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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구 사람들 -이제는 안에서 찾을 때다-(펌)

鶴山 徐 仁 2006. 11. 15. 11:04
대구 사람들

-- 이제는 안에서 찾을 때다 --

장 기 홍


대구 사람의 특징을 말하려 하면 우선 그들이 경상도 사람임을 말해야 한다. 경상도는 크게 보면 하나의 오지(奧地)이다.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만나는 산지인 것이다. 바깥 세계로 드나드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중에는 당나라까지 유학간 스님들도 있었지만 절대 다수는 교통의 불편 속에 갇혀 살았다. 자연히 촌놈들이 되고 개성 있는 집단이 되어간다.

무뚝뚝한 반면 믿음직해서 좋다는 평도 듣는다. 한번 사귀면 변함이 없더라 하는 평도 듣는데 아마도 유교의 영향이 클 것이다. 그런데 그런 항심(恒心)에 따라 다니는 권위주의적 면모는 타지방 사람들이 보면 당장 눈에 띄는 모양이다.

내가 아는 부인 한사람은 처음 시집왔을 때 시부모가 며느리를 식탁에 같이 앉히지 않고 따로 밥을 먹게 하더라고 옛 일을 회고했다. 집안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권위주의적이고 여자를 낮추어보는 경향은 하나의 특징이 되어 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유교 전통도 관계되겠지만 필시 신라의 역사가 한 몫을 할 것이다.

경상도는 요컨대 옛 신라 땅인데, 신라는 삼국통일을 해버린 내력이 있는 나라다. 당나라를 끌어들인 것은 씻을 수 없는 흠이었으나, 계속된 싸움으로 어느 쪽이든 이기고 보아야 했을 때 백제나 고구려가 못한 일을 신라가 했다. 삼국이 서로 그 위치에 오르려고 경쟁했을 때 마침내 그 자리에 신라가 앉은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신라인들의 자격은 무엇이었던가? 화랑도들의 희생정신이다.

신라에만 화랑도(花郞道)가 있었는데, 싸움터에서 후퇴란 없다는 '임전무퇴'가 그들의 첫 신조였다. 각국에 나름대로 애국심이 있었겠지만 화랑정신은 탁월했다. 신라가 꼭 통일을 해야겠다는 자각이 있었고 원효와 의상의 통일철학도 있었다.

지난날 오스만 터키는 아시아와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이루었는데 그것은 예니체리 군단(軍團)이라는 후퇴를 모르는 무가정(家庭), 독신(獨身)의 군대가 있어서 가능했다. 필자는 결코 그 무자비한 제도를 찬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그대로 말해볼 뿐이다.

희생정신은 이성(理性)의 소산이다. 일견, 욱 하는 충동에서도 그 정신이 나올 것 같이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내 하나 목숨을 잃어 나라가 잘 된다는 '이성'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줄기찬 힘이 나오지 않는다. 백제는 예술의 나라였다. 지금도 거기서 발굴되는 향로 등 미술품들은 미의 극치를 보여준다. 예술이 난숙했던 백제에 비하면 신라는 미보다는 힘이라는 가치에 더 치중했다. 고구려도 힘의 나라였지만 조정의 내분이 그 힘을 좀먹었으니, 자기를 이기지 못한 고구려 왕족들에 비하면 신라는 자제력을 발휘했고 결속을 보여주었다.

불교의 화엄종은 무애(無碍)의 철학을 가르치는데 무애란 '장애와 경계가 없음'을 뜻한다. 원효와 의상은 화엄사성의 대가였다. 의상(義湘)은 머나먼 당나라에 유학 가서 아직 공부를 더해야 할 시기에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신라 조정에 알리기 위해 급거 귀국했다. 나라를 위해 스파이가 되어 귀국했던 애국의 거동이었다. 그밖에도 당시의 여러 일화가 신라인들의 탁월했던 애국심을 말해주고 있다.

앞서 필자는 경상도가 산지(山地)라고 말했지만 그 중에서도 대구는 하나의 분지이다. 지리적인 폐쇄성으로 점지된 셈이다. 삼한시대에는 탁국이라는 변진의 한 소국이 있었는데 그것이 대구였다는 설이 있다. '탁국'에서 '달구벌'을 거쳐 '대구'가 된 것인가?

신라가 가야를 병합하기 전 먼저 탁국이 병합되었다 한다. 어떤 투쟁을 거쳐 신라로 넘어갔는지 알 수 없으나 여하간 그런 내력이 있는 고지(故地)였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옛 일을 알고 나면 대구사람의 폐쇄(閉鎖)성과 비사교적 성격의 기원을 알 것만 같다.

신라의 일급 충신인 김유신장군이 가야의 유민(遺民)이었고 당나라의 고선지장군이 고구려의 유민이었음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망국의 유민들은 흔히 새 나라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특별한 출세를 한다. 나는 대구사람들만큼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데, 그들은 때로는 목적을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무력으로 권력을 쥔 군상이 여기서 나오지 않았던가!

배움에 뜻을 둔 사람들은 교육중심지 대구 분지로 모여든다. 이 폐쇄된 땅의 사람들은 늘 희망이 저 바깥쪽에 있다고나 할까. 그들은 분지 너머 저 동경의 하늘 아래에서 한번 몸을 드높이고 이름을 떨쳐보겠다고 포부를 가져본다!

일본의 명치유신의 공신들은 거의 모두가 벽지 출신이다. 열도의 가장 먼 섬이 아니면 가장 먼 해안지대에서 늘 임금이 있는 수도 동경의 일을 걱정하고 넘보았다. 장차 북경을 차지할 중국 공산당도 사천성이나 섬서성 같은 벽지에서 준비되지 않았던가.

출세는 대개 서울에서 하기 때문에 서울사람이 되어버리고 거기 에너지를 다 쏟고는 고향을 돌볼 여력이 없어진다. 집권자들과 그 권속들, 그들 주위의 모두들, 그리고 실업가와 재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모두 대구를 떠난다. 제일제당, 삼성 등 모두 대구 출신이지만 그들이 남긴 것은 '오페라 하우스' 정도이다. 이렇듯 대구는 잘난 자식들을 둔 어머니 같이 매말랐다.

출세지향적인 사람들은 결코 미식가가 아니다. 그들은 밥맛을 잃어가면서 엉뚱한 곳의 자기네 내심의 목표를 향하여 내닫는다. 경상도 음식은 짜고 맵고 특히 대구는 더하다. 왜 이렇게 맛에서 멀어졌는가는 수수께끼다. 대구에는 특유의 요리가 별로 없다. '소 핏국'이라고도 하는 따로국밥 정도가 그런 것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여하간, 음식에 무신경함이 하나의 특징처럼 되어버렸다.

반평생을 대구에서 보낸 한 노인은 처음 대구에 오니 소고기 값을 부위에 관계없이 균일하게 받더라고 회고하면서 그 덕분에 맛있는 부위를 오래 동안 싼 값으로 사 먹을 수 있었다고 했다. 부위에 따라 차등 있게 값을 받을 줄을 모르는 것은 그만큼 맛을 덜 밝히고 소고기를 다만 소고기이기 때문에 먹어온 자손대대의 습속을 귀띰해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나의 개인적 경험을 떠올린다. 나는 한 때 미국에서 유학생이 된 적이 있는데 전공이 지질학이라 야외답사가 자주 있었다. 미국 학생들의 도시락은 특기할 만 하다. 치즈나 버터로 빵을 먹은 뒤 그들은 흔히 양배추를 통채로 들고 이로 베어먹는 광경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미국인들이 서부 개척 때 오직 영양을 위해 영양분을 취하던 거의 극한상황에서 유래했다 한다. 그들은 신대륙 개척의 벅찬 임무를 완수키 위해 맛을 초월하고 요리를 무시하면서 온 생활로 싸움을 했던 것이다. 논어에는 '발분망식'이란 말이 있지만 분발하느라 맛을 잃었던 그들이라고나 할지. 아마도 경상도 사람들은 인생의 뚜렷한 목적이 별도로 있어서 맛 같은 것은 별 문제가 되지 않던 그런 차원의 사람들의 후예가 아닌가? 가난하여 요리를 할 줄 모르게 되어버렸다는 것쯤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가정과 여자에 대한 태도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된다. 나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여자는 마치 헌 그릇처럼 담 너머로 내던질 것'이라고 가끔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가정에 무게를 덜 두게 된 것은 경상도 사람들의 성공지향성 내지 지사(志士)다움과 관계가 있다. 불고(不顧)처자(妻子)는 지사(志士)들의 특징이 아니던가!

호남지방에 가면 옛날 그 터전이 예술이 꽃피던 자리이던 것을 상기시키기라도 하듯 예술과 문화의 맛이 철철 넘친다. 갖가지 박물관이 즐비하다. 그러나 경상도 특히 대구에 오면 눈을 닦고 보아야 박물관이 보인다. 호남사람들은 내면에서 무엇을 찾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아니, 찾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외향적인 타성에 안을 다독거릴 줄 모른다. 문화에 대해 본래 조예가 없던 사람들도 아닌데 이제는 잊어버린 듯, 진정한 정체성을 상실한 상태다. 출세지향성의 후유증에 시달리기를 언제까지 할 것인가? 이러다가는 헛된 자아의 망령과 허상만이 어슬렁거릴 전망이다.

만일 석재 서병오가 대구가 아니고 광주나 목포의 작가였더라면 오래 전에 그의 미술관이 생겨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대구사람들은 매우 비문화적으로, 이는 매우 시대착오적인 현상이다. 참으로 반성을 요한다. 나는 오래 동안 경북대학 안에 자연사박물관을 만들자고 주장했으나 실패였다. 자연이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고 자연 유물이 대단한 유물이라는 그런 가치관은 문명인이나 가질 수 있는 특권이라는 깨달음만이 남았다.

문명된 사회에 가면 곳곳에 도서관이나 박물관이 있어서 대중이 공부를 하도록 장려하고 있다. 현대는 문화적 수준이 높아야 사람 구실을 하고 남의 존경을 받는 그런 시대이다. 밖으로 출세지향을 하는 것으로 한 목 보던 시대는 지나갔다. 자기 발견을 위하고 안을 탐구해야 한다는 말이다. 밖으로 뻗어 보았자 허망하더라 하는 깨달음이 있어야 성숙해졌다 할 수 있다.

우리 고장 대구는 세계적 문화도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한 세계화다. 참 지도정신을 우리가 마련해야 한다. 밖이 아니라 이제는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이 지역 역사가 우리에게 가리키는 미래상이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재경동기회
글쓴이 : 학바우(손진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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