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인이 이런 말을 들었다면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은 뻔한 일이다. 경찰관이나 하는 불심검문이
되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이런 질문을 한 최초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다.
폭군 네로의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던 베드로가
그리스도의 환영을 보고 “쿠오바디스 도미네”
물었고, 새삼 사명을 깨치고 로마로 되돌아간다.
한국인은 이처럼 심각한 저의로 묻는 것도 아니요,
어딜 가는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도 아니며 또
대꾸를 기대하지도, 대꾸할 의무도 없는,
그저 더불어 있고 싶은데 왜 어디로 떠나느냐는
정(情)의 표출에 불과하다.
외국인에게는 분노를 유발할 이 말이 정을 나누는
인사말로 정착한 것은 조상들이 살아온 사회의
정착성(定着性)이 별나게 강해 정이라는 접착제로
억세게 엉켜 있어 떠난다는 것에 원천적인
거부감을 갖기 때문이다.
미국 카트리나의 천재에서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생겼는데 그 난민 수용소에서 한국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보도는 충격적이다.
흑인은 물론 일본·중국·태국·베트남 등 동양계
난민들은 득실거리는데 재해지역에 적지 않은
3000명이나 살고 있다는 한국인을 수용소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것에 세상의 눈들이 초점을
맞춘 것이다. 대부분의 한국 난민은 인근지역
한국인의 집이나 한국인 교회에 흡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더러는 아는 사람도 있었겠지만
서로 모르면서 집에 들일 수 있는 이 정신자원이
바로 ‘잘살건 못살건 함께 살지 가기는 어디
가십니까’라는, 이역만리에서의 한국정의 표출인
것이다.흔히들 서양사람은 모르는 사람끼리
사무적으로 일을 잘 처리하며 공존하는 외집단(外集團)
의식이 강하고, 한국사람은 아는 사람끼리
정으로 맺어져 고통을 분담하는 내집단(內集團)
의식이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마저
이 내집단 의식을 탈피해야 할 전근대적 액물로
여기는 풍조가 거세져 가고 있는 작금 카트리나에서
그 아름다운 반동을 보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증발한 한국인을 두고 한국에 대한
인식의 파장이 세상사람들 마음속에
여울져 나갈 것이다.
조선일보 이규태 코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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