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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

鶴山 徐 仁 2006. 9. 15. 14:15
밀레 (Jean Francois Millet 1814∼1875)
프랑스 화가. 그뤼시 출생. 가난했으나 신앙심이 깊고 애정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1837년 파리로 가 P. 들라로슈의 제자가 되었다. 1840년 살롱전에 출품한 초상화가 입선되었으나, 장학금 지급의 중단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로코코풍의 나체화 등을 그려야 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F. 부셰·J.H. 프라고나르풍(風)의 규방화(閨房畵)와 목가적인 주제를 많이 다루었다. 또한 부드러운 필촉과 명암의 대비가 특징이었다. 이러한 화풍은 주제가 농민화로 바뀐 뒤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1849년 콜레라의 만연을 피해 가족과 함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부터는 거의 모든 그림의 제재가 농민의 일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밀레는 풍경적 요소를 인간에 종속시켜, 노동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인간의 존엄성을 그린 바르비종파(派)의 대표적 화가가 되었다. 만년에는 단순화한 형체의 구성을 시도했으며, 진지한 종교적 심상이 표현되어 있는 그의 작품은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 대표작에 《씨뿌리는 사람(1850)》 《이삭줍기(1857)》 《만종(1859)》 등이 있다.

 
1. 씨 뿌리는 사람
밀레는 1849년 파리 근교 퐁테느블로 숲속에 자리한 바르비존이란 작은 마을로 찾아든다. 이 마을엔 밀레말고도 자연을 동경해서 찾아든 화가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가리켜 미술사에서는 바르비존파(派)라고 부르고 있다. 바르비존을 무대로 한 자연파 화가들의 명칭이었다. 밀레의 농민 화가로서의 활동도 이 마을로 들어오면서 본격화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대표적인 농민화 들이 여기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건초를 묶는 사람들>과 같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한 것으로, 씨를 뿌리는 남자의 역동감 넘치는 포즈는 약간 비뚜름한 지평선의 불안한 배경과 어울려 극적인 상황을 예시해 주고 있다. 대지와 인간의 관계가 흥미롭게 드?ぐ?있다.


2. 파르당 부인의 초상
1837년 고향 세르브르의 장학금을 받아 파리로 나온 밀레는 들라로시의 아틀리에에서 지도를 받는 한편, 루브르를 자주 방문하면서 주로 미켈란제로와 푸생 등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전 작품을 연구했다. 그가 처음으로 살롱에 입선한 것이 40년이니까 파리에 나온 지 3년 후가되는 셈이다.
이 시기 밀레의 작품은 주로 초상화와 신화(神話)를 테마로 한 그림들이었으며, 검은 색을 주조로 하면서 백색의 효과를 살리는, 전통적인 수법을 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향 세르브르에 돌아와 주문받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검은 색을 기조로 하면서 뉘앙스가 풍부한 수법을사용, 인물의 내면의 섬세한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태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


3. 아가씨
1845년경 밀레는 목가적인 연인들을 테마로 한 몇 점의 작품을 그렸다. 이 작품도 그러한 목가적(牧歌的) 분위기를 띠고 있는 그림이다.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은 현실보다는 신화에 가깝다.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입과 반쯤 뜬눈의 꿈꾸는 듯한 표정이 더욱 그런 분위기를 나타낸다. 초기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단정하고도 엄격한 수법을 엿 볼 수 없고, 터치가 즉흥적이면서 다소 거칠게 나타나 있다. 일련의 누드화에서도 그렇지만, 밀레의 눈은 호색적(好色的)이지 않다. 그가 나중에 로코코 화가들을 특히 호색적인 면에서 비판하고 있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4. 외제니 카노비유 부인이 초상
첫 번째 부인 포리느가 죽었을 때 이들 부부가 아사(餓死) 직전에 있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에는 짙은 술픔의 그림자가 화면을 덮고 있다. 이 초상화의 여인도 슬픈 눈을 하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검은 옷에 화려한 레이스는 어딘가 모르게 정숙한 품격을 자아내게 하는데, 앞으로 포개어진 두 손과 얼굴을 연결하는 목걸이 선이 눈길을 끈다. 어두운 배경에 인물의 얼굴만은 부각시키는 고전적인 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엄격한 데생에 의한 인물의 포착은 초상화가로서의 그의 단단한 기법을 말해 주고 있다.


5. 海軍士官의 초상
역시 밀레 초기의 작품을 대표하는 초상화중의 하나, 첫째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한 밀레가 1845년 잠깐 동안 르아브르란 프랑스 북쪽에 위치한 항구에 머문 적이 있는데, 이 초상은 당시에 그렸던 주문화 가운데 하나다. 이 때는 밀레의 명성도 점차 상승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이 부호나 미술 애호가, 해군 사관, 선장들에게서 많은 주문이 쇄도해 왔다. 파르당 부인의 초상과 같이, 검은 제복을 입고 양팔을 낀 사관의 표정은 밀레의 더욱 자신 있는 수법의 원숙을 통해 생동감을 더해 주고 있다.인물과 배경의 부드러운 조화라든지, 검은 옷 빛깔과 황금빛의 장식과의 격조있는 대비 등은 인물의 성격과 함께 화면의 짜임새를 더욱 돋우어 주고 있는 듯 보인다.


6. 루크르트와 부인의 초상
주지하다시피 밀레는 노르망디의 한 한촌(寒村)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만년(晩年)에 명성을 얻을 때 까지 누구보다도 많은 고생을 하였다. 특히 청년 시절은 빈한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부인인 포리느오노가 죽 은 것도 병약(病弱)한 때문이었다. 그래서 인지 초기의 초상화들에서 알 수 없는 우수가 화면을 덮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이 초상은 아내 포리느의 언니, 아니면 동생을 그린 것인데, 초기 밀레의 초상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촉촉한 눈을 보이고 있다. 단정한 자세와 화면에 들어 차는 구도의 밀도는 초기 밀레의 초상화가로서의 뛰어난 일면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7. 채석장
농민화와는 다소 다른 소재의 그림이지만,노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모티브의 애착은 밀레의 작품 밑바닥을 관류하고 있다. 후기의 농민화에서 보는 정태적(靜態的) 묘사와는 달리, 여기서는 동적(動的)이면서 드라마틱한 상황을 연출해 보이고 있다. 돌 틈바구니에 꽂은 지렛대에 매달려 있는 두 인물의, 옆으로 비스듬히 누운 동작은 화면에 사선(斜線)으로 달리는 시각적 이동으로 인해 단연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이 시기 밀레는 특히 미켈란젤로가 묘사한 인물의 데생에 관심을 기울 였는데,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통해 나타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일 것이다. 밀레의 작품 가운데서는 보기 드문 활기와 박진감을 주고 있다.


8. 귀가중인 양떼
초기에서 점차 농민화로 전향해 가던 중간쯤에 해당되는 작품이다. 그런만큼 이 작품엔 누드화를 주로 다루었던 시기의 제반요소와 농민화로서의 소재적 관심이 함께하고 있다. 아이를 업고 있는, 상의를 벗은 여인의 모습은 누드화의 연장 선상에서, 그리고 오른편으로 반쯤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양떼는 농민화로서의 연결을 시상해 주고 있다. 아이를 업은 여인과 어깨에 농구(農具)를 진 남정네와 양떼를 몰고 있는 앞 쪽의 아이가 가운데 공간으로 집중되면서, 한 가족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의 밀도를 엿보여 주고 있다. 오른쪽으로 치우친 양떼들이 화면 가운데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비로소 농민화가 밀레의 세계가 확립되어진다.


9. 水浴


10. 양치기와 양떼
제작년대 미상 캔버스 유채 45X55Cm
파리 루브르미술관 소장


11. 어린 양치기
밀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가에서 자랐을 뿐 아니라,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할 무렵 농가에 들어가 생애를 농민 화가로서 보냈다. 이 깊숙한 농민 생활의 체험은 그의 그림을 더욱 생생하게 만들고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는 객관적인 입장이 아니라 언제나 모티브 깊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몸으로부터 우러나온 자연스러움이 그림 속에 배여 있다. 어린양치기의 모습과 양떼의 조화는 순진한 이미지의 동일성에서 밀레의 화인(畵因)을 자극한 것이 분명하다. 풀을 뜯고 있는 양들의 모습과 지팡이에 기댄 어린 양치기의 땅과의 밀착된 관계가 돋보인다.


12. 키질하는 사람
1848년 이후, 밀레는 지금까지의 초상화와 신화적 테마의 범주를 벗어나 농부나 일하는 사람들의 생활상을 직접 묘사하는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이른바 농민화가(農民畵家)로서의 밀레의 출범을 알리는 전환이었다. 이 작품은 바로 그런 시기에 제작된, 농민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그 해 살롱에 출품한 최초의 농민화 이기도 하다. 그의 태반의 농민화가 그렇듯이 이 작품의 소재도 너무나 단순하고 일상적이다. 고티에는 이 소재의 단순함을 칭찬해 마지 않기도 했는데, 바로 이런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 속에 농민과 농촌 생활의 진실이 드러났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두운 곳간에서 키를 까불고 있는 남자의 프로필이 일하는 이의 감동을 잘 포착하고 있다.


13. 나무켜기
1850-52년 캔버스 유채 57.2X81.3Cm
런던 빅토리아 엔드 알버트 미술관 소장


14. 나뭇가지
벌채한 나무를 두 사람이 운반하고 있는 이 그림은 인물에 비해 주변의 자연이 크게 설정되어 있는 특성을 엿볼 수 있다. 말하자면 자연 속의 극히 일부로서 인물의 모습이 떠오르게 배치하였다. 나무를 끌어내리고 있는 두 시골 여인네의 마주 본 자세와 기다란 나무로 연결된 구성적 배려가 기묘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밀레의 태반의 농민화 들이 그렇듯이 여기서도 움직이는 인물들을 통해 노동의 실감을 전해 주고 있다. 더욱이 텁텁하고 난폭한 터치와 명암의 대비를 통한 무대적인 화면의 구성은 농민들의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출해 주고 있음을 말한다.


15. 나뭇군
키질하는 사람>과 비슷한 구도의, 나무를 패는 모습을 붙잡은 작품이다. 산 속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화면 가운데 나뭇군이 배치된다. 나뭇군의 앞과 뒤쪽 주변에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산 속에서 만난 평범한 나뭇군의 생활의 한 단면을 붙잡은 것으로, 쿠르베를 연상시키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는 리얼리스트의 태도가 역력하다. 나뭇군과 그 배경과의 관계, 원경의 숲과 앞 쪽의 정경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명암의 강한 대비가 이 단순한 정경을 드라마틱하게 만든다. 수평과 수직의 구성적 배려가 미묘하게 느껴지는 밀레의 독특한 시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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