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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선조수정실록> 해제

鶴山 徐 仁 2006. 7. 17. 13:16

1.《선조수정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수정실록》은 인조~효종 때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보완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宣祖昭敬大王修正實錄)이며, 모두 42권 8책이다. 《선조실록》은 광해군(光海君) 때 북인인 기자헌, 이이첨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하였으므로 당파(黨派) 관련 서술에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다. 서인으로 지목된 이이(李珥), 성혼(成渾), 박순(朴淳), 정철(鄭澈) 및 남인 유성룡(柳成龍) 등에 대하여는 없는 사실을 꾸며서 비방하고, 이산해(李山海), 이이첨 등 북인에 대해서는 시비선악(是非善惡)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북인 정권(北人政權)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곧바로 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은 《선조실록》의 잘못된 사실과 누락된 부분을 수정·보완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이다. 인조(仁祖) 즉위 초에 경연관(經筵官) 이수광(李光)·임숙영(任叔英) 등이 실록 수정(實錄修正)을 건의하였고, 좌의정 윤방(尹昉)도 수정을 역설하였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인조 19년(1641) 2월에야 대제학(大提學) 이식 (李植)의 상소로 실록 수정을 결정하고, 이식에게 이를 전담시켰다.
이식은 인조 21년(1643) 7월에 예문관 검열(檢閱) 심세정(沈世鼎)과 함께 적상산 사고(赤裳山史庫)에 가서 《선조실록》 중 수정할 부분을 초출(抄出)하였다. 그리고 수정 실록청(修正實錄廳)을 설치하고 가장사초(家藏史草)와 비문(碑文), 행장(行狀), 야사(野史), 잡기(雜記) 등 자료를 수집하여 수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조 24년(1646) 정월에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록 수정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 후 효종(孝宗) 8년(1657) 3월에 이르러 우의정 심지원(沈之源)의 요청으로 경덕궁(慶德宮)의 승정원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영돈녕부사 (領敦寧府事) 김육(金堉)과 윤순지(尹順之), 이일상(李一相), 채유후(蔡裕後) 등으로 하여금 사업을 계속하게 하여 그해 9월에 완성하였다. 《선조수정실록》은 1년을 1권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총 42권 8책이 되었다. 선조 즉위년부터 동 29년까지의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선조 30년부터 동 41년까지의 12권은 채유후 등이 편찬하였다. 당쟁(黨爭)이 일어나기 이전의 실록 편찬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었으나, 당론(黨論)이 치열하게 일어난 이후의 실록은 편찬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당파에는 유리하게, 반대당에는 불리하게 기록되는 등 기사 내용의 공정성과 시비곡직(是非曲直)에 문제가 적지 않았다. 따라서 반대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이를 수정하여 다른 실록을 편찬하려는 시도가 있게 되었다. 《선조수정실록》이 바로 그 효시를 이루었고, 후에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과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이 편찬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다.

2.《선조수정실록》의 내용

《선조수정실록》은 전체 내용이 원본의 1/5에 지나지 않지만,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필요한 기사를 많이 보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 범례에 의하면 《선조실록》의 결점과 수정 보완한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다. 1) 《선조실록》은 명예를 훼손하고 진실을 잃은 사실이 근거도 없이 잡다할 뿐 아니라, 대개의 인명·지명·관직명 등 대체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도 착오가 많으며, 명신(名臣)들의 주소(奏疏)가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들을 보완한다. 2) 야사에서 채록하여 날짜별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은 월별로 기록하고, 해당 달도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해의 끝에 써 넣는다. 3) 먼저 강령(綱領)에 실린 사실을 기록한 다음 잡기(雜記)와 비(碑)·지(誌)·행장 순의 차례로 기록하고, 국사(國事)에 관한 것이나 다른 사람의 득실을 기록한 것을 모두 자세히 채록한다. 4) 야사나 지장(誌狀) 류는 한결같이 공론(公論)에 입각하여 간략히 사실을 기록한다. 5) 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 줄인다. 이미 확인된 사실이거나 여러 사람들이 인정한 논의는 모두 그 내력에 근거하여 기록한다. 6) 《선조실록》에서 자세하고 정확히 기록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 싣지 않고, 단지 그 대략만 남겨두어 사건의 개요를 알게 한다. 7) 《선조실록》은 간당들이 편찬을 총괄하여 관장하면서 사실을 줄이고 덧붙이기를 자기 마음대로 하였다. 그들이 포창한 인물은 자기 자신 및 자기와 친밀한 몇 사람에 불과하였고, 그들이 비방한 사람들은 모두 선조대에 신임 받던 명신들이었다. 간흉들 스스로 포창하고 꾸민 부분은 역사를 기록하는 예에 의하여 얼마간의 공의(公議)를 붙여 둔다. 8) 명신의 장소(章疏) 중 시비와 관계가 깊거나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들은 모두 싣기도 하고 일부분을 뽑아서 싣기도 한다. 9) 《선조실록》 중에서 사실을 속이고 잘못 편찬한 실상과 이제 수보(修補)하는 뜻을 차례로 언급하고 얼마간의 사론(史論)을 지어 그 말미에 붙인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날짜별로 비교 검토하면 몇 가지 수정의 취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범례에 따라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된 내용은 아래와 같다. 수정본은 원본을 보완한 기사가 많지만, 대부분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보완이 이루어졌다. 그것은 주로 선조대에 당론과 관련되었던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들이다. 윤원형(尹元衡)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김효원(金孝元)의 행적에 대한 심의겸(沈義謙)의 비판과 척신이므로 심의겸의 동생 심준겸을 이조 낭관에 임명할 수 없다는 김효원의 비판 등에 대하여 수정본에서는 그 전모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허엽과 허엽을 비판하는 정철과 신응시 등에 대해 가졌던 이이(李珥)와 김우옹(金宇)의 우려와 조정 노력 및 전후 배경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이 모반하였다는 기축옥사에 대하여는 원본과 수정본 모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위관이었던 정철이 조작 또는 확대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수정본에서 정철이 최영경을 구원하고자 한 일을 들어 원본의 기록이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다. 인진왜란에 대하여는 의병활동에 대한 기사 보완이 많다. 곽재우·고경명·정인홍·손인갑·김천일, 조헌·영규·유종개의 활동, 이광·윤국형의 백의종군, 김덕령과 이산겸이 무고로 하옥되었던 일 등 의병활동을 많이 보완하였다. 또한 명군(明軍)의 소극적 전술, 중국 사신의 이간질 등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도 많이 보완되어 있다.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본에서 많이 보완되었다. 이순신의 승전, 이순신과 원균의 틈이 생긴 이유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이 원균의 편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이순신 하옥되었다거나, 원균이 이순신의 수군제도를 변경하여 패배했다는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수정본은 원본의 사론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사론을 붙인 것이 많다. 특히 인물에 대한 비판 사론에서 그러한 것이 많다. 원본과 수정본에서 평가의 일치를 본 인물은 홍여순(洪汝諄: 小北)과 이충(李) 두 사람인데, 둘 다 비판적인 내용이다. 원본에서는 높이 평가했는데, 수정본에서 비판한 인물은 이이첨(李爾瞻)·기자헌(奇自獻)·박홍구(朴弘)·정인홍(鄭仁弘)· 이희득(李希得)·심종도(沈宗道) 등으로 이들은 모두 대북 인사들이다. 원본에서 비난하였으나 수정본에서 칭찬한 인물들은 한준겸(韓浚謙) 같은 유교(遺敎) 7신, 이덕형(李德馨)· 이현영(李顯英) 같이 당색을 떠나 중망을 받던 인물은 물론,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인 성혼(成渾)·이항복(李恒福)·윤두수(尹斗壽)·신흠(申欽)· 이정구(李廷龜) 및 신진인 김상헌(金尙憲)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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