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였던 불만 ‘말 실수’ 한마디에 터져
의료비·세금인상 등 국민공감 못얻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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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군중 속에서 고등학생 대니얼(17)군은 “거짓말로 당선된 총리는 물러나야 한다”고 외쳤다.
의사당 둘레에 시위대의 접근을 막는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젊은 페렌츠 주르차니(44) 총리의 인기를 떠올리면 급격한 반전이다. 구 공산당
학생 지도자에서 기업가로 변신, 헝가리 내 50대 부자에 든 그는 정계에 투신, 2004년 9월 총리에 취임했다. 올 4월 총선에서 주르차니의
사회당(MSZP)은 재집권에 성공, 선거 때마다 정권이 교체되던 헝가리에서 새로운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런 그가 불과 몇 달 만에 사임
압력에 직면했다.
이번 사태는 주르차니 총리의 ‘솔직한 입’에서 촉발됐다. 재집권 직후인 지난 5월 당내(黨內) 회의에서 “우리는 지난 4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았고 경제수치를 속여 잘산다고 밤낮으로 거짓말만 했다”고 연설한 것이 유출되면서, 위기 상황을 자초했다.
헝가리 국제경제관계부 장관 등을 거친 경제학자 벨라 캐대르(72) 박사는 “총리의 ‘더러운’ 말버릇이 나라 전체를 어렵게 만들었다”며
“이번 사태로 물러나지는 않겠지만 그는 더 이상 힘을 발휘하기 어려운 ‘도덕적 위기’에 직면한 것은 틀림없다”고 말했다.
코너에 몰린 그는 “잘 해보자는 말을 열정적으로 하다 보니 실수가 있었다”고 수차례 해명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스도 “이전 총리들이 모두
피해갔던 문제를 그가 처음 직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참지 못하고 들끓고 있다. 단지 말실수 때문일까.
부다페스트 대학의 안드리아 체괴(여·사회과학) 교수는 “사태의 본질은 헝가리의 경제 체질을 바꾸려는 ‘주르차니식 개혁’에 대한 서민들의
팽배한 불만”이라고 진단했다. 단순히 말실수 때문이 아니라, 그의 일방통행식 개혁에 대한 잠재된 반발이라는 것이다. 녹음테이프의 유출도 당내
반대세력이 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론은 보도했다.
총선 당시 그는 ‘복지 확대’를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집권하자,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시절은 끝났다”며 시장경제주의자의
‘정체’를 드러냈다. 정부 17개 부처를 12개로 줄이고, 공무원을 20% 줄였다. 이는 세간의 박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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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총선 때 그를 지지했다는 엔지니어 비터(43)씨는 “갑자기 서민 생활 형편이 어려워졌다. 그는 ‘개혁’이라는 말로 우리를 속였다”고
말했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개혁 방향은 옳지만, 왜 필요한지 국민 공감대를 얻지는 못했다”고 지적했다.
헝가리는 1980년 소련으로부터 독립했다. 현재 집권 사회당은 공산당의 후신(後身). 그럼에도 부다페스트 공항 운영권을 외국에 매각
중이며, 외국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윤희로 헝가리 무역관장은 “한국타이어가 현지공장을 세우려고 5억 유로 투자 결정을 내렸을 때
투자액의 12%를 인센티브로 주겠다고 제의했을 정도”라고 말했다.
반면, 공산주의 시절 경제자유화를 주장해온 ‘청년민주동맹(FIDESZ)’은 이제 “현 정권이 외국기업에 모든 것을 팔아먹고 있다”고
비판한다.
헝가리는 오는 10월 1일 지방선거를 치른다. 주르차니의 개혁은 다시 국민의 심판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