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섭 논설위원
1950년대 미국 해운사 시랜드의 설립자 말콤 맥린이 궁리했다. "부두에서 트럭에 실린 짐을 통째로 배에 옮길 수 없을까." 그는 '밋밋한 직육면체 상자' 컨테이너를 창안했다. 1956년 유조선을 개조한 아이디얼X호가 컨테이너 58개를 싣고 휴스턴으로 첫 항해에 나서면서 해상 화물수송에 혁명이 시작됐다. 컨테이너는 세계 무역판도를 바꿨고 내륙수송용 철도산업을 키웠다. 세계 소비자들에게 싼값으로 온갖 상품을 사게 해줬다. ▶한국에 처음 입항한 컨테이너선도 시랜드 소속이었다. 1970년 3월 피츠버그호가 부산항에 들어와 첫 컨테이너 하역이 이뤄졌다. 컨테이너 한 개 무게가 30~40t이나 됐지만 기중기로 몇 분 만에 부두로 내리는 것을 본 부산항 하역노동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때 시랜드와 화물대리점 계약을 맺은 한진은 1972년 컨테이너선 인왕호를 부산~고베(神戶) 항로에 투입해 컨테이너 수출시대를 열었다. ▶컨테이너는 세계 항구들의 운명도 바꿔놓았다. 뉴욕항은 부두 노동자들 반발 때문에 컨테이너 운송에 뛰어들지 않았다가 몰락했다. 로테르담, 시애틀, 부산은 신흥 강자로 부상했다. 부산항에 컨테이너부두가 들어선 것이 1974년. 70년대 수출 드라이브로 해운수요가 크게 늘자 착공한 지 3년 만이었다. 이제 부산항은 감천항·북항·신항 세 곳에 7개 컨테이너 터미널을 갖췄다. 싱가포르, 상하이, 홍콩, 선전에 이어 세계 5대 컨테이너항이다. ▶부산항은 작년에 20피트짜리 컨테이너 기준(TEU) 1326만개를 처리했다. 한 줄로 세우면 8만㎞, 경부고속도로의 188배에 해당한다. 이 중 환적(換積) 화물이 580만TEU, 44%를 차지한다.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컨테이너를 하역한 뒤 다시 다른 배에 실어 미국 등으로 수출하는 화물들이다. 처리비용을 한 개에 12만원씩 받아 6960억원을 벌었다. 우리 수출입 물량이 아니라 순전히 항만경쟁력으로 거둔 알토란 같은 외화다. ▶그 부산항이 화물연대 파업 닷새 만에 마비됐다. 3단으로 쌓던 컨테이너를 4~5단으로 쌓아도 소용이 없다. 북항 컨테이너 야적장은 화물점유율(장치율)이 85.7%나 돼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평소 3만4288TEU이던 물동량도 30%로 줄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세계 12위 무역국가로 끌어올려 준 컨테이너들이 지금 부산항에 꽁꽁 묶여 우리 경제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6/17/2008061701773.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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