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에서 열린 행사 에 참여 차 내려갔다 가....
경당 고택..(안동 장씨 부인의 친가).늘 문서상 으로 접하다 직접 눈으로 장씨 부인 의 친가 를
대하니 무척 이나 상기되고 맘이 들떤, 어쩌면 맘속에 늘 품고 있었던 곳이라 더 한 감흥을 불러 일으킨지도...초행 이라 참 힘들게 이 곳 저 곳 을 찾았습니다..
시골길 은 번지 수 가 적확치 않아서 였거니와 웹 상 으로 고택 의 전화 번호 가
제대 로 기재 된 곳이 없어서 어려움 이 있었구요..
시간 이 넉넉치 않아 시댁 영양 서포 는 찾아볼 수 없음 이 많이 안타까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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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가는 길 과 경당 고택 에 관한 글은 안동 민속 박물관의 힘을 빌려서 올립니다..
경당고택 을 가기전에 서후 삼거리 에서 서쪽 방향 에 마주 바라다 보이는
광풍정, 제월대..원래 경당 고택 도 같이 있었던 곳을 먼저 찾았습니다..
광풍정(光風亭)과 제월대(濟月臺)
광풍정: 경당 장흥효 가 학문 을 연구 하고 제자 들을 가르치던 곳 으로
뒷편 의 제월대 는 광풍정 ㅇ에서 강학 이 끝나면 제자들과 함께 호연지기 를 길렀던
곳으로 까마득히 절벽에 위치...
<사진 앞쪽이 광풍정. 뒷편이 제월대>
어렵게 물어 물어 찾아 간 경당 고택 담벼락..
첫눈에 들어 온 꽃잔디 와 금낭화
경당 고택
마당 안뜰 의 탱자나무..꽃..
사당 왼편 중문
중문 담장의 운치...
불천위: <나라에 공을 세웠거나 학문과 덕이 높은 조상 에 대해 영원토록 위패 를
'옮기지 않고(不遠)' 제사 지내는> 경당 장흥효 의 사당
31대 종부 權順氏
마당을 한참 기웃거려도 아무도 없어 고택 을 찍고 나서
담장 밖을 내다 보니 종부께서 부추를 베어 다듬고 계셨다..
잘 다듬어 기른 국화의 모습도 보이고..
관광객 을 위한 편의 시설 로 경상북도 에서 지원금을 내주어 짓고 있다는 화장실..
장독..
부인이 따서 말리는 나물..
고택 후원..멀리 그네 가 보인다..
사진 오른족: 말라 버린 오죽..지난해 고르지 못한 일기 탓에..
자세히 살피니 자그마니 죽순이 움을 티우고 있었다..
안동 장씨 31대 종부 권순 씨...
그냥 갈려는데 마구 차한잔 을 권해..고택 후원 에서 잘 다린 차 한잔 을 들고..
경당 종택을 찾아가는 길은 안동에서 예천으로 뻗어있는 34번 국도를 이용한 다. 시가지를 막 벗어나면 놋다리밝기 전설을 가진 솔밤다리(송야교)를 만나 게
나 게 되고 이 다리를 건너서 우회전하면 천등산 봉정사로 향하는 길이다. 이 길은 안동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와 연결되는 짧은 길(8km)이지만 안동을 가장 안동답게 해주는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 길 입 구에서부터 권태사묘 입구, 김태사묘 입구 등의 표지석을 만나는 것을 시작 으로 안동 권씨 복야파 파조인 권수홍의 신도비와 묘단, 단계 하위지 선생이 제향되어 있는 창열서원, 경당 장흥효 선생의 유적지인 금계의 광풍정과 제 월대, 학봉 김성일 선생의 종택과 유물전시관인 운장각, 안동 삼태사의 묘소 , 안동 권씨 능동재사, 숭실재, 안동 김씨 태장재사, 송암 권호문 선생이 학 문을 강론하던 관물당 등 지정문화재와 백죽당 배상지, 용재 이종준, 경당 장흥효 선생을 배향한 경광서원, 경당 장흥효 선생이 강학하던 봉림정사, 안 동 장씨의 시조인 장정필 공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한 성곡재사, 구한말 영남 을 대표하던 학자인 서산 김흥락 선생의 강학 장소인 소계서당, 고려 예의판 서 권인 공의 묘소를 보호하고 제사를 받들기 위해 마련한 송파재사, 칠계재 장세규 공의 고택 등의 비지정문화재 등이 산재되어 있다.
경당 종택은 이와 같은 다양한 문화유산이 산재되어 있는 길을 따라 서후면 사무소가 위치한 삼거리까지 간다. 이 곳에서 곧바로 진행하면 봉정사로 가는 길이고 왼쪽으로 접어들면 명리로 가는 길이다. 삼거리에서 명리로 가는 길 로 접어들어 100m 정도 나아가면 다시 오른편으로 길이 갈라지는데 이 곳에 는 장태사신도비, 안동 장씨 성곡재사 입구라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이 곳에 차를 세우고 내리면 오른편으로 경당 종택이 보인다. 밭 가운데로 난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울타리가 집을 감싸고 있을 뿐 솟을대 문은 없다. 그저 울 사이가 조금 터져 있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가면 바 로 경당 종택의 사랑채를 마주하게 된다.
○ 당호의 유래 : 퇴계 이황 선생을 정점으로 하는 영남학파는 대체로 퇴계 4대 문인으로 꼽히는 학봉 김성일, 서애 유성룡, 월천 조목, 백담 구봉령 선생을 중심으로 각기 문파를 이루면서 사우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 중 학풍과 맥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히 이어지면서 최대의 학파로 성장한 것은 학봉 선생 계열이라 할 수 있다. 그 계보를 보면 학봉 김성일의 학통은 경당 장흥효로 이어지고 경당은 외손인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 형제로 이어진 다. 이 학통은 다시 갈암의 아들인 밀암 이재, 밀암의 외손인 대산 이상정, 소산 이광정으로 이어지고, 대산의 외증손인 정재 유치명, 학봉의 후손인 서 산 김흥락으로 이어진다. 이와 같이 영남학파의 학통을 잇는데 절대적인 역 할을 한 사람이 장흥효이다. 선생은 위로는 학봉 선생의 학통을 잇고 아래로 는 많은 제자와 문인을 길러내 영남 유학의 근간을 형성하는데 지대한 공헌 을 하였다.
경당의 학문은 학결같이 명예와 이익을 멀리하고 임천에 숨어 책을 읽고 궁 리하였으며, 책상머리에는 항상 커다란 敬자를 써 붙이고 그것으로 생활의 바탕을 삼았다.
선생은 언제나 첫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고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가 묘에 참배했다. 그리고 주자의 화상을 배례하고 난 후 서실에 단정히 앉아 종일토록 독서하고 사색 궁리하며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꼬박 뜬눈으로 밤을 밝혀 탐구했다.
선생이 거처하는 집 남쪽에는 아름다운 천석(泉石)이 있고 커다란 바위가 있 어 제월대(雲月臺)라 이름짓고, 배우는 젊은이와 더불어 이 곳을 거닐며 예를 익히며 사색에 잠겼다. 그는 좀처럼 성내(城內)에 가는 일이 없었고 이웃 마을조차 찾지 않으면서 자연을 벗삼아 오직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공의 가 르침은 제자의 자질과 능력에 따라 베풀었으며 평생토록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후학 양성과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다.
선생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책 읽는 것은 그것을 배게 하여 생활에 옮기게 함으로써 값이 있게 되고 소중함이 있는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아무런 보람 도 없는 것이다"라고 훈육하였다. 또 이르기를 "사람이 도리를 떠나면 고기 가 물을 떠난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했으며, 처음으로 학문연구에 뜻을 둔 선비에게는 "오늘 한가지 어려운 일을 행하며, 오늘 한가지 사물을 관찰하고, 내일 한가지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며 깨치게 되면서 꾸준히 하나하나 쌓아 가면 아는 것과 실천하는 일, 행하는 일이 쌓이게 되어 크게 이루게 될 것이 고 이것이 힘이 되어 반드시 환하게 꿰뚫어 통하게 될 것이다"라 했다.
또 이르기를 "공부는 남이 보지 않은 곳에서 조심함을 으뜸으로 하여야 한다 .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또 잘 안다고 해도 그것이 자신 이 고 익혀지지 않으면 거짓된 공부가 될 뿐이다"라 했다. 이와 같이 충후 (忠厚)와 성실(誠實)을 바탕으로 경(敬)의 학문을 중시하여 선생은 자신의 아호를 경당(敬堂)으로 불렀다.
○ 건축물의 구조와 배치
종택의 구성은 정침과 정침의 동북쪽 뒷편에 있는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의 남향집이다. 원래 종택의 위치는 제월대와 광 풍정이 있는 봄파리(春坡)에 있었으나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서 지금부터 24 년 전에 예전의 규모대로 중건한 것이다. 자연석을 다듬어 바른층쌓기로 죽 담(기단)을 쌓고 자연석으로 된 주초석을 그 위에 놓고 기등을 세웠다. 건물 의 형태는 팔작지붕에 홑처마이고 민도리집으로 정면 6칸 측면 7칸의 전형적 인 ㅁ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건물의 앞쪽은 안채로 들어갈 수 있는 중문이 달려 있는 문간채와 사랑채로 전체 6칸의 규모이다. 사랑채 공간은 문간채 보다 휠씬 높게 죽담을 쌓고 기둥을 세워 덩그러니 높은 품격을 자 아낸다. 사랑채 공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사랑방은 정면 2칸 측면이 1칸 반의 규모로 전체 3칸 통의 넓이를 갖고 있다. 사랑방의 앞에는 반 칸의 툇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다. 방 앞으로는 머름을 올려 창호를 냈다. 창호 는 띠살문의 창으로 쌍여닫이와 미닫이로 된 이중문이다. 사랑방의 오른편으 로 사랑마루를 놓고 작은 사랑방과 연결되는데 마루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사랑마루에는 중판이 있는 띠살문의 4분합문을 달아 필요시에는 개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랑마루의 우측면 벽에는 판벽과 판문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곳 판문을 통하여 외부의 손님이 사랑으로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사 랑채에 경당고택(敬堂古宅)의 편액이 걸려있는데 지촌(芝材) 김방걸(金都杰) 선생의 종손인 남정(南井) 김구직(金九程)의 글씨이다.
중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서면 사랑방에 불을 땔 수 있는 아궁이가 보이고 반 듯한 안마당을 만나게 된다. 정침은 왼쪽에서부터 1칸의 부엌, 2칸 통의 안 방, 2칸의 대청, 1칸의 상방으로 전체적으로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 다. 안방의 경우 측면은 1칸 반의 규모로 방위에 공주를 설치하여 전체적인 높이는 훌쩍 커져 있다. 안방 앞으로는 반 칸의 마루를 깔았다. 대청은 전체 4칸의 규모로 우물마루를 깔고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뒷벽에는 바라지창 을 달았다. 대청에서 안방과 상방으로 드나들 수 있는 문이 나 있고 안방으 로 들어가는 문위 동자주에 성주신이 모셔져 있다.
몸채의 좌 익사와 우 익사는 3칸의 규모를 갖추고 있는데, 좌 익사는 부엌과 고방 등의 취사와 저장공간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우 익사는 상방과 작은 사랑방으로 되어 있는 주거와 휴식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몸채의 우측면 인 우 익사는 독특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안채의 대청 옆에 상방이 배치되 어 있으며 상방의 앞에 툇마루가 설치되어 있고 우측면 벽에 판문이 달려 있다. 판문을 열면 사당으로 오를 수 있다. 이 문은 평소에는 사용하지 않으 나 경당 선생의 불천위 제사를 안채의 대청에서 지내게 되는데 이 때 신위를 모셔을 경우에 사용한다.
작은 사랑방 앞으로 난간이 있는 쪽마루를 내어 큰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이 곳에 문을 냄으로써 큰사랑에서 작은사랑과 안채로 자유롭게 동선이 연결되 도록 구성되어 있다.
안마당에는 장독대가 사랑방 뒤로 배치되어 있고 화단이 조성되어 있어 전체적 으로 아담한 분위기를 자아내나 바닥을 시멘트로 발라 자연스럽지는 못하다. 사당은 정침의 동북쪽 뒤에 자리잡고 있다. 다듬돌 바른층쌓기의 기단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맞배지붕에 풍판이 달려 있다. 어칸에는 쌍여닫이문과 좌 우 협칸에는 여닫이문이 달려있는데 문은 궁판 있는 세살문이다. 내부에는 교의 에 혼독을 올려놓고 신주를 모셨다. 교의 앞에 제상이 놓여 있고 제상 앞에 향상 이 배치되어 있다. 사당은 지금부터 50여 년 전에 춘파에서 이리로 옮겨온 후 절 집을 사서 지은 것이다.안동 민속 박물관
<출처;yahoo크늘채 (dongbee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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