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avaggio,
Narcissus, 1598 - 1599, Oil on canvas
43
1/4 x 36 1/8 inches (110 x 92 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 >
카라바조는 수면에 비친 자신을 타자로 오인하고 그리움을
호소하는 나르키소스의 절망을 잘 전달한다. 화가는 수심에 가득 찬 나르키소스의 프로필을 부각했는데, 이는 화가가 자칫 수면에 비친 그의
얼굴로 향하는 우리의 시선을 막기 위해 수면을 과감하게 잘라냈기에 가능했다. 수면에 비친 나르키소스를 흐릿하게 처리했기 때문에 수면 위에
나르키소스의 얼굴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의 절망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여위고 마른 얼굴에서 탄식이 절로 나올
듯하다. 자신에게 영혼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저주에서 결코 헤어날 수 없는 슬픈 그의 모습에게 연민이
느껴진다.
나르키소스는 호수와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오른팔로 몸을 가까스로 지탱하고 있으나 곧 힘을 잃고 호수로 고꾸라질
것처럼 위태롭다. 수면에 비친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지만, 보다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확인하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 무모한 열정이 안타깝다. 거리를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두 팔.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대한 수면에 다가가기 위해 굽힌 허리와 무릎의 팽팽한 긴장이 삶과 죽음과의 거리를 함축하는 것
같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 그러나 그를 사랑할 수 없었던 나르키소스는 폭발하는 그리움으로 견딜 수 없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리움과 싸웠다. 마침내 그는 시름시름 앓았고, 그저 슬픔만을 먹다가 끝내 비극적으로 생을 하직했다. 지독한 자기애로
결국 자신을 파괴했던 것이다. 그리고 잘 아는 것처럼 훗날 학자들은 이러한 정신장애를
‘나르시시즘’이라고 칭했다. 아무도 나르키소스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르키소스는 샘가 옆, 수선화 한 송이로 변신하여 극복할 수 없는
그리움을 후세에 증거했다.
< 달리, 나르시스의
변모, 1937 >
살바도르 달리의 <나르키소스의 변모>는 자기애로 인한 파괴적 국면을 잘 보여 준다. 달리는 수면에 자신을
비춰 보는 나르키소스 곁에 달걀을 쥔 거대한 손을 배치했다. 언뜻 보면 달걀을 쥔 손은 옆의 나르키소스의 형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리하여
나르키소스는 넷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 멀리 조각대 위에서 자신의 몸에 매혹된 인물, 머리를 숙이고 수면을 응시하는 인물, 수면에 반사된
영상, 그리고 달걀을 쥔 손가락이 바로 그것이다. 달리는 실재하는 것, 혹은 그것을 반영하는 이미지가 실은 환상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잔잔한 바닷가, 황량한 바위, 암울한 구름을 배경으로 고개를 숙인 나르키소스의 환상은
우울한 자기 파괴를 암시하고 있는 듯 하다.
아울러 달걀 역시 쉽게 깨질 수 있는 허망한 환상을 상징하는 것이고,
달걀에게 수선화가 개화한 것은, 나르키소스의 자기애가 실은 자기 환상에 불과하며 곧 자기기만이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
지독한 나르키소스였던 달리 역시 자기애가 자기 파괴를 이끈다는 것을 간파한 것은
아닐까.
수선화로 환생한 나르키소스는 부드러운 흙의 알몸만을 껴안고 ‘다만 혼자였음을’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이제 ‘아무리 흔들고 싶어도 손을 흔들 수 없’고 오로지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홀로 쓸쓸하게, 허망한
자기애의 결말을 전하는 것이리라.
<Nicolas
Poussin, Echo and Narcissus, 1628 - 1630
Oil
on canvas, 29 1/8 x 39 1/4 inches (74 x 100 cm)
Musee
du Louvre, Paris, France>
자기애, 그 저주받은 이름, 나르키소스, 강의 신 케피소와 강의 요정 리리오페의 아들. 빼어난 미모와 용모로 보는
사람들이 가슴을 설레게 했던 인물. 자기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망연자실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그를 보는 순간, 수려한 외모에
얼을 빼앗겨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이름 ‘나르키소스’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망연자실’의 뜻과 유사하다고 한다. 그만큼 그의 미모는
바라보는 사람의 혼을 강탈하여 넋을 잃게 했다. 그러나 그 빼어난 미모 속에 자해의 칼날이 내장되었으니, 이를 어쩌랴.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비수는 아직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머니 리리오페는 아이의 장래가 궁금했다. 소문난 점쟁이 테이레시아스에게 자문을 구했다. 혹자는 테이레시아스가
나르키소스가 두 살 되던 해 그를 우연히 발견하고 장래를 예언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아무튼 공통된 예언은 나르키소스가 자신과 단절될 때만이 불행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자신과의 소외가 오히려 장수의 비결이라니.
아이러니다. 테이레시아스는 나르키소스의 미모 속에 도사린 파괴적 결말을, 그의 불운한 운명을 직감한
것이다.
부모는 그 예언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테이레시아스의 예언 능력은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므로 무시할 수 없었다. 부모는 모든
거울을 없애 그가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도록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강의 요정들에게 그가 물에 접근하면 수면을 흔들어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도록
명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예언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가 열여섯이 되었을 때 찾아왔다. 청년
나르키소스가 그 어떤 여성의 구애도 거절하고 사냥에 전력할 때였다. 출중한 외모의 청년으로 성정한 그를 본 수많은 요정들이 그의 미모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리고 앞 다투어 그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겨우 용기를 내어 수줍게 고백한
요정들의 애절한 프로포즈를 매몰차게 거절했다. 요정들은 그가 야속했다. 나르키소스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요정들은 점차 여위어 갔다. 특히 에코는 최대의 희생자였다.
<John William Waterhouse,Echo and Narcissus, c.1903, oil on
canvas,
Walker Art Gallery at Liverpool
>
에코. 그녀는 강의 아르다운 요정이었다. 수다쟁이로 불릴 만큼 명랑한 요정이었다. 그런 그녀가 그만 여신 헤라의 질시
탓에 반벙어리 신세로 전락했다. 사연은 이렇다. 어느 날, 헤라는 숲의 요정과 즐기고 있는 제우스의 소재를 추적하고 있었다. 헤라는 우연히
에코를 만났고, 그녀에게 제우스의 행방을 물었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에코는 헤라에게 이런저런
불필요한 수다를 늘어놓았고, 결과적으로 제우스가 도피할 시간을 제공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에코의 수다가 제우스의 애정행각을 도운 결과가 됐던
것이다.
헤라는 분노했고, 에코로부터 말을 빼앗고 다만 남의 말을 되받아서 그것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형벌을 내렸다. 그녀는 이
사건 이후 은둔했다. 명랑하던 성격도 사라지고 의기소침하여 홀로 지냈다. 가녀린 그녀는 숲 속 깊숙한 곳에 은둔한 채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그것이 자신을 비극의 주인공으로 만들 것인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바람과 새와 나무만이 에코와 동행하던 어느 날, 그녀 앞에 홀연 눈부신 미모의 나르키소스가 나타났다. 그는 언제나처럼
사냥에 열중했다. 여타의 요정처럼 에코 역시 나르키소스를 보자마나 그가 뿜어내는 매력 앞에 굴복했다. 그러나 나르키소스는 동물
이외의 대상은 관심도 없었으므로 그저 사냥에 전념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두 사람이
마주쳤다. 에코는 쿵쾅쿵쾅 요동치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켜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를 향한 사랑의 열정을 더 이상 억제하지 못하고 용기를 내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그녀는 스스로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르키소스가 호의를 나타내면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나르키소스가 호감을 갖고 여성에게 말을 건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행운의 수혜자가 될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그의 말을 반복할
뿐이었다. 나르키소스는 자신이 던진 질문을 그대로 따라서 반복하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는 무례한 행동이었다. 나르키소스는 그녀가 자신을
조롱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를 외면하고 등을 돌리고 떠났다.
다급해진 에코가 얼떨결에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에코의 손을 뿌리치며, 그녀를 향해 모욕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그리고
가슴을 찢는 칼바람처럼 떠났다. 그녀는 사랑과 애증이 혼효된 채 눈물로 밤낮을 보냈다. 자신의 가혹한 운명을 한탄하고 저주했다. 그러다가
시름시름 여위었고, 마침내 한 줌의 재로 생을 하직했다. 어느 날 한 줄기 바람이 재를 쓰윽,
하고 쓸어 대기 중으로 날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다만, 그녀는 훗날 메아리로 남은 채 우리에게 아직도 슬픈 사랑의 그리움을
전한다.
<william waterhouse, 나르키소스>
나르키소스의 무례한 행동을 보다 못한 한 요정은 네메시스에게 “그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됐으면, 그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게 됐으며”하고 빌었다. 네메시스는 그 요정의 찢어지는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네메시스는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나르키소스를 단죄하기로
결심했다.
나르키소스는 사냥 중에 우연히 람누스의 아주 맑은 샘을 발견했고, 물을 마시기 위해
그 투명한 샘에 얼굴을 가까이 했다. 그 손간 그는 거기서 빛나는 눈과 아름다운 입술,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수려한 미모의 청년을 발견했다.
나르키소스는 수면에 비친 청년을 보고 경악했다. 빛나는 아름다움 앞에서 그는 말을 잊었다. 거부할 수 없는 사랑을 직감했다. 자신인
줄도 모른 채, 수면에 비친 아름다운 인물에 그만 도취 당했다. 그 인물은 나르키소스가 다가가면
다가왔고 나르키소스가 수면으로부터 거리를 두면 그 역시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될수록 나르키소스는 전전긍긍 발을 굴렀다. 그러나
결코 그를 향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운명은 그를 위해 비극의 무대를 마련했고, 그를 주인공으로 드라마를 시작했다.
자신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예언했던 테이레시아스의 우려가 바야흐로 실현되기 직전이었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샘물에서 잠시 자리를 옮기자 샘물 속 청년 역시 사라졌다. 그가 다시 샘물 속 청년을 보기
위해 다가가자 미모의 청년 역시 나타났다. 나르키소스가 그를 만지기 위해 수면 가가이 다가서면 그러나 그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당황하여
그가 수면에서 화들짝 놀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 그 역시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리움을 참지 못한 나르키소스가 두 발로 수면 속의 그를 포옹하려 하면 그는 물을 튀기며 흐릿하게
사라졌다.
유치한 추정이겠지만 만약 나르키소스가 수면에 반사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지 않았다면 그는 무사했을까. 그러나 잔인한
신탁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수면을 피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신화는 자신이 누구인가라는 관념의 서사화
아닌가. 나르키소스가 필연적으로 물에 비친 자신과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 그
해답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보여 준다. 그리고 신화는 자기 투영의 예술적
의장으로 호수의 수면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수경, 즉 물은 거울처럼 대상을 반사시켜 존재론적 질문을 가능케 하는 상징적 비유였던
것이다.
<Francesco
Curradi, 샘가의 나르키소스>
윤동주의 시를 보면 이를 잘 확인하게 된다. 이 시는 나르키소스가 물에 자신을 비춘 것처럼 물 속에 비친 자신을 보며
‘나는 누구인가’를 고민하는 작품이다.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내성적인 자기 연민에 가까운 이 시는 대개 자기 연민은 곧 자기애로 발전하고 극단적인 경우 자기를 파괴하는
나르시시즘으로 전개될 수 있다. 인간은 나르키소스 신화를 통해 오래 전부터 극단적인 자기애에 함몰될 때 필연적으로 자기 파괴로부터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경고해 왔던 것이다. 혹은 자기 처벌에 관한 내용을 담은 서사실 수도
있다.
한편 호수가 거울이라면 호수 속으로 침몰해 간 나르키소스는 라캉에
의하면 상상계로 회귀를 꿈꾸고 유아 상태로 퇴행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을 스스로 자초했다는 점에서 급기야 무기질로 전화하여
생을 마감하는 타나토스적 충동을 강하게 표출한다고 볼 수 있다. 자기애를 이처럼 영적 자유를 획득하여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려는 타나토스의
충동과 필연적으로 만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르키소스 신화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적 충동을
모두 내포한 인간의 심리 상태를 잘 모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조용훈의 <에로스와 타나토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