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자 비색의 비밀 "불을 찾아라"
한 시인은 청자의 빛을 '가을 소나기 마악 지나간 구멍 뚫린 가을 하늘 한 조각'이라고 노래했다. 여름의 땡볕을 다 지나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시원한 소나기 한 줄기 쏴 내린 후 드러나는 그 청명한 하늘, 투명한 비취빛의 감동을 청자에서 보았으리라.
청자는 그랬다. 그리도 푸른 빛깔을 몸에 지니기 위해 1천도가 넘는 붉은 화염 속에서 스스로 등신불이 되었다. 도예장 김해익 씨는 온몸에 불을 휘 감싸고 소신공양에 나선 도자기의 꿈을 위해 최고의 불을 던져 주는 데 30년이라는 세월을 바쳤다. 청자빛으로 몸을 감싼 그의 도자기를 손수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불을 찾아라 옹기로 가업을 이은 아버지가 청자에 미쳐 자신의 발목을 잡았고 피가 끓는 17세 때부터 물레를 돌리며 5대째 가업을 잇는 운명을 온전히 받아들이되 결코 만만히 하지 않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그 각오는 더욱 날을 세워 불의 움직임과 소리까지 잡아내 구워지고 있는 그릇의 색깔과 형태까지 파악한다. 처음엔 옹기로 시작해 토기를 거쳐 청자까지 온 것은 우리나라 최고의 도자기 문화의 진수는 바로 청자라는 사실을 아버지를 통해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색깔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고 통일신라시대부터 녹유와 청자의 형태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그런 단점들이 보완되고 있었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 그는 청자에 조금씩 흥미를 가졌다. 특히 유약에 비취빛의 해답이 있을 거라 생각한 그는 유약 찾기에 많은 공을 들였다. 하지만 역시 청자빛의 비밀은 불에 있었다. 이 사실을 서른 살에야 깨달은 그는 왜 그토록 아버지가 불을 연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과 함께 '울산 가서 취직하겠다'던 그에게 '불을 찾아라,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며 지금의 자리에 붙잡아 둔 아버지가 때론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타오르는 불을 보면서 이제는 오히려 아버지의 깊은 뜻을 읽을수 있게 됐고 그 한을 풀 수 있어서 스스로 대견하다. 불을 때는 데 들어가는 나무는 소나무와 참나무 두 종류로 약 15톤 정도가 든다. 하지만 불을 땐 후 나오는 재는 한 소쿠리에 불과하다. 나무도 깊숙이 넣지 않고 반쯤 걸쳐 넣는데 5일 정도의 이 작업은 가마를 말리고 안을 데우는 작업이다. 이후 온도를 높이는데 이때 안의 그릇들이 검게 그을렸다가 달아 붉어진다. 불은 온도마다 움직이는 속도가 다르다. 불꽃 길이가 길어지고 빨라질수록 온도는 높아진다. 그래서 가마의 온도가 1천2백50도와 1천3백도 사이에 올랐을 때 약 48시간을 그 온도대로 지속시킨다. 비로소 제대로 된 소성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불의 직접적인 온도가 아니라 달궈지고 불꽃에 감싸여 발생하는 복사열은 그릇의 속까지 골고루 익혀줄 뿐 아니라 그 강도 또한 높여준다.
거기에 가마 안에서 발생되는 재는 그릇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유약이 된다. 이것이 바로 자연유약이며 청자색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그는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믿게 되었다. 청자는 실제로 어떤 그릇들보다 원적외선 방출량이 많다고 한다. 경상대학교 화학과 백우현 교수의 원적외선 연구에 의하면 고온에서 짧은 시간에 구워진 그릇은 시간이 지나면 탈색이 되고 강도가 떨어지지만 고온에서 오랜 시간 구운 그릇은 강도도 훨씬 오래가고 원적외선 방출량도 상당히 높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성공률이 겨우 30% 정도에 불과해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거의 녹초가 되지만 이제는 비색의 실마리들이 그릇을 꺼낼 때마다 풀어져 흐뭇하기만 하다. 아무리 흙으로 만든 가마라 해도 무리다. 그는 자기 고집대로 불을 때면서 많은 가마를 무너뜨렸다. 욕심처럼 온도를 높이다보면 가마가 휘어지거나 아예 주저앉아 버린다. 그럴 땐 그도 주저앉는다.
그래서 가마도 불과 함께 그의 연구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그릇에 따라 다른 가마를 지금까지 30여 개쯤 만들어봤다. 어떤 가마는 불을 때자마자 무너지고 또 어떤 가마는 그릇을 하나도 건질수 없게 되기도 했다. 불을 오래 땔 수 있는 가마는 신라 후반의 가마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 가마는 청자가마와 비슷한데 청자축제가 열리고 있는 강진에서 대규모로 발견돼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강진의 가마터가 발견됐는데 가보니 자신이 만든 것과 모습이 흡사해 무척 놀랐다고 한다. 그의 연구가 유물을 통해 검증된 것이니 청자의 역사를 찾기 위해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던 생각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제는 그릇만 봐도 가마 형태를 알 수 있을 만큼 가마에 자신감을 얻었다. 현재 그가 쓰는 가마는 대포굴가마로 길이 8m, 폭 1m 20cm 정도 된다.
지천명에서 찾은 자신감, 청자를 재현하리라 단칼에 바위를 잘랐다는 김유신 장군의 기개가 서려있는 곳에서 해겸도예라는 간판을 달고 토기와 자기를 굽는다. 그저 아는 사람들이 쉽게 찾아올 수 있도록 달아 논 이정표쯤으로 생각한다. 두 아이들 키우면서도 어렵다는 소리 한 번 없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적극 이해하고 가족을 지켜주는 부인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쉽게 작품을 팔지 않는다. 한때는 구입 문의도 많이 들어왔지만 그는 가급적 청자 재현을 위해 토기를 구울 뿐 다량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가 이다지도 청자 재현에 집착을 보이는 속뜻은 어떤 그릇보다 뛰어난 기술을 자랑했던 우리의 청자가 어려운 작업으로 인해 포기되고 세월 속에 묻혀 잃어버린데다 일본보다 앞선 과거의 기술을 재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불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안 되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현에 대한 조급성은 더 크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방 앞에 '인내(忍耐)'라는 두 글자를 붙여 놓았다. 연구하고 기다리는 것이 청자 비색의 비밀을 푸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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