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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事 資料 綜合

<스크랩> 일본 잠수항공모함 l-400 프로젝트...

鶴山 徐 仁 2006. 9. 28. 10:21
일본 잠수항공모함 l-400 프로젝트...




일본은 이미 1930년대부터 잠수함에 항공기를 탑재하려는 시도를 해왔고 수 차례의 실험을 거쳐 마침내 순잠형인 I-5급에서 항공기 탑재가 실용화되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잠수함의 항공기 탑재에 집착했던 것은 일본이 구상해왔던 대미전략에서 잠수함들이 초기에 미국의 주력전함들을 탐지해내는 정찰용도로 쓰이도록 되었기 때문이었죠. 실제로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의 잠수함들은 미국이나 독일의 그것들처럼 통상파괴에 전념하기보다는 전과 확인, 정찰, 심지어 미본토 폭격(달랑 한번뿐이었고 그나마 효력도 의문스러웠지만) 등 수상함대의 보조적인 임무에 치우쳐서 운용되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비행기와 잠수함의 유기적인 조합을 중시한 일본해군이 여기서 한보 더 나아가 잠수항공모함의 구상을 꾀했던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1942년 4월 27일에 잠수항공모함-특형잠수함-의 설계가 정식으로 요구되었고 5월에는 벌써 기본설계안이 결정될 만큼 빠른 속도로 설계가 진행되었습니다. 게다가 미드웨이 해전 패배 직후의 함정 신조계획에서는 이 잠수항공모함을 18척 건조하기로 결정하였죠. 제원 상으로는 지금까지의 소형수상정찰기와는 달리 강력한 탑재무기와 비행능력을 가진 본격적인 공격기를 2기 탑재하고 16노트로 33,000해리(14노트로는 40,000해리 이상)라는 엄청난 항속력을 가진 초대형 잠수함이 될터였고, 때문에 적이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깊숙한 곳의 요충지를 기습공격 할 수 있으며 능력이 된다면 대서양으로 나가 뉴욕을 폭격한다는 것도 가능하다고 여겨졌습니다. 잠수함에 더해 그에 탑재할 공격기로는 당시 함상폭격기로 개발중이던 스이세이(慧星)가 고려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스이세이를 I-400에 탑재하는 것은 기체를 접어서 격납하는 것이나 해상에서의 행동 면에서 약점이 있었으므로, 새로이 전용의 특수공격기를 개발하도록 되었죠.
1) 특형잠수함 I-400
특형잠수함 I-400은 수상배수량 약 5,200톤, 수중배수량 6,500톤이라는 초거대 잠수함이었는데 그 크기는 1960년대 초의 전략원잠에도 필적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수상속력은 최대 20노트, 수중에서는 7노트, 항속능력은 16노트-33,000해리로 세계 어느 해역에서라도 작전이 가능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중에서 3노트-35시간의 행동능력이 있었고, 1944년 1월 독일로부터 받은 스노켈의 기술자료를 통해 일본해군 최초로 스노켈을 탑재한 잠수함이 되었습니다. 함체는 오늘날 러시아의 타이푼급처럼 보통 잠수함의 원형 내압선체 2개를 횡으로 배열해 연결한 안경 형태의 선각을 채용하였고 그 위에 거대한 원통형의 내압격납고와 사령탑이 있는 형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격납고부터 함수까지는 항공기 발함용의 캐터펄트가 장비되어 있었죠. 함 자체 무장으로는 함수에 어뢰발사관 8기를 장비하고 어뢰 20발을 상비하였으며 그외에 140mm포 2문, 25mm 3연장 대공기총 2기를 장비했습니다. 하지만 1번함인 I-400이 진수할 무렵, 항공기의 위협이 크게 증가한 것과 건함계획의 대폭적인 변경으로 특잠의 건조척수가 감소되었던 탓에 무장에는 대폭적인 수정이 가해졌죠. 즉, 척수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함재기를 3기로 늘리는 대신 함포를 1문으로 줄였고, 대공위협을 감안하여 기총을 3연장 3기와 단장 1기로 증강했던 것이죠. 항공기용 탑재무장은 격납고에 항공기 2기의 날개를 접어둔 곳 밑에 실려있었고 부상과 동시에 날개에 장착하여 발진시키는 것이었으며, 총 어뢰 4발, 800㎏ 폭탄 3발, 250㎏ 폭탄 12발이 탑재되었습니다.
2) 17식 특수공격기 세이란
한편 함재기 쪽도 극비리에 계획이 진행되어 1942년에는 설계가 완료되었고 아이치 항공기에서 세이란(M6A1)라는 이름으로 양산에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세이란은 스이세이 함상폭격기보다는 좀 크고 즈이운 수상정찰기보다는 약간 작은, 복좌플로트를 가진 수상기였습니다. 그러나 전투시에는 필요할 경우 플로트를 버릴 수도 있었으며 잠수함 탑재를 위해 보통의 함재기보다도 극단적으로 컴팩트하게 각 부분을 접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었죠. (완전히 접어놨을 때의 기체 폭이 2.3m에 불과했다고 함) 탑재무기는 어뢰 1발, 또는 800㎏폭탄 1발로써, 급강하 폭격도 가능했고 후방석에는 선회기총 1기가 장비되었습니다.
세이란의 특징은 잠수함에 탑재하기 위해서 가능한한 간단하게 접히고 사용 시에는 아주 짧은 시간내에 꺼내져서 조립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주익의 수납방식은 이제까지의 일본기와 달리 미국의 와일드캣 등과 유사한 방식으로써, 주익 연결부분에서 뒤와 윗면의 나사의 핀을 하나만 뽑으면 전연을 아래쪽으로 90도 회전시키고 날개 끝을 후방으로 90도 회전시켜서 동체에 딱 달라붙게 할 수 있었습니다. 수평꼬리날개도 동체 중심선에서 90cm 부분에서 아래쪽으로 접혔고 수직꼬리날개도 윗부분이 오른쪽으로 접혀졌습니다. 수직 꼬리날개의 접어지는 부분은 비행중에 플로트를 포기할 경우에 동시에 이 부분도 함께 떨어져나감으로써 비행기가 전체적으로 횡적 안정성을 적당히 유지하도록 되어 있었죠. 한편 플로트는 양쪽 모두 완전히 기체에서 분리해서 격납고 내에 놓아두는 구조였습니다. 출격시에 기체의 급속 조립작업에서는 무엇보다도 플로트를 장착하는데 가장 많은 인원을 필요로 했지만,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10명의 승조원이 장착해서 완성하는데 45초, 다시 떼어내는데 20초까지 단축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주익과 미익의 경우, 이전의 일본기와 달리 유압식으로 작동되었기 때문에 단지 4명만 있으면 주익을 펼치는데 57초, 미익을 펼치는데 1분 2초 정도로 작업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다만 다시 기체를 접는 것은 유압관계로 시간이 꽤 걸렸고 먼저 멈춤핀을 푸는데 25초, 주익을 완전히 접는데까지 5분 10초, 미익은 2분 20초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이런 접는 구조를 펼칠 때는 숙련된 승조원이 없더라도 암흑의 해상에서도 용이하게 빨리 작업할 수 있도록 나사랑 핀 등에 야광도료가 칠해져 있었습니다. 함이 부상한 후 무장 및 급유를 마치고 3기를 모두 출격시키는데는 약 45분 정도가 걸렸다고 합니다.

3. 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잠수항모 부대
그리하여 1번함 I-400은 1943년 1월 18일에 야마토가 건조됐던 구레 해군공창의 도크에서 항공모함 카츠라기의 후방에 킬을 설치하여 기공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사세보 공창에서 I-401과 402가, 가와사키 중공업의 센슈 공장에서 I-403이 기공되었고 마지막 I-404도 일단 구레에서 선대가 놓이는 것으로 기공되었죠.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건함척수가 대폭 축소되는 일이 벌어진 탓에 I-403과 404는 곧 공사가 중지되었고, 그후 진행된 것은 3척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으로는 최소한의 함대편성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건조중인 순항잠수함을 잠수 항공모함으로 개조하여 세이란 2기를 탑재하게 하였고, 결국 I-400급 3척, 개조된 I-13급 2척의 합계 5척이 일본해군이 실현시킨 잠수항공모함의 전부였습니다. 1944년에 이르자 일본에게 있어 전세는 이미 절망적이었고 물자도 극도로 부족했지만 관계자들은 악전고투를 거듭하여 1945년 3월 14일까지 I-400급 2척, I-13급 2척을 완성하여 이것으로 간신히 함대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 1척인 I-402는 완성 후에도 쭉 구레에서 정비공사에 들어가 있었음) 한편 항공대측은 이보다 이른 1944년 12월 15일에 세이란 10기로 편성되어 비행훈련을 실시하다가 1945년 3월부터는 잠수함대와 연합하여 당초 예정대로 파나마 운하 공습을 목표로 훈련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일본의 판단으로는, 단말마의 상태에 빠진 독일이 패망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고 그렇게 되면 대서양에 있는 연합군 해상병력은 태평양 방면에 대량으로 이동할 것이며, 일본 해군의 고충은 더욱 늘어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막거나 늦추기 위해서는 파나마 운하를 일시적이나마 기능을 잃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죠. 모두들 아시다시피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의 수위 차이 때문에 여러 개의 갑문으로 수위를 조절하여 통과하는 선박을 계단식으로 해서 보내게 되어있는데 이 갑문을 세이란의 폭탄 또는 어뢰로 공격하여 파괴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파나마 운하 공습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미국에게 있어서 7,000km라는 거리는 분명 장애가 되긴 하지만 극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장 영국해군만 해도 이탈리아가 장악하고 있던 지중해 내부를 피해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 이집트 등에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까요. 또한 파나마 공습작전이 계획되었던 1942년의 시점이었다면 파나마 운하의 파괴가 분명 대서양 상의 항모세력(와스프, 요크타운 등) 및 각종 수상함들의 태평양 전역 참가를 늦추는 계기가 되었겠지만 이미 1943년 말에 들어서면 미해군 세력의 대다수는 태평양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제와서 운하를 파괴한다한들 미해군의 증강을 막는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파나마 운하 공습계획은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었고 당시의 유행에 따라 출격하는 공격기들도 편도연료만을 탑재하고 자살공격을 감행하는 것을 상정하여 특공계획과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당시 잠항상태에서 부상하고 3기의 공격기를 격납고에서 끌어내어 조립을 마친 후 발진하기까지 10분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였지만 (사전에 급유를 완료했을 경우), 다시 수용할 경우에는 빨라도 30분 정도 걸리고 또 3기가 모두 동시에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항공기의 회수 시에는 모함이 극도로 취약한 상태에 빠진다고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또한 100% 작전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공격기 전부가 특공(편도 자살공격)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당연시되었으며, 탑승원들 역시 애초부터 그런 각오로 지원한 사람들뿐이었기 때문에 발진과 동시에 플로트를 바다 속에 버리고 2번 다시 모함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훈련이 당연하게 이뤄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일로 작전계획은 변경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선, 공격의 주역을 맡을 세이란에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겼던 것입니다. 1945년 초에 중부지방을 강타한 대지진으로 인해 아이치 항공기는 시설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며 그후 미군의 공습을 당해 완전히 생산라인이 파괴되어 사실상 세이란의 생산이 중단되었던 것이죠. 게다가 악화되는 공업여건 때문에 엔진의 상태도 나빠져서 연일 사고가 계속되었고 한때는 작전이 위태로울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또한 항공기의 운용도 난제로써, 800㎏폭탄을 실은 공격기를 불과 26미터의 캐터펄트부터 사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는데 비해 잠수함의 갑판은 너무 낮았다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캐터펄트로부터 사출되면 가벼운 정찰기조차도 사출후 가뿐히 떨어질 정도였는데 대형에다 중량이 있는 세이란은 해면에 거의 스칠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잠수항모 함대의 조종사들은 모두 정예중의 정예들이었지만 기체의 불량과 저런 열악한 이함환경 앞에서는 차례차례 바다 속으로 사라지거나 부상을 입어서 단기간에 항공기 운용을 정상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의 문제는 연료였습니다. 당시 구레 군항에 남아 있던 중유는 겨우 2,000톤 정도였는데 I-400 1척에만도 1,600톤 이상의 중유가 필요했으므로 아무리 해도 4척의 잠수함을 급유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1945년 6월이 되자 전황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태에 이르렀고 더 이상 출격을 미룰 수 없었던 잠수함대는 전국 각지에서 긁어모은 중유와 훈련 부족 상태의 승조원들을 끌어안고 출격준비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일본해군도 현실을 알아차렸는지 목표를 파나마 운하에서 미해군 기동부대의 정박지인 울리시 환초로 목표를 변경했습니다. 파나마 운하까지는 아무리 빨리 간다고 해도 1개월은 걸리는데 그 사이에 본토결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고, 이런 상황에서는 건곤일척의 모험적인 심리작전보다는 눈앞에 닥친 본토 근해를 휩쓸고 있는 미해군 기동부대의 기지인 울리시 환초를 기습하여 손해를 입히는 쪽이 중요하고 실리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작전은 먼저 I-13과 I-14의 양 잠수함에 세이란 대신 분해한 고속정찰기 사이운을 각 2기씩 탑재하고 트럭섬으로 수송하여 거기서 울리시 환초로 강행정찰을 하는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1945년 7월 2일 두 잠수함은 마이즈루를 출항하여 I-14는 예정대로 8월 4일에 트럭섬에 입항하여 사이운을 무사히 육상으로 내보냈지만 I-13은 7월 11일 이래 소식이 끊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전후 미군측의 기록에 의하면 7월 16일 호위항공모함 USS안치오 소속의 초계기와 구축함의 공격으로 격침했다고 함) 한편 본대인 I-400과 I-401은 세이란 6대를 싣고서 1945년 7월 20일 저녁에 울리시 환초를 목표로 출격했습니다. 공격일은 8월 17일로 예정되었고 양함 모두 8월 14일에는 전에 정해 놓았던 포나페 섬 남쪽 해상에 도달하여, 거기서 최후의 준비를 하면서 발진점으로 예정한 울리시 환초 남쪽 200해리 지점에서 8월 17일 아침 또는, 상태에 따라 황혼에 공격을 개시하기로 하였죠.
예정일인 8월 14일에 I-401은 랑데뷰 지점에 도착하여 하루 늦게 출발한 I-400을 기다렸지만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I-401은 일몰후 부상하여 하룻밤 내내 I-400의 도착을 계속 기다렸지만, 그무렵 I-400은 도중에 만난 미군의 공격을 피하고 있어서 예정에서 매우 늦어지게 되었고 무선통제하의 기습작전 중이라 연락을 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어쨌든 동쪽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언제 미군기가 나타날지 모르기 때문에 많은 미련을 남기고 다시 수면 아래로 몸을 숨기려고 할 때, 함대사령부로부터 공격 예정일을 8월 25일로 변경한다는 긴급지령이 수신되었습니다. 아마 I-13이 수송했던 정찰기의 정찰 보고를 듣고 25일까지는 울리시 환초에 미 함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겠죠. 여하튼 출격일이 연기되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있던 세이란 조종사들에게는 그 날이 뒤로 미루어질수록 더욱 초조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I-401의 함장은 하루를 정해 조종사와 승조원들이 푹 쉴 수 있게 하였는데, 바로 그 하루 사이에 사태가 급변해버리고 말았죠.

4. 미완의 작전
3일 후인 8월 16일, 해군총사령관으로부터 "즉시 전투행위를 중지하라" 는 일본의 무조건 항복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5일에는 하루종일 잠항하고 있어서 그날 일본이 포츠담 선언을 수락하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이죠. 공습 바로 직전에 먼바다에서 무조건항복을 알게 된 승조원 203명은 동요하기 시작했고 함내는 자침 또는 공격강행이라는 의견으로 나뉘어 격렬한 대립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소속돼있던 제 6함대 사령부로부터 재차 귀항명령이 내려왔으므로 함대 사령관은 세이란과 어뢰를 바닷속으로 집어넣고 일본으로 회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중 8월 28일에는 미해군의 잠수함에 포착되어 항복을 강요받게 되었으나 I-401측에서는 항복할 바에는 자침하겠다며 버텼으므로 소수의 승조원이 I-401에 탑승하여 감시를 맡고 그 후방에서 미 잠수함이 I-401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8월 29일 새벽에 I-401은 드디어 모항인 요코스카에 도착했고 일본해군의 마지막 희망은 이렇게해서 전쟁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전후 I-400과 401은 미군 승조원들에 의해 태평양을 거쳐 진주만으로 이동한 다음, 전반적인 정밀검사를 받은 후 오아후섬 인근 해역에서 서둘러서 잠수함의 어뢰 표적으로 처분되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소련이 I-400에의 접근과 조사권을 집요하게 주장했기 때문에 소련의 데이터 획득을 막기위해 했던 조치라고 하네요. 한편 도크에 남겨져있던 I-402 역시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다가 석유수송 잠수함으로 개조되어 동인도-일본간의 유류수송 임무에 투입될 계획도 있었으나 이 역시 1946년 3월에 일본 근해에서 처분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올해 3월에 오아후섬 부근에서 심해에 가라앉은 I-401의 잔해가 발견되었다고 하는군요...

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087&pn=1&num=46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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