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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선조실록> 해제

鶴山 徐 仁 2006. 7. 17. 13:14
 

1.《선조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실록(宣祖實錄)》은 선조(宣祖) 재위 기간(1567 명종 22년 7월∼1608 선조 41년 1월) 41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이며, 모두 221권 116책으로 활판 간행 간행되었다. 선조의 묘호(廟號)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선조실록》의 판심에는 《선종대왕실록(宣宗大王實錄)》이라고 인각되어 있다. 광해군 8년(1616) 8월에 묘호를 선조(宣祖)로 개정하면서 실록의 표제도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하게 되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 7월 1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8년(1616) 11월에 완성하였다. 처음에는 서인(西人) 이항복(李恒福)이 총재관(摠裁官)이 되어 편찬을 하였으나, 뒤에는 북인(北人)인 기자헌(奇自獻)이 담당하였다. 《선조실록》은 그 대부분이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壬辰倭亂) 이후 16년간의 기사(記事)로 되어 있으며, 전체 221권 중 195권에 달한다. 반면 선조 즉위년(1567)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5년간의 기사는 모두 26권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시정기>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등의 공공 기록과 사초(史草)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료의 보완을 위한 논의가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또한 《선조실록》이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많았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후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어 효종 8년에 완성되었다. 《선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한 실록청(實錄廳) 관원들은 아래와 같다. 총재관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기자헌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이항복 도청 당상(都廳堂上)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이호민(李好閔), 유근(柳根), 이이첨(李爾瞻), 이정귀(李廷龜), 박홍구(朴弘), 조정(趙挺), 민몽룡(閔夢龍), 정창연(鄭昌衍), 이상의(李尙毅), 윤방(尹昉), 윤승길(尹承吉), 김신원(金信元), 박승종(朴承宗), 이시언(李時彦), 김상용(金尙容), 오억령(吳億齡), 송순(宋諄) (계 17명) 각방 당상(各房堂上)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 박건(朴健), 최유원(崔有源), 정광적(鄭光績), 신식(申湜), 이수광, 박이장(朴而章), 박진원(朴震元), 정사호(鄭賜湖), 구의강(具義剛), 이성(李惺), 김시헌(金時獻), 김상준(金尙寯), 김권(金權), 최관(崔瓘), 이경함(李慶涵), 남근(南瑾), 이시발(李時發), 한덕원(韓德遠), 이필영(李必榮), 유공량(柳公亮), 이정신(李廷臣), 강홍립(姜弘立), 강첨(姜籤), 유인길(柳寅吉) (계 24명) 편수관(編修官): 윤효선(尹孝先), 정호선(丁好善), 정영국(鄭榮國), 양극선(梁克選), 김용(金涌), 정조(鄭造), 정홍익(鄭弘翼), 신경락(申景洛), 이유연(李幼淵), 이흘(李), 이충(李), 심언명(沈彦明), 윤수겸(尹守謙), 이광길(李光吉), 윤선(尹銑), 황기(黃沂), 민덕남(閔德南), 최동식(崔東式), 배대유(裵大維), 이욱(李稶), 정유번(鄭維藩), 이정험(李廷), 이심(李), 정입(鄭), 박정길(朴鼎吉), 한찬남(韓纘男), 김광엽(金光燁), 소광진(蘇光震), 송영구(宋英), 박안현(朴顔賢), 남궁경(南宮), 이준(李埈), 유석증(兪昔曾), 이수록(李綏祿), 박홍도(朴弘道), 유색(柳穡), 이현영(李顯英), 임연(任), 성진선(成晉善), 이정원(李挺元), 임장(任章), 이경운(李卿雲), 윤인(尹), 정도(鄭道), 조즙(趙), 유숙(柳潚), 이사경(李士慶), 이충양(李忠養) (계 48명) 기주관(記注官): 김류, 윤양(尹讓), 유활(柳活), 목대흠(睦大欽), 민유경(閔有慶), 유여각(柳汝恪), 홍방, 김중청(金中淸), 신의립(辛義立), 윤중삼(尹重三), 변응원(邊應垣), 이중계(李重繼), 나인(羅), 신율(申慄), 윤경(尹絅), 남이준(南以俊), 박수서(朴守緖), 황경중(黃敬中), 박대하(朴大夏), 곽천호(郭天豪), 전식(全湜), 오익(吳翊), 고용후(高用厚), 이형원(李馨遠), 금업, 권흔(權昕), 이식립(李植立), 임석령(任碩齡), 이정(李), 이경직(李景稷), 허실(許實), 이함일(李涵一), 이분(李芬), 박증현(朴曾賢), 윤안국(尹安國), 박동망(朴東望), 임건(林健), 박재(朴), 임업, 이성록(李成祿), 김질간(金質幹), 조명욱(曺明), 이빈(李), 서경우(徐景雨), 이잠, 임성지(任性之), 정준(鄭遵), 최응허(崔應虛), 한옥(韓玉), 김수현(金壽賢), 정호관(丁好寬), 이후(李厚) (계 52명) 기사관(記事官): 송일(宋馹), 유여항(柳汝恒), 조유도(趙有道), 조존도(趙存道), 김극성(金克成), 손척(孫倜), 황익중(黃益中), 강홍중(姜弘重), 윤지양(尹知養), 정홍원(鄭弘遠), 홍요검(洪堯儉), 정호서(丁好恕), 김대덕(金大德), 금개(琴愷), 이덕일(李德一), 목취선(睦取善), 안경(安璥), 조익(趙翼), 박자응(朴自凝), 홍위(洪瑋), 김감(金鑑), 이성구(李聖求), 채승선(蔡承先), 송극인(宋克), 박로, 박사제(朴思齊), 이수(李邃), 이창후(李昌後), 정대해(鄭大海), 김성발(金聲發), 조정립(曺挺立), 안숙(安璹), 한인급(韓仁及), 윤민일(尹民逸), 신득연(申得淵), 이경여(李敬輿), 이숙, 채겸길(蔡謙吉), 오환(吳煥), 박여량(朴汝樑), 이경탁(李慶倬), 안응형(安應亨), 성시헌(成時憲), 한명욱, 강인(姜鱗), 이창정(李昌廷), 조찬한(趙纘韓), 이경안(李景顔), 이홍망(李弘望), 조국빈(趙國賓), 정세미(鄭世美), 박래장(朴來章), 정운호(鄭雲湖), 윤지경(尹知敬), 홍명원(洪命元), 한영(韓詠), 황덕부(黃德符), 유약, 오여벌, 김치원(金致遠), 오여은, 이윤우(李潤雨), 한화, 이강, 정광경(鄭廣敬), 홍경찬(洪敬纘), 권척(權倜), 권진기(權盡己), 윤성임(尹聖任), 남성신(南省身), 남명우(南溟羽), 이지화(李之華), 이위경(李偉卿), 이경익(李慶益), 한정국(韓定國), 한급, 조유선(趙裕善), 오익환(吳益煥), 조정생(趙挺生), 서국정(徐國禎), 김준하(金奏夏) (계 81명)

2.《선조실록》의 내용

선조(宣祖: 1552∼1608)의 이름은 연(), 초명은 균(鈞)으로,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과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의 셋째 아들이다. 처음에는 하성군(河城君)에 봉해졌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1563년에 죽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1567년 7월 3일 임종 때 유명(遺命)을 내려 하성군을 후계자로 즉위케 하였다. 선조의 치세에는,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정치(士林政治)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전대의 훈척정치(勳戚政治)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눠지고,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붕당정치(朋黨政治)가 발생하였다. 선조의 즉위 초에는 구체제를 혁신하려는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간의 갈등으로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은 점차 몰락하고,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1575년 (선조 8) 심의겸(沈義謙)과 김효원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정여립(鄭汝立) 모반 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己丑獄事) 처리 문제로 1589년(선조 22) 동인은 다시 남·북인으로 분열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남인이 유성룡(柳成龍)을 위시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으나, 전후 수습 과정에서 남인이 실각하고 북인이 대신 정국을 주도하였다. 북인 세력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또 다시 대북(大北)·소북(小北) 등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선조는 즉위초에 학문에 정진하였고,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등을 존숭하여 증직과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치도(治道)에 관계되는 유교 서적과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등을 인쇄하여 간행하였다.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에게 증직하고, 사림들을 신원하는 한편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은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하였다. 또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킨 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하였다. 명나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李仁任)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200년간이나 숙제로 내려오던 것을 윤근수 (尹根壽)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종계(宗系)를 변무하였다. 선조 16년(1583)과 20년(1587)에는 야인 이탕개(尼湯介)의 침입으로 경원부(慶源府)가 함락되자, 온성부사 (穩城府使) 신립(申砬) 등을 시켜 그들을 물리치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하였다. 선조 23년(1590)에는 왜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黃允吉)과 부사 김성일(金誠一)이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 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는 한편,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分朝)를 설치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도록 하였다. 곧 전국에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관군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의 수군이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으로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명의 원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으로 선조 26년(1593) 10월에 서울로 환도하여 질서를 정비하고 전국을 수습하였다. 임진왜란 중에는 군공을 세우거나 자나 납속(納贖)을 한 자들에게 공명첩(空名帖)이나 실직(實職)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 조선후기 신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왜란 중에 궁궐이 불에 타고 귀중 도서가 소실되자 각처에 흩어진 서적들을 수집 보관하였다.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때의 논공행상을 시행하여 호성(扈聖), 선무(宣武), 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였다. 전쟁을 마무리를 지은 후에는 전후 복구 사업(戰後復舊事業)에 힘을 기울였다. 선조는 재위 41년 되던 해(1608) 2월 1일 별궁인 경운궁(慶運宮)에서 승하하였다. 향년 57세. 묘호(廟號)는 처음에 선종(宣宗)으로 정하였으나 광해군 8년(1616) 8월에 선조로 개정하였다. 시호(諡號)는 소경(昭敬), 존호는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正倫立極盛德洪烈至誠大義格天熙運顯文毅武聖睿達孝), 능호(陵號)는 목릉(穆陵)이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東九陵) 경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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