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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충효당의 사랑채(서예 유성룡 선생의 종가집). 사랑 마루를 가운데 두고 큰사랑과 작은사랑이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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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바깥 주인이 생활하고 잠자는 곳입니다. 한옥에서 사랑은 집안의 남자 어른이 책을 읽고 학문을 하면서,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곳입니다. 곧 남자 어른의 침실ㆍ서재ㆍ응접실 구실을 했지요.
‘사랑방’이란 사랑으로 쓰는 방을 말하고, ‘사랑채’란 사랑으로 사용하는 집채(건물)를 이르지요. ‘채’는 집이 한 채, 두 채라고 말할 때처럼 독립된 건물을 말합니다.
대문 가까이에 자리해 손님 맞아
조선 시대와 같은 유교 사회에서는 내외 예법(남자와 여자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볼 수 없도록 따로 생활하게 하는 법)에 따라 남자와 여자가 생활하는 공간은 일부러 멀리 떨어져 있게 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각방을 썼고, 남자 아이는 일곱 살이 되면 어머니 품을 떠나 할아버지 또는 아버지 밑에서 글공부를 배우게 한 것입니다.
남자들이 사용하는 사랑은 대문 가까이 만들어, 집에 찾아온 손님을 바로 맞이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외간 남자가 안방이나 안채를 들여다볼 수 없었지요. 또 사랑채는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높다랗게 자리 잡고 있어서 안채를 가리는 구실도 했어요.
사랑 대청 문 위엔 편액 걸어
한옥의 사랑방에도 양반 집과 서민 집에는 서로 차이가 있었습니다. 양반 집의 경우에는 사랑채를 대문 가까운 곳에 지었습니다. 이 사랑채에는 아버지가 사용하는 큰사랑, 아들이 사용하는 작은사랑을 따로 두었습니다.
그러나 서민들은 집이 좁은 탓에 사랑채가 따로 없이 안방에서 떨어졌으면서 대문이 가까운 바깥쪽 방이나 건넌방을 사랑방으로 삼았습니다.
양반 집의 사랑채는 가문을 들어내기 위해 높은 기단 위에 지어 잘 꾸몄으며, 널빤지에 사랑채의 이름을 적은 편액을 사랑 대청 문 위에 걸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ㆍ‘충효당’, 경주 양동마을의 ‘서백당’은 사랑채에 걸린 편액 이름입니다. 이를 당호ㆍ택호라고 해서 그 집의 이름으로 부른답니다. 이런 사랑채는 사랑 대청과 사랑방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사랑방에서 이웃이나 친척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집안 어른이 손자에게 공부를 가르쳤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와 겸상으로 식사하며, 집안 내력을 들려 주고 몸가짐ㆍ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타이르기도 했습니다.
학문과 사색ㆍ독서 등 문화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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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시 부북면 퇴로리에 있는 천연정의 사랑채. 대칭문 위에 '자유헌'이란 편액이 걸려있다. /사진 제공=황헌만(사진 작가) |
사랑채는 멀리 앞산을 바라볼 수 있도록 앞이 툭 트인 곳에 자리잡았습니다. 또는 사랑 대청 앞에 가꿔 놓은 정원을 내다볼 수 있게 했습니다. 여기서 선비가 앞산이나 정원을 내다보며 사색하고, 독서도 하며, 글씨도 쓰고 그림도 그렸습니다. 따라서 화려하지 않고 품위가 있게 꾸몄습니다. 선비들의 고고함과 기품이 단연 돋보이는 곳이 사랑채지요.
지금처럼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없던 시절, 사랑채는 찾아오는 손님들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소식을 전해 주는 곳이었습니다. 어떨 때는 선비들이 모여서 학문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시를 짓거나 거문고 등의 악기를 연주하며 문화 생활을 즐기기도 했습니다.
사랑방에는 간소하며 기품 있는 문방 가구와 작은 책상ㆍ책장ㆍ붓과 종이를 넣는 서랍, 그리고 방석이 놓였습니다. 벽은 백지로, 천장은 담담한 빛깔이 도는 종이로 도배를 하고, 방바닥은 들기름을 먹인 장판을 깔았지요.
또 사랑방에는 산수화ㆍ사군자를 그려 벽에 걸거나, 유명한 옛날 글귀나 시를 써서 걸어 두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랑방은 바깥 주인의 취향에 따라 치장하였기 때문에 그 집만의 독특한 분위기가 배어 있습니다.
농촌에 많이 있는 서민들의 사랑방은 동네 남자들이 모여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또 겨울철에는 새끼를 꼬고 연장도 다듬으며 이듬해 농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장만하는 작업 공간 구실도 했습니다.
현대 주택이나 아파트에 사랑채 같은 공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관에서 가까운 방을 아들이나 삼촌이 사용하도록 하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우리들이 주택의 공간을 사용하는 방법은 쉽게 변하지 않음을 보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