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생도 3연속 수석졸업 ‘女風’
◆해군 인재의 ‘산실(産室)’
해사의 역사는 구한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3년 3월 22일 고종 황제가 강화도 갑곶진 근처에 세운 통제영학당(統制營學堂)이 전신이다.
영국 민간인 영어 교사 허치슨, 영국 해군 예비역 대위 윌리엄 콜웰과 예비역 부사관인 제임스 커티스 등이 군사학·항해학·포술학을 가르쳤으나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52년 후인 1946년 초, 3·1 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손정도 목사의 장남이자 해군 창설의 주역인 고(故) 손원일
제독이 부친의 독립 정신을 이어받아 해군병학교를 창설했다.
해사는 창설 이후 한국 영해(領海) 방어의 주역들을 배출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당시 4~7기 생도 전원이 창원지구 등 해상 전투에
참가했다. 이후 월남전을 비롯, 연평해전과 서해교전 등 국가 안보의 최전선에서 조국을 위해 몸을 바쳤다.
한국전쟁 중 서해안 봉쇄 및 인천상륙작전에서 공을 세운 고 현시학(1기) 제독, 베트남 전쟁 중 월맹군이 던진 수류탄을 몸으로 덮쳐
부대원을 구한 고 이인호(11기) 소령, 서해교전에서 북방한계선(NLL)을 사수하다 산화한 고 윤영하(50기) 소령 등이 모두 해사 출신이다.
유삼남 전 해양수산부장관, 허대범 전 국회의원 등도 해사를 나왔고 구자학 아워홈 회장은 해사 3기생이다.
해사는 1999년 57기생부터 여자 생도를 받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배출한 여군 간부는 70여명. 이들은 항해와 항공, 정훈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여자 생도는 2004년 이후 3년 연속 수석졸업을 했고, 특히 올해 임관한 강경(60기) 소위는 해사 역사상 처음으로 입학과
졸업 수석의 영예를 독차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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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는 1950년대부터 세계 바다로 나아갔다. 1954년 당시 4학년인 9기생 전원이 동남아 지역을 무대로 첫 원양 항해에 나섰다. 이후
원양 항해를 50~60년대 동남아, 70년대 미주, 90년대 유럽·아프리카 지역으로 넓혔다. 92년에는 47기생이 2척의 구축함을 타고
130일간 세계일주를 했다. 당시 순항분대를 이끌었던 사령관이 지금의 윤광웅 국방부장관(당시 소장)이었다.
최근엔 외국 해사와 교류를 확대하고 방학 때는 5~6명씩 조를 짜 해외여행 기회도 마련하고 있다.
신세대 생도들의 생활도 크게 변했다. 올해 말 완공되는 새 건물의 각 방 정원은 2명. 4~8명이 우글거렸던 과거에 비하면 천국 수준.
모든 방에서 인터넷이 가능하고 전화도 있다. 외출·외박 규정도 완화돼 4학년의 경우 주말은 물론, 매주 수요일 저녁 외출할 수 있다. 생도들에게
영어는 기본. 졸업 때까지 전원이 ‘무조건’ 토익 600점을 넘어야 한다.
영어·일본어·중국어 등 다양한 어학반과 연극반, 보컬반, 요트반, 검도반 등 동아리 활동도 다양하다. 여자 생도가 들어온 이후엔 요리반과
꽃꽂이반, 에어로빅반도 만들어졌다.
수영은 기본. 입학 때 수영을 전혀 못했던 생도들도 졸업 때는 인명구조원 자격증을 취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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