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政治.社會 關係

이명박이 걸어온 길… 15년만에 다시 쓰는 ‘성공신화’

鶴山 徐 仁 2007. 8. 23. 08:50

92년 민자당 전국구 25번으로 14대 국회 입성
노무현 후보 꺾고 종로서 당선됐지만 의원직 잃어
재수 끝에 서울시장… ‘청계천 복원’으로 재기 발판

  • 권대열 기자

    • ‘샐러리맨 신화(神話)’ 이명박은 정치인으로서의 신화 창조에도 성공할 수 있을까.

      이 후보는 20일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면서 자신의 정치 인생 중 최고의 순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정치인’ 이명박의 여정(旅程)은 그리 순탄치만은 않았다.

      ◆정주영과의 결별과 정계 입문

      이 후보는 1988년 13대 총선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으로부터의 출마 권유는 거절했다.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1991년 12월 직접 대선에 출마, “함께 하자”고 한 제의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민자당에 있던 지인(知人)들의 권유로 이 후보는 92년 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전국구 25번을 배정받았다. 이 후보의 형인 이상득 국회부의장은 “92년 1월 내 딸 결혼식에서 YS와 인사했는데 다음날 YS가 ‘한번 보자’며 연락이 왔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해 YS가 이 후보를 정계에 끌어들인 것으로 기억했다. 하지만 당시 여당 핵심들의 말을 종합하면 이 후보는 정주영 국민당 후보의 ‘바람’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스카우트된 면이 많았다.

    • ▲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는 현대건설 과장 때인 29세(1970년)에 현재의 부인 김윤옥씨와 약혼했다. 당시 약혼식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이 후보(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

    • 이 후보는 당시 “고르바초프라는 위대한 인물에 의한 세계의 변화, 그리고 한반도 주변의 변화 등을 지켜보면서 뭔가 한국 정치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고 정치에 뛰어든 이유를 말했다.

      ◆노무현 꺾고 종로에서 당선, 그러나…

      14대 의원으로 국회에 들어왔지만 YS 직계들이 힘을 쓰던 민자당 내에서 아무런 세(勢)도 없던 그는 서울시장으로의 변신을 꿈꿨다. 이 후보는 그러나 95년 처음 실시된 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서 YS가 밀었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배의 쓴잔을 마시게 된다. 이 후보는 이때 결과에 승복하고 정 전 총리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이 모습을 본 YS는 이 후보에 대해 “거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는 후문이다.

      서울시장 도전에 실패한 이 후보는 정치권에 남을 수밖에 없게 됐고 96년 15대 총선을 준비하며 정치1번지였던 서울 종로구에 출마를 하게 된다. 당시 경쟁자는 노무현 현 대통령(민주당), 이종찬 국민회의 부총재였다.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당선됐지만 법정 선거비용보다 돈을 더 많이 쓴 사실이 인정돼 법원에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았다. 선고 직전 이 후보는 국회의원직을 사직했다. 비용 초과 지출을 폭로했던 김유찬 당시 비서를 해외로 도피시켰다는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되면서 그의 정치 인생은 최대 위기를 맞았다.

    • ▲ 이명박 후보(왼쪽에서 두번째)가 현대건설에 재직할 당시 정주영 회장과 윷놀이를 하고 있다.

    • 서울시장으로 재기

      1998년부터 2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며 와신상담하던 이 후보는 2000년 귀국한 뒤 정치 재개를 준비했다. 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5선의 홍사덕 의원과 한나라당 후보를 놓고 경쟁해서 이긴 뒤 본선에서 여당의 김민석 후보를 꺾으면서 대선 도전을 위한 발판 마련에 성공했다. 그때 이 후보가 내건 공약은 ‘청계천 복원’ ‘시내 5개 간선도로에 버스전용중앙차로제 도입’ 등이었다. 정치권과 전문가들 반응은 “과연 가능하겠는가”라는 것이었고, “결국은 다른 사람들처럼 저항에 부딪혀 포기하게 될 것”이라는 말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4년 만에 두 공약을 모두 성공시킴으로써 다시 한 번 국민들에게 ‘일을 해내는 이명박’ ‘불도저’이라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한나라당 ‘벽’ 깨기

      서울시장으로서는 성공했지만 작년 6월 대선을 목표로 여의도 정치권에 돌아온 뒤엔 또 하나의 벽을 넘어야 했다. 5·31 지방선거 압승을 이끌었던 박근혜 대표가 여론조사 1위를 달리며 철옹성을 구축하고 있던 터였다.

      이 후보는 이런 한나라당을 공략하기 위해 당보다는 국민을 상대로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했고 그 결과 작년 10월을 전후해 지지율 1위 후보 자리를 꿰찼다.

    • ▲ 서울시장에 당선된 직후인 2002년 7월 11일 각계 전문가들과 함께 청계천 복개 도로 내부를 살펴보고 있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주완중 기자 wjjoo@chosun.com

    • 고건 전 총리가 대선 출마를 포기하면서 지지율 50%의 벽까지 뚫은 기세를 활용해 이 후보는 당내 세력 확장에 나섰고 올 봄쯤에는 박 전 대표와 맞먹는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다. 이때 다져놓은 조직력이 이번 경선에서 ‘현찰’로 이어지면서 영남 철옹성을 넘어 한나라당 후보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가난 딛고 자수성가

      정치권에 들어오기 전까지 이 후보의 삶은 그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두 편이나 만들어졌을 정도로 ‘성공신화’였다. 그는 이충우씨의 4남3녀 중 다섯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집안 형편 때문에 진학은 엄두도 내지 못했으나 3년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으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조건으로 고향인 포항에 있는 동지상고 야간부에 진학했다. 결국 끝까지 1등을 했다.

      서울로 이사한 뒤에도 그는 막노동을 하며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험서를 구해 공부했다. 그는 “대학중퇴가 고졸보다는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입시를 준비했다”고 했다. 이태원 시장에서 매일 새벽 쓰레기 치우는 ‘넝마주이’ 일로 등록금을 댔다고 한다.

      그는 4학년 때 학생회장 직무대행으로 6·3 데모를 주동하다 6개월간 형무소 생활도 했다. 현대건설 입사 후에는 5년 만에 이사, 12년 만에 사장이 돼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 된다.

       

      이명박 연표 

      ▲1941.12.19 일본 오사카 출생

      ▲46 부모와 함께 귀국

      ▲54.2 포항 영흥국민학교 졸업

      ▲57.2 포항중학교 졸업

      ▲59.12 동지상고(야간) 졸업 앞두고 상경(上京)

      ▲61.3. 고려대 상과대학 입학

      ▲64 6.3운동 참여, 국가내란선동죄로 서대문형무소 6개월 복역

      ▲65 졸업 후 현대건설 입사

      ▲70.12.19 김윤옥씨와 결혼

      ▲77 현대건설 대표이사 사장 취임

      ▲88 현대건설 회장 취임

      ▲92 정주영 명예회장 국민당 창당 시 결별. 서울시장 출마 모색

      ▲92.4 14대 총선 당선(민자당 전국구 25번)

      ▲95 민자당 서울시장 후보경선에서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 패배

      ▲96.4 15대 총선서 이종찬, 노무현 누르고 당선(신한국당 종로)

      ▲96.10 비서 김유찬 홍콩출국사건 개입과 선거비용 초과지출 혐의로 기소

      ▲97.9 법정선거비용 초과지출과 범인은닉으로 1심에서 유죄 판결

      ▲98.2 재판 중 의원직 사퇴

      ▲98.4 서울시장 출마 포기. 도미(渡美)해 조지워싱턴대 연수

      ▲2000 귀국

      ▲02 정치 복귀 준비

      ▲02.5 32대 서울시장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김민석 후보에 승리

      ▲04~05 청계천 개통, 대중교통 체계 개편

      ▲06.6 서울시장 이임

      ▲07.5 대선출마선언

      ▲07.8 한나라당 대선경선 승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21/200708210008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