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주사 팔상전
탑(塔)돌이
姜 中 九
사람들이 탑돌이를 한다. 둥근달이 휘영청 밝은 정월 대보름날 밤에 사람들이 탑 주위를 돌면서 한해의 소원을 비는 것이다. 탑돌이는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풍습으로 사람들이 탑을 돌면서 소원을 빌면 부처님의 힘으로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불교가 발생한 인도에서는 최상의 인사법으로 그 사람의 주위를 오른쪽으로 홀수 번 돈다. 이것은 그를 호위하면서 따르겠다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사리를 탑에 모신 제자들은 부처님을 존경하듯이 탑을 경배하게 되었다. 부처님이 보고 싶을 때면 탑을 찾아가고, 어려움이 있을 때에도 탑에 가서 도움을 청했다. 탑을 찾아봄으로써 부처님을 생각하며 불법을 되새기는 것이다. 제자들은 부처님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탑 주위를 돌면서 자신의 신앙심을 키워갔다. 이것이 일반대중들에게 전해지면서 형식을 갖춘 의식으로 발전된 것이 탑돌이다.
사람들은 정월 대보름날 밤이면 너도 나도 절에 가서 소원을 빌면서 탑을 돌았다. 집안이 무사태평하도록 빌고 풍년이 들도록 빌었으며 처녀총각들은 시집장가를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그것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부녀자들에게는 바깥나들이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 중에서도 처녀들에게는 일 년에 단 한번 떳떳이 외출을 할 수 있는 날이자 이성을 만날 수 있는 날이기도 했다.
처녀들은 밝은 달빛 아래서 탑돌이를 하다가 마음에 드는 총각을 만나면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랑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게 되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상사병을 앓게 된다.
그런데 개성 기생 황진이는 너무 출중해서 그랬을까, 그와는 반대로 남자가 상사병을 앓다가 죽었으니 말이다. 개성에서 태어난 황진이는 시문과 가락에 뛰어나고 용모 또한 출중했다. 그녀가 15살 때 동네 총각 하나가 그녀를 연모하다가 상사병에 걸려서 죽고 말았다. 총각의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움직이지 않자 그녀가 옷을 벗어 상여위에 얹어주었더니 움직여서 장례를 치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그녀는 기생이 되었고 뛰어난 시재와 용모로 유생들을 매혹시켰다. 그리하여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그런데 조선조 때 탑돌이는 상당히 문란했던 모양이다. 세조 때 원각사의 탑돌이는 풍기가 하도 문란해서 금지령까지 내렸다고 했으니 말이다. 아니 어쩌면 그 무렵 원각사의 탑돌이는 세조의 숭불정책에 탄복한 부처님이 백성들의 소원을 너무 잘 들어주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탑돌이는 불자들이 스님들과 함께 탑을 돌면서 부처님의 공덕을 찬미하고 자기의 염원을 빌던 데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신라 원성왕 때에는 4월 초파일부터 15일까지 경주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있는데 그 후로 더욱 발전하여 탑돌이는 자기의 소원성취를 비는 외에도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거국적인 행사가 되었다.
사월 초파일이면 불자들은 절에 모여서 제를 올리고 부처님의 공덕을 기리면서 밤이 새도록 탑을 돌면서 송불(頌佛)의 노래를 불렀다. 처음 탑돌이가 시작될 때에는 범종, 법고, 운판, 목어의 사법악기(四法樂器)만으로 범패를 부르던 것이 훗날에는 피리 둘에 대금, 해금, 장구, 북으로 편성한 삼현육각(三絃六角)이 합쳐지고 노래도 보시염불(報施念佛)과 백팔정진가(百八精進歌) 등을 부르게 되었다. 처음에는 순수한 불교의식으로 시작된 것이 차츰 일반적인 민속행사로 변질된 것이다.
그런데 정월 대보름날 탑돌이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책을 뒤져봐도 알 길이 없다. 그것은 아마도 새해 들어 첫 보름날 밤에 사람들이 절을 찾아 부처님께 새해의 소망을 빌고 탑돌이를 한 데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탑돌이는 절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탑돌이의 대표적 사찰인 법주사에서는 먼저 팔상전 주위에서 부처님에게 공덕을 빌고 목탁소리와 함께 탑돌이 노래를 시작한다. 신도들은 염주를 손에 들고 스님들이 인도하는 대로 팔상전을 한 바퀴 돌아오면 탑제를 올리고 각자의 축원을 드린다. 제가 끝나면 본격적인 탑돌이를 하는데 육바라밀다(六波羅密多)와 십바라밀다(十波羅密多), 정진도를 그리면서 도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즉, ① 둥근 달 모양으로 돌며 중생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는 보시(布施)를 시작으로 ② 반달형으로 돌며 계행(戒行)을 굳게 지킨다는 지계(持戒), ③ 신날형으로 돌며 인욕을 참고 법성(法性)을 밝힌다는 인욕(忍辱), ④ 가위형으로 돌며 전진이 있을 뿐 후퇴가 없음을 나타내는 정진(精進), ⑤ 구름 모양을 이루며 도는 선정(禪定), ⑥ 절구형이고 지혜로워 행진무득(行進無得)을 나타낸다는 지혜(智慧), ꊏ 좌우쌍정형(左右雙井形)이고 한 샘에서 두 우물을 만들어 동서가 두루 편하다는 방편(方便), ⑧ 전후쌍정형(前後雙井形)으로 2개의 원 모양을 그리며 도는 원(願), ⑨ 2개의 고리형으로 정력(正力)을 뜻하는 역(力), ⑩ 성중단월형(星中丹月形)이며 법을 아는 데 아무 거칠 것이 없음을 뜻하는 지(智)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세시풍습은 경제개발이 이루어지면서 거의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부녀자들은 그네를 타고 남정네들은 씨름을 하던 오월 단오절도 견우와 직녀가 만나서 사랑을 나눈다는 칠월 칠석도 우리들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지 이미 오래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탑돌이가 관광 상품으로 발전하고 있다. 천년고도인 경주 신라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달빛 신라 역사기행’이 바로 그것이다. 10여 년 전부터 한 달에 한두 차례 실시하는 이 행사는 보름달이 밝은 밤에 사람들이 등을 들고 절에서 탑돌이를 하는 것이다.
이 행사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어나서 요즘은 6,000여명이나 되고 외국인 관광객도 100여명이나 참가한다니 대단한 일이 아닌가. 우리의 아름다운 풍속이자 청춘남여들에게는 사랑과 꿈을 심어 주는 탑돌이가 더욱 발전하여 길이길이 보전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정월 대보름이라 창밖에 비치는 달빛이 그를 수없이 곱다. 저 달빛은 해인사 뜰에 서있는 삼층 석탑에도 비치겠지. 젊은 날, 내가 가야산 해인사를 처음 갔을 때 그 석탑 앞에서 소망을 빌던 생각이 난다. 부디 총명하고 귀여운 규수랑 속세의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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