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미 양국의 첫 만남은 그다지 우호적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적대적이었다. 1866년 무역관계를 맺고자 하는 미국의 제안을 조선이
거절하면서 생긴 분쟁은 다수의 사상자들과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에서 침몰하고 23명의 선원들이 사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러나
양국 관계는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여 경제, 사회, 문화, 군사 분야에 이르기까지 긴밀하고 우호적인 동맹관계를 맺게 된다.
일본이
제 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함에 따라, 미군은 한반도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위도 38도선 이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한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태평양 전쟁에 뒤늦게 뛰어든 소비에트 연방은 이미 미국에 앞서 38선 이북 지역의 일본군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한반도에
병력을 파견한 상태였다. 연합국은 1943년 카이로에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결정하였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38선의 경계는 봉쇄되고 남북한 간의
교류가 중단되었다.
유엔의 감시하에 치러진 총선을 통해 남한 지역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반면, 소련은 한국민들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김일성을 북한의 지도자로 임명하였다. 1948년 소련 정부는 자국 병력을 북한 지역에서 철수시킴으로써 미군의 철수를 강요하였다. 1949년
미군은 남한의 신생 방위군 훈련을 위해 KMAG라는 자문단 만을 남겨둔 채 전 병력을 철수시킨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남한 지역을 통일하기 위해 전면전을 감행하였다. 당시 미군은 유엔이 지정한 남한 지역 방위 책임을 맡고 있긴 했으나 그 전까지 어느 미국인도
한국 지역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3년 간의 한국전쟁에서 미군은 한반도 전역에 걸쳐 고군분투하였다. 500만 명이 넘는
미국인들이 한국 전쟁에 참가하였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이루어질 때까지 33,000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4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사망하였다.
전투의 중단과 함께 언제든 깨질 수 있는 평화의 조건을 결정한 이 휴전협정은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남북한의 휴전협정은 근대 전쟁사상 최장기에 걸친 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미군은 한국군과 함께 북한의 또 다른 도발행위를 저지하기 위해
분단의 최전선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이처럼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미국의 한반도 안보 임무는 합법적이고 윤리적이다. 유엔
안보이사회의 1950년 결의안에 따라 미국은 유엔 사령부 지휘 등 합법적 임무를 부여 받았으며, 1954년 한미 상호 방위조약을 통해 양국은
외국의 침략 시 상호 협력할 것을 약정하였다. 또한, 미국은 1978년 한-미 양국 정부에 의해 설립된 통합 군사 본부인 한미 연합군 사령부의
파트너로서 대한민국 방위 계획과 유사시 양국 군대를 통제할 책임을 지고 있다.
주한미군은 미 전투병력을 연합군 사령부 육·해·공
및 해병대 각 전투 부대로 배치하게 될 합동 군사 본부로서 미 8군, 주한 미 공군 (제 7공군) 및 주한 미 해군 등이 주요 부대이다.
'軍事 資料 綜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엔군 사령부 연혁 (0) | 2006.06.23 |
---|---|
한미연합사 연혁 (0) | 2006.06.23 |
代를 이어 한국지키는 美공군 (0) | 2006.06.23 |
국기 제정 기념일: 미국의 자유를 상징하는 성조기에 찬사를 보내는 글 (0) | 2006.06.23 |
지상군핵심 2사단 빼낸다 (0) | 2006.06.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