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아버지의 삶

鶴山 徐 仁 2007. 3. 2.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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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삶
    봄볕이 유난히 따사롭다. 재작년 이맘때쯤, 어릴 적 살던 고향을 거의 30년 만에 찾았었다. 파릇한 쑥을 뜯으러 다니던 논둑 길, 옛 살던 집터, 그 마당에 내리쬐던 눈부시던 햇살, 암탉 “구구” 알 낳던 소리…, 또 무슨 싸움이 났던가 싶던 소리는 우리 아버지 목소리였다. “앗따, 한번만 봐 주소! 사흘 굶어 남의 담 안 넘을 사람 어딨노. 애가 배고프다 울어 싸니, 고마 눈이 디비졌겠지…” 하며 손까지 쓱쓱 비비며 사정하는 모습은, 누가 봐도 잘못을 한 사람은 우리 아버지였다. 옆에 쭈그리고 있는 또 한 사람이 아니었으면…. 그 기억은 하도 생생해서 현기증이 나는 것 같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서 있었다. 지루해 하는 남편이 옆에 있는 것도 잊은 채 오래 오래… 내게 항상 아버지는 부끄러움뿐이었다. 태어나면서 줄곧 보아온 검은 경찰복이 부끄러웠고, 한쪽 다리 무겁게 끌면서 절고 다니시는 모습이 그러했고, 무엇보다 무궁화 이파리 하나, 모자에 달린 계급장이 부끄러웠다. ”저렇게 다리가 불편한 사람이 무슨 순사질을 옳게 하것나?” 쑥덕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 남매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아버지 계시던 경상도와 먼 곳, 대전에서, 서울에서 공부했다. 나는 가족란에 꼬치꼬치 적어내는 게 고역이었다. 순경인 직위까지 쓰기가 부끄러워, 간도 크게 '경위'라고 속였다. 나는 늘 목이 마르고 배가 고팠다. 나중에 돈 많이 벌면 콜라를 사서 벌컥벌컥 마시는 게 소원이었다. 어떤 애가 “우리 아빠는 겨우 경장인데, 니네 아빠는 파출소장이라면서? 무궁화 하나지?”하며 부끄러운 듯 물었다. 속으로 뜨끔해 얼굴이 벌개져서, 고개만 여러 번 끄덕거렸다. 아버지의 편지는 늘 두 줄뿐이었다. “잘 있나? 우리도 잘 있다. 연탄가스 조심해라. 항상 걱정이다. 돈이 조금이라 미안타.” 그러면 내 대답은 “훌륭한 사람이 되어 백 배 갚겠습니다.” 아마 그렇게 쓰곤 했던 것 같다. 울컥 목이 메는 이유는 갚기는커녕, 따뜻한 말 한마디 못해 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한번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무궁화 잎 두 개가 정성껏 그려진 승진한 내용이었고, 여섯 줄 정도로 매우 기쁜 마음을 적고 있었는데, 나는 남이 볼까 얼른 감추었다. 그 뒤 3년 후 아버지는 정년퇴직을 하셨다. 만 50세 그 당시에는 정해진 정년이었다. 아버지의 정년퇴직 후 우리 일곱 식구는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검은 경찰복이 아닌, 희끄므레한 겉옷은 난생 처음 보는 사복 차림이었다. 어색했다. 우리 아버지 같지 않았다. 아버지는 다만 정년을 채운 퇴직을 자랑스레 여기셨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통장에는 돈이 한 푼도 저축되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아버지는 바뀐 환경에 적응을 하지 못하셨다. 시골에서는 24시간을 늘 바쁘게 긴장하며 생활하셨기에, 낯설고 적막한 서울의 13평 아파트는 하루하루를 견디기 힘들게 했다.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었고, 좁은 베란다 창틀에 팔을 기댄 채, 하늘 쳐다보는 일이 전부였다. 어쩌다 맞은편 노인을 보게 되면 하는 혼잣말, “저기도 늙은 닭 한 마리 갇혀 있네”라고 중얼거리곤 하셨다. 그렇게 답답해하실 때도 식구들은 각자 바쁘다는 핑계로 얼굴 대하기도 뜸하게 하루하루 지내던 날들… 꼭 3년 반이 흐른 어느 날, 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셨다. 작은 방문에, 넥타이로, 목을 매고…. 그때 심정을 무슨 재주로 글로 표현할까! 그 기막힌 절망을…. 내 젊은 날은 방황의 나날이었고, 슬픔보다 공포였다. 가슴엔 늘 무거운 돌이 짓누르고, 모든 식구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넋이 빠져 있었다. 그 어두운 15년의 세월이 흘러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결혼을 했다. 시아버지께서는 공무원 딸이면 볼 것도 없다며 맘에 들어 하셨다. “부친께선 왜 그리 빨리 가셨누? 우리보다 열 살이나 젊은 나이에…” 난 차마 말씀드리기 민망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갑자기… 갑자기” 하는데 목이 막혀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간 동생들 공부시키느라 늦었구먼…” 하시며 대견해하셨다. 시어머니가 따스한 목소리로 부르시는 ‘새아기’라는 소리는 너무나 듣기 좋았다. 그러나 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까 봐 노심초사였다. 불쑥 “쉰넷 젊은 연세에 왜 돌아가셨어? 무슨 병이었는데?”라고 묻곤 하다가, 어디에서 누가 스스로 목숨 끊었다는 보도가 있을 때마다 “죽긴 왜 죽어, 나는 자살하는 인간들이 이해가 안 가. 죽는다고 해결되나? 최고의 이기주의자에 무책임한 사람 아닌가? 어떻게 생각해?” 하며 묻기까지 했다. 그때마다 바늘로 콕콕 찔리는 것 같았다. 그건 부끄러운 아픔이었다. 아버지가 정년퇴임한 곳은 경상도 첩첩산골 작은 마을이다. 고향 여행은 그곳까지 찾아갔었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고 싶었다. 당신보다 훨씬 젊은 상관에게 “열중 쉬어” 자세로 훈시 들으시던 모습, 곤한 잠에도 벌떡 일어나 서둘러 나가시던 그 불편한 다리. 자식들 앞에선 뭐가 그리 좋은지. 늘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또 다시 생생하게 가슴을 서늘케 만들었다. 그때였다.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인 것 같았다. “박 순경 딸이 왔다꼬? 식사 대접은 내가 먼저구마.” “아니다. 오늘 저녁 절대 딴 집은 안 된다. 꼬옥 우리 집으로 모두 다 오셔야 됩니더.” 동네 사람들이 서로 먼저 식사 대접을 하겠다고 우기는 듯했다. 그날 저녁, 난 눈이 휘둥그레지는 밥상을 받았다. 그간 살면서 내가 받은 최고의 진수성찬이었다. 그만큼 차리려면 얼마나 바삐 움직여야 하는지 알기에 고맙고 또 미안했다. 손수 다듬어서 무치고 볶은 갖가지 나물, 큼직한 생선찜, 여러 가지 졸임, 산골에서는 구하기 힘든 쇠고기 산적까지 있었다. 나는 주책없이 넙쩍넙쩍 술까지 받아 마시고 취해버렸다. 꿈결 같은 소리가 들렸다. 웅성웅성 여러 사람이 하는 소리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게 “너거 부친만큼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 나 살다 살다 본적 없다. 세상에~ 벌금 받으러 가서 받기는커녕 주머니 동전까지 톡톡 다 털어 주고, 굶는 사람 쌀 사 주고, 아픈 영감들은 업어다가 병원으로 모시고, 세상에 그 몸으로 업고 댕겼다카대. 퇴직하고 가고 나니 여기저기서 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라. 배곯던 이가 신세 많이 졌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59년 사라호 태풍 때도 적당히 몸을 사려야지, 미련스럽게 몇 날 며칠을 물에 온 몸을 담가가 뭐, 하나라도 더 건져준다꼬, 씨름을 했으니, 떠내려 오는 큰 통나무엔가 받혔다카대. 신경을 다쳤다믄서… 사람 좋았지. 그런 사람 어디가서 찾겠노. 고맙다고 뭐라도 드리면 다 필요 없고, 국수나 한 그릇 말아 주소. 배 고프네” 하셨단다. 점점 넋두리처럼 계속되었다. “서울로는 가는 기이 아닌데, 우리라도 붙잡았어야 했는데, 우째 그래 허무하게 가셨을꼬. 뭐하러 서울에 갔노? 아이고 아이고…” 순간 초상집처럼 울음바다가 된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 두통으로 윙윙 귓전에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니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뭔 중 아나? 범보다 더 무서운 게 뭔 줄 아나? 그건 바로 공짜다. 공짜!” 생전에 아버지가 늘 하시던 말이었다. 그 여행 이후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남편에게 다 털어 놓았다. 50대 남자의 외로움을, 적막함을, 불안한 미래를, 자식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나는 알게 됐다고….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건 무관심이었고, 못난 내 책임이라고 고백했다. 참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는 더 이상 남의 죽음을 비난하지 않는다. 나의 부끄러움이 조금씩 엷어질수록 점점 깊어지는 이 안타까움은 무얼까. 햇살이 좀더 따스해지면 아버지 무덤에 가야겠다. 한참 엎드려 오래오래 있고 싶다. 그러나 서둘 필요는 없겠지. 아버지는 이렇게 내 가슴에 24년째 살아계시니까. *70년대는 무궁화 잎 1개가 순경이었고, 2개가 경장이었습니다. 또 그땐 벌금이나 과태료를 직접 걷어서 해당 경찰서로 납부했답니다. . . . . . . . . . * - MBC 라디오 여성시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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