도 전역의 각 부족은 속속 이슬람교를 받아들여 교단 형성이 완성되어, 632년 3월에는 메카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고, 마호메트 자신이 순례를 지휘하였다. 그 후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8일(이슬람력 11년 3월 13일) 애처 아이샤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하였다.

  마호메트가 말한 계시와 설교는 《코란》 제114장 6,211구 속에 담겨져 있으며, 이것 외에도 많은 전승(하디스), 그리고 이븐 이스하크에 의한 전기(원본은 없어져 이븐 히샴의 採錄으로 전해졌음), 알 와키디와 이븐 사드 등의 저작이 마호메트의 전기 자료로 되어 있다. 유럽에서는 옛날부터 단테, 볼테르, 나아가 기번, 칼라일 등의 기술이 있으며, 그리스도교적 입장에서 마호메트상(像)이 이루어져 통용되어 왔다. 이것은 “한 손에는 《코란》, 다른 손에는 칼”에 나타나 있듯이, 호전(好戰)적인 마호메트가 이교도나 유대인을 가차없이 멸망시키거나, 자기의 교리를 억지로 강요했다는 식으로 되어 있으며, 또한 그가 여러 여성과 관계하였다는 점을 들어, 마호메트가 호색(好色)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근대 이후로는 뷔스텐펠트, 네르데케, 불, 안드라에, 와트 등의 연구를 통하여 단지 실증적으로 많은 점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견해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여 내면적 이해를 심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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