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에 이어 7년만에 제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이 8일 발표됐다. 국민들은 이 회담이 남북간 평화공존 시스템을 보다 공고히 하고, 나아가 통일을 위한 초석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남북간 최고위급 정치적 연결고리가 다시 이어지는 이 때, '한반도종단철도(TKR)'의 중요성 또한 새삼 부각되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남한과 북한의 정책적 교류와 화합을 이끌어낼 수단이라면, 한반도종단철도 프로젝트는 끊어졌던 양국간 철로를 이어 화해하는 남과 북의 모습을 실질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회다. 남북 철로 연결은 추후 러시아와 유럽으로 이어지는 철길이 우리 땅에서 시작됐다는 긍지를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한반도종단철도 기획기사'를 4차례에 걸쳐 싣는다. <오마이뉴스 편집자 주> |
▲ KTX 열차를 타고 이 땅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 달려보면 어떨까? |
ⓒ2007 홍성식 |
연일 이어지는 폭염. 아스팔트까지 녹아내리는 도심 속 열기를 벗어나 파도가 출렁이는 시원한 해변을 맨발로 산책하거나 강변 원두막에서 차가운 수박을 쪼개먹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한 미소가 떠오르는 요즈음이다.
덜컹거리는 비둘기호 열차 객실에서 엄마가 건네주던 삶은 달걀과 사이다를 먹던 어린 날. 아스라히 멀어지는 철로를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을 추억하는 꿈. 기차여행에는 무엇보다 낭만이 있다. 그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그 소박한 믿음을 새삼 떠올리며 섭씨 30℃가 넘는 더위 속에서 집과 회사만을 오가는 단조로운 여름을 지내온 스스로에게 조그만 상을 주기로 결정했다. 바로 대한민국 남쪽 끝에서 북쪽 끝까지를 기차로 달려보자는 것. 좀은 거창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낭만과 추억을 재구성하는 여행'이었다.
덥다, 떠나자
▲ 서울역. |
ⓒ2007 홍성식 |
경의선 임진강역까지 가보기로 한 건 한반도 종단철도(TKR)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 때문이다. 군사분계선 탓에 끊어진 남북간 철로를 이어 남한의 문산과 임진강을 거쳐 북한의 개성과 청진·나진과 두만강까지 달려간다는 계획. 거기서 한반도 종단철도가 시베리아 횡단철도(TSR)와 연결된다면,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유럽까지 갈 수 있는 날이 오는 것이다.
부랴부랴 짠 대략의 계획표만 머릿속에 그려넣고 부산행 KTX가 기다리는 서울역을 향했다. 지난 7월 31일 오후 1시였다.
날렵하게 생긴 외형의 KTX 열차는 예정된 시간이 되자 철로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객실 가운데 마주보는 좌석에 앉은 아버지와 엄마, 어린 두 딸의 도란도란 속삭임이 정겹다.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렸을까. 내다보는 기차의 창 밖 풍경이 서울과는 딴 판이다. 녹음 우거진 야트막한 산들과 그 산 곳곳에 핀 이름모를 붉은 꽃들. 거기에 저수지나 강변에게 물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까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십수 년 전으로 돌아온 듯한 감흥에 기차에서 읽으려 준비한 소설책에는 눈길이 가질 않았다.
시속 290㎞를 넘나드는 엄청난 속도에도 객실 안에선 별다른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주 잠깐 바깥 풍광에 취해있었을 뿐인데, 벌써 차창 가득 낙동강 지류가 넘실대는 걸 보니 부산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아, 코 끝을 스치는 매혹적인 바다 향기. KTX는 정확히 2시간 57분만에 나를 서울에서 부산으로 데려왔다.
[서울~부산 2시간 57분] 곰장어에 소주 한잔... 달맞이 고개엔 밤이 내리고
▲ 부산역. |
ⓒ2007 홍성식 |
거기서 길 하나만 건너면 부산의 명물 '자갈치시장'이다. 갯내 가득한 거리엔 갖가지 생선이 즐비하고, 횟집 수십여 개가 저마다 환하게 불을 밝혔다. 손님을 붙드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거친 목소리가 싫지만은 않다.
바다쪽을 향해 있는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맛보는 곰장어(먹장어)와 고래고기가 별미다. 이런 풍경을 앞에 놓고 어떻게 소주 한 잔이 없을 수 있겠는가. 미나리와 콩나물을 곁들인 복어매운탕도 빼놓을 수 없는 부산의 대표적 먹을거리.
자갈치시장에서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40여분을 가면 해운대다. 대한민국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해수욕장. 밤낮 없이 복잡한 해변과 인근 유흥가를 벗어나 밤이 내린 달맞이고개에 오른다. 그 곳에서 만난 야경.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홍콩의 야경이 아름답다는데 이만할까?
▲ 부산의 바다 풍경. |
ⓒ2007 홍성식 |
▲ 달맞이고개에서 바라본 해운대의 야경. |
ⓒ2007 홍성식 |
지난 밤. 항구도시의 정취에 취해 잠을 설쳤다. 하지만 나는 느긋함을 용서받을 수 있는 여행자. 느지막하게 일어나 부산역을 향했다. 열차 시간 탓에 점심을 거른 채 부산발 대전행 KTX에 올랐다. 그 때 시간이 1일 오후 2시 30분.
열차는 구포와 밀양을 지나쳐 동대구역에 잠시 정차했고, 이어 대전을 향해 속도를 높였다. 다시금 창 밖으로 펼쳐지는 수채화를 닮은 시골마을 풍경들. 거기서 기자는 1930년대 한국 최고의 시인 백석의 절창 '하답(夏沓)'을 떠올렸다.
짝새가 발부리에서 날은 논드렁에서 아이들은 개구리의 뒷다리를 구어먹었다
게구멍을 쑤시다 물쿤하고 배암을 잡은 �의 피 같은 물이끼에 햇볕이 따그웠다
돌다리에 앉어 날버들치를 먹고 몸을 말리는 아이들은 물총새가 되었다.
한가로운 여름날의 정경을 노래한 시의 감흥에 젖어있던 시간도 잠깐. 부산을 떠난 지 1시간 47분만인 오후 4시 17분. 열차는 대전역에 멈춰 섰다. 역을 빠져나와 인근 식당에서 늦은 점심으로 조밥에 고등어조림을 달게 먹고 나오니 '전국이 1일 생활권'이라는 게 실감으로 느껴졌다.
대전역에서 택시로 10분 거리에 있는 동부시외버스터미널 인근에서 어릴 적 친구를 만나 함께 낯선 도시를 거닐었다. 그날 밤. 이번 기차여행이 선물해준 낭만과 향수에 다시 한번 고마워했다. 여행지에서 올려다보는 달은 유난히 둥글었다.
[대전~서울 59분] 여기서 통근해도 되겠구나
대전에서 서울까지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였다. 2일 오후 3시 3분에 대전역 플랫폼을 출발한 KTX 열차가 다시금 일상이 시작될 서울역에 기자를 내려놓은 시각은 4시 2분. 59분의 초고속 질주였다.
교통정체가 심한 출퇴근 시간이라면 분당에서 서울 도심까지 걸리는 시간보다 짧았다. 대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는 이야기가 풍문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 대전역. |
ⓒ2007 홍성식 |
▲ 열차 밖 풍경이 수채화를 닮았다. |
ⓒ2007 홍성식 |
기차에 몸을 싣고 천리 먼 길을 내려갔다 다시 거슬러 올라왔다는 감흥과 거기서 쌓인 여독을 풀 겨를도 없이 서울역을 출발해 임진강역으로 가는 통근열차에 올랐다. 이 길을 따라 끊어진 경의선 선로가 완전히 복원되고, '한반도 종단철도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미래의 기차여행은 더 다채롭고 풍요로워질 터.
신촌과 행신·백마와 금촌을 거친 경의선 통근열차가 문산을 지나 임진강역에 이르는데 소요된 시간은 1시간 20여분. 느리게 달리는 열차에서 내다보는 거리와 산과 들은 KTX에서 만나는 창 밖 풍경과는 또 다른 정감을 준다.
임진강역엔 이미 50년 전 자신의 시로 휴전선의 철조망을 걷어내고자 했던 시인 박봉우(1934~1990)의 시비(詩碑)가 우뚝 서있다. 신영복이 글씨를 쓰고, 조각가 김운성이 깎아 다듬은 시비에 새겨진 '휴전선'.
시인은 더 이상 북쪽으로 달리지 못하는 경의선 철마를 안타까워하는 2007년 사람들의 심정을 1956년에 이미 예언했던 것일까? 임진강역을 지나 반세기 이상 볼 수 없었던 북한의 마을과 산천을 바라보며 기차여행을 하는 상상은 여전히 꿈에 불과한 것일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마음 속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철길을 따라 꿈을 넓혀보자
▲ 임진강역에 세워져 있는 박봉우 시비. | |
ⓒ2007 오마이뉴스 홍성식 |
하지만, 그런 지레짐작의 걱정은 배제하고 낭만적으로 말해볼 수는 없을까. "끝없이 이어지는 철길이 우리 땅에서 시작해 북한을 거쳐 유럽까지 이어진다는 건 우리들 꿈의 영역이 넓어지는 것과 같다"고 말이다.
건강한 20대 청년이 여자친구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 모습을 그려보자.
"이번 여름에 나랑 함께 부산에서 두만강, 러시아를 거쳐 독일까지 기차여행 하지 않을래?"
이런 유쾌한 상상이 실현되는 날이 어서 빨리 왔으면 좋겠다. 나 역시 그 여행에 동행하고 싶다.
/홍성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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