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에 뛰어든 유일한 여기자
"드레스보다 군복이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먼지와 진흙을 얼굴에 덮어쓴 여자" 내가 히긴스에게 처음 관심을 가진 것은 1965년, 조선일보 입사와 동시에 "대사건과
대기자"라는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이 책은 언론인들의 노벨상이라 할 수 있는 퓰리처상(Pulitzer Prize)을
받은 기자들과 그들의 대표적 기사들을 모은 것인데, 나는 이 책에서 히긴스의 간단한 약력과 그녀의 대표적 기사인 인천 상륙작전 종군기를 번역해
실었었다.
마게리트 히긴스는 한국전쟁 발발 직전인 1950년 6월21일 The New York Herald Tribune 신문의 토오쿄오 특파원으로 부임했다. 당시 그녀는 30세였으나 LIFE 잡지의 유명한 사진기자 칼 마이던스가 찍은 사진을 보면, 히긴스는 여대생 정도의 귀여운 금발 아가씨로 보였다. 미군 전투복에 전투모를 눌러쓴 그녀는 과연 "이브닝 드레스보다 전투복이 더 어울리는 여자"라는 말을 들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만일 그녀가 1966년 45세를 일기로 요절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그녀를 직접 찾아가서 인터뷰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그녀의 기사를 번역해 실은 "大사건과 大기자" 책이 나왔을 때는 그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6월27일 히긴스는 일본 주재 미국 언론사 특파원 3명(뉴우욕 타임즈의 버튼 크레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즈 비이취, 타임의 프랭크 기브니 등 모두 남성)과 함께 미군 수송기를 얻어 타고 김포비행장으로 날아왔다. 이 비행기는 서울에 사는 미국 민간인들을 일본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온 특별기였다. 남자 기자들은 히긴스에게 한국전선은 위험하니 일본에 남아 있으라고 권고했으나 그녀는 듣지 않았다.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는 여성 기자 한 명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태평양 전쟁 종군기자로 명성을 떨친 호머 비가트를 한국전선에 추가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비가트 기자가 히긴스를 몹시 싫어했다. 같은 신문사의
기자, 그것도 새파랗게 젊은 여기자와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비가트로서는 못마땅했던 것이다. 그는 히긴스가 일본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본사에다 그녀의 파면을 권고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위협했으나, 히긴스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나중에 출판한 "War in Korea"(한국
전쟁)이라는 책에서 "나는 여자도 훌륭한 종군기자가 될 수 있음을 전세계에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준장이 본국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군사고문단장 대리 역을 맡고 있었던 라이트 대령 자신도 일본서 휴가중 전쟁 발발 소식을 듣고 서울로 급히 날아온 직후였다. 히긴스 등 미국 기자들은 마침 그들 앞을 지나가는 채병덕 소장(한국 육군 참모총장)을 만났다. 뚱뚱한 체구의 채소장은 "사태가 우리한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고 장담하면서 급히 자기 사무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날 밤 기자들은 美군사고문단 본부 건물 안에서 잠을 청했다. 세명의 남자들은 따로 한 방에서 자고 히긴스만 사무실 구석에 놓인 군용 침대 위에 옷을 입은 채로 누웠다. 이때만 해도 그녀는 푸른색 스커트와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막 잠이 들려는데 미군 장교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와 "일어나시오! 후퇴 명령이오!"하고 소리쳤다. 히긴스는 군사고문단장 대리 라이트 대령 일행과 함께 한강인도교 쪽으로 지프를 몰았다. 다른 3명의 남자 기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름비는 추적추적 계속 내리고 있었다. 한강 인도교로 향하는 피난민과 군인들로 도로는 꽉 찼다. 표지 카버는 낡아서
너덜너덜했다.>
폭파 당시 인도교에서 약간 떨어져 있던 히긴스 일행은 무사했으나 한강을 건널 수는 없었다. 북한 침략군은 서울로 향해 진격해 들어오는데 퇴로가 차단당한 수많은 한국군과 미 군사고문단원들, 그리고 피난민들은 어떻게든 한강을 건너려고 백사장으로 몰려갔다. 날이 밝자 한강에 나룻배들이 보였다. 그들은 그 나룻배들을 타고 강을 건넜다. 히긴스는 라이트 대령 일행을 따라 수원 쪽으로 걸어갔다. 비가 와서 진창이 된 논길과 산길을 몇 시간 걸어 수원농대(미군사고문단 임시본부로 쓰고 있었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행방을 몰라 궁금해 했던 다른 세 기자들을 만났다. 두명은 피묻은 붕대를 머리에 감고 있었다. 물론 한강 인도교 폭파 때 구사일생한 크레인 기자와 기브니 기자였다.
히긴스는 한강 인도교 폭파에 관한 기사를 썼으나 뉴우욕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수원에서는 국제전화가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뉴우욕 타임스의 크레인, 시카고 데일리 뉴스의 키즈 비이취 등 두명의 남자 특파원들과 함께 기사 송고를 위해 미군기를 얻어타고 토오쿄오로 날아갔다. 일본에 도착해서야 그들은 자신들이 운이 좋았음을 알았다. 28일 아침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프랑스의 AFP통신 특파원과 프랑스 대사관, 영국 대사관 직원들이 붙잡힌 사실을 전해들었던 것이다.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로 첫 기사를 보낸 히긴스는 다음 날(29일) 다시 한국으로 날아왔다.
같은 날 태평양지역 미군 총사령관인 5성 장군 Douglas MacArthur 원수도 그의 전용기를 타고 토오쿄오로부터 수원으로 날아왔다. 맥아더 장군은 수원에서 지프를 타고 흑석동 고갯마루까지 가서 한강과 서울을 내려다보며 반격 구상을 했다. 수원으로 되돌아간 장군은 임시수도 대전에서 날아온 이승만 한국 대통령과 만나 회담했다. 李대통령은 수원으로 비행기를 타고 오는 도중 북한 야크기의 추격을 받고 하마터면 비행기가 추락할 뻔했다. 29일 오후 늦게 맥아더 장군이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수원비행장으로 나왔을 때 히긴스는
비행장 활주로 끝에서 타자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맥아더 전선 시찰 기사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장군은 그녀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고 "토오쿄오에 갈 테면 내 비행기를 타도 좋다"고 호의를 베풀었다. 그렇잖아도 송고를 위해 일본으로 가야 했던 그녀는 너무나
기뻤다. <한국전선에서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 장군과 인터뷰하는 당찬 여기자 히긴스>
토오쿄오 도착 즉시 히긴스는 단독회견 기사를 뉴우욕 본사로 송고, 특종보도를 했다. 같은 신문사 동료 특파원 호머 비가트가 그녀를 더욱 시기하게 된 것은 물론이다. 비가트의 끈질긴 채근에도 불구하고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본사는 히긴스의 한국전쟁 종군을 막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 기자를 경쟁시킴으로써 더 좋은 기사를 얻어 보도하려고 했다. 6월30일 히긴스는 다시 수원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는 탄약 수송기에 편승했다.
수원비행장에 내리자 무뚝뚝하게 생긴 미군 대령 하나가 "아가씨, 일본으로 돌아가시오. 여기는 위험하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히긴스는 "I
wouldn't be here if there were no trouble. Trouble is news, and the gathering of
news is my job!"(위험한 사태가 없으면 나는 여기 오지도 않을 것이오. 위험한 사태는 곧 뉴스며, 뉴스 수집은 나의
임무입니다!)라고 대꾸했다.
워커 장군이 히긴스를 한때나마 추방했던 진짜 이유는 그녀가 7월5일의 오산 죽미령 전투(미군 선발대 400여 명이 북한군과 가진 최초의 접전)에 직접 참가, 미군의 참담한 패배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했기 때문이다. 워커 장군은 히긴스의 지나치게 상세한 취재 보도가 일종의 이적행위이며, 미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행위라면서 특히 그녀를 싫어했다. 그는 또 히긴스가 여성이므로 혹시 전투 중 포로가 되거나 죽으면, 그녀를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미군이 뒤집어쓸까봐 염려했었다. 어쨌든 히긴스의 종군 취재는 계속되었다.
그녀는 죽미령 전투 때부터 여성복장을 벗어 던지고 미군 사병과 똑같은 복장을 했다(신발만은 군화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그녀는 어깨까지 덮었던 긴 금발머리를 짧게 깎아 전투모 속으로 밀어넣었기 때문에 뒤에서 보면 그녀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녀는 화장도 거의 하지 않고 립스틱만 입술에 살짝 발랐다. 립스틱을 잃어버릴 때는 그나마 바르지 못했다. 전선의 먼지와 연기, 그리고 장마철 한국의 진흙이 튄 그녀의 얼굴은 그래도 매력적이었다. 한 미군 일선 지휘관은 "히긴스는 화장품보다 먼지와 진흙이 더 어울리는 매력적인 여자"라고 말했다.
히긴스는 최전방 미군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그녀의 미모도 미모지만 남자 뺨치는 그녀의 담력에 GI(미군)들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시 서른 살이던 그녀는 스무 살 전후의 사병들에겐 누나 같은 존재였다. 사병들은 전선에서 아름다운 들꽃을 보면 그것을 꺾어 그녀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히긴스는 9월15일 유명한 인천 상륙작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해병들과 함께 상륙정을 타고 인천 해안에 상륙했다. 이 때의 체험을 그대로 써서 보도한 것이 이듬해(1951년) 그녀가 국제보도 부문 퓰리처상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녀는 "해병 30명과 기자 2명이 탄 우리의 상륙정이 방파제에 부딪쳤다. 적의 소총 탄환은 계속해서 날아와 우리 주위에 물을 튕겼다. 우리는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 배를 방패 삼아 한동안 엎드려 있다가 방파제에 뚫린 큰 구멍으로 들어갔다"라고 썼다. 이 와중에서 한 해병이 실수로 그녀를 군화발로 짓밟고 넘어가는 일이 있었는데, 그녀는 "그 해병이 내가 여자임을 알아보고 당혹해 하던 모습이란…"이라고 썼다.
히긴스는 함경남도 장진호 지역으로부터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는 미 해병들도 종군 취재하는 등 항상 최전방 전선을 누볐다. 그리고 그녀가 써보낸 생생한 기사들은 당시 뉴우욕 타임즈의 경쟁지였던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덕분에 그녀는 1951년 퓰리처상을 받았고, 같은 해 앞서 인용한 "War in Korea"란 책도 출판했다.
한국전쟁이 끝난 1953년 히긴스는 미국으로 돌아가 10년 더 뉴우욕 헤랄드
트리뷴 기자로 활약했다. 그녀는 공군 장성과 결혼도 했다. 그녀는 1963년 뉴우욕의 일간 신문 Newsday로 자리를 옮기고 베트남 전쟁이
시작될 무렵인 1965년 초 인도차이나 반도 취재를 떠난다. 월남에서 그녀는 고딘디엠 월남 대통령 암살 배후에 미국 CIA가 있었다고 폭로하는
기사를 써서 미국 정부의 미움을 사기도 했다. 그녀는 1965년말 라오스에서 취재 중 급성 풍토병(기생충에 의해 발병)에 걸려 귀국,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1966년 1월, 45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유해는 워싱턴의 알링턴 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필자는 최근 그녀의 묘를
직접 찾아가 보았는데, 묘라고 해야 그녀의 이름과 출생년월일 그리고 사망년월일이 새겨져있는 작은 비석 하나가 서있을 뿐이었다. 명이 길었다면
85세의 할머니가 되어있었을텐데, 만나보지 못해 아쉽다. 워싱턴에서 조 화 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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