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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치우=동이족’, 역사적 근거 있다

鶴山 徐 仁 2006. 8. 19. 20:49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붉은 악마’의 공식 캐릭터였던 치우(蚩尤)와 관련, 중국 역사학자도 그를 동이(東夷)족으로 주장했다고 역사학자 이덕일씨가 최근 발간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을 통해 밝혔다.
치우는 중국의 ‘삼황오제’에서 오제(황제-전욱-제곡-요-순) 중 1대 임금인 황제(黃帝)와 동아시아의 패권을 둘러싸고 싸운 인물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그를 동이족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이 「환단고기」 등 주류 사학계에서 위서로 간주하는 사료에 주로 기반, 폭넓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중국 학자가 역사학적 방법론에 따라 치우의 민족적 정체성을 동이족으로 설명한 내용을 이덕일씨가 소개한 것이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에 따르면 중국의 역사학자인 서욱생 교수는 1940년대에 출간한 「중국고대사적 전통시대」에서 “치우는 묘만족이 아니라 동이족의 영수”라고 주장했다. 이는 치우가 묘만족의 지도자였다는 종래 중국 학자들의 견해를 뒤엎은 것이다.
이덕일씨에 따르면 상고 시대 동북아시아엔 산동성 일대의 동이(東夷)족, 섬서성 황토고원의 화하(華夏)족, 중국 남부의 묘만(苗蠻)족이 할거했는데, 중국 학자들은 치우를 남방 묘만족의 지도자로 간주해왔다는 것이다. 화하족은 현대의 한족(漢族)으로 이어진다.

서욱생 교수 주장의 근거는 우선 산동성에 있었던 제(齊)나라에서 치우가 팔신(八神) 중의 하나로 존숭되었다는 점이다. 산동성은 동이족의 거주지였다.
또한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치우를 죽인 뒤 시신을 쪼개어 매장하는데, 그 무덤이라는 치우총과 견비총(치우의 어깨와 넓적다리)이 각각 산동성의 동평현과 거야현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덕일씨는 “남방의 묘만족이 북쪽의 산동성까지 올 리가 없으니까 산동성에 치우의 무덤이 있다면 그는 묘만족이 아니라 동이족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서교수가 치우를 동이족으로 보는 또 다른 근거는 치우가 ‘구려(九黎)족의 대표’라는 서경(書經), 사기(史記) 등의 기록이다. 구려족의 거주지는 산동, 하남, 하북성 등으로 동이족의 거주지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치우가 남방 묘만족의 우두머리로 알려져온 이유는 무엇일까. 이덕일씨는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3」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서욱생 교수는 고거에 화하족과 남방 묘만족 사이의 투쟁은 잘 알려졌지만 동이족이 화하족과 격렬하게 다툰 것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1920년대 이래 출토된 금석(金石)이나 갑골문을 연구한 결과 동이족과 화하족이 크게 싸운 사실이 드러났다며 이런 정황으로 볼 때 치우를 동이족의 우두머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동이족과 화하족의 큰 싸움’은 치우가 황제(黃帝) 공손헌원과 맞섰다는 ‘탁록 대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측 사서들은 공손헌원이 치우를 붙잡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치우가 공손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아 동이족의 강역을 굳게 지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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