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년만에 문을 연 개성… 경복궁 출발 3시간만에 눈앞 | ||||||||||||||||
일백번 고쳐 죽어 …
정몽주의 핏자국 '송도삼절' 박연폭포 … 황진이가 머리채로 쓴 글씨 눈으로 가슴으로 다 담아갈 수 있다면 …
500명이나 되는 남쪽 손님들, 개성은 몸단장을 했다. 대로변에 있는 3~4층 아파트들은 하나같이 베란다에 꽃화분을 얹어놓았다. 크건 작건 집들 창틀과 문은 하나같이 하늘색으로 칠해놓았다. 먼지나는 길에는 물을 끼얹어 숨을 죽였다. 그 푸른 창틀, 거기에 네 남매가 달라붙어 손을 흔든다. 내가 손을 흔들어 화답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가슴 한복판 저 깊은 속에 물기가 스며드는 것이다. 그때부터 ‘보고 먹고 즐기는’ 여행의 삼락(三樂)은 의미가 사라졌다. 이 낯선 도시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한 일이었다.
길가 건물 사이 골목에 사람들이 서 있다. 서 있는 사람들 뒤편으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보인다. 사이사이로 ‘과실 남새가게’ ‘봉동건재상점’ ‘관훈조선옷’ ‘천연색사진관’이 보인다. 여인 하나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간다. 짐짓 버스들을 무시하고 앞만 똑바로 쳐다보며 지나간다. “미제 폭격으로 박살났다가 수령님 지시로 완벽하게 복원된” 남대문을 지난다. “저게 그렇게 크게 보였는데….” 실향민 윤정덕(71)씨가 말한다.
옛 고려 성균관이었던 고려박물관. 붉고 푸른 원피스를 입은 젊은 여인들이 기념품 판매에 열중이다. 고려시대 유물로 채워진 박물관, 그리고 북한 정부는 개성경공업대학을 고려성균관으로 개칭했다. “…하여 세계에서 력사가 가장 오래된 대학을 가지게 되였다…”라고 안내문에 적혀 있다. 성균관은 1089년에 건립됐다. 역사가 되었건 력사가 되었건 개의치 않는다. 고려박물관이라 새겨진 기둥 앞은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사람들로 줄을 이뤘다. 그게 이번 여행의 목적이 아닐까.
선죽교(善竹橋). 모두 버스에 올라 선죽교로 향한다. 대로로 빠져나가기 전, 왼편으로 텃밭이 펼쳐지고 그 뒤로 아파트가 보인다. 텃밭과 아파트 사이, 여섯살쯤 되었을까, 계집아이 둘이서 이쪽을 바라보다가 어깨동무를 하고선 뒤돌아 걸어간다. 한 아이는 단발이었고 한 아이는 머리가 길다. 짧은 치마에 운동화를 신고 햇살 속으로 들어가는 아이들 모습, 그 모습에 내 눈이 또 붉어졌다.
선죽교 맞은편에는 영조와 고종 임금이 내린 표충비각이 있다. 나라에 변고가 있으면 울었다고 했다. 비석을 받치는 거북이를 만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서 지금도 개성사람들 손길에 반들반들하다. 선죽교를 에워싼 공간엔 오로지 남쪽 손님들과 북쪽 ‘관계자’들뿐이다. 개성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엔 항상 버스 창문이 가로놓여 있다. 버스에서 내리고 싶어. 내려서 꽃단장하고서 자전거 타고 가는 저 여인과 얘기하고 싶어…저 아이들 한번 안아봤으면….
남북회담에 애용되는 자남산려관에서 점심을 먹었다. 10찬 한정식. 개성약밥과 닭고기장과, 튀긴 인절미에 조청을 씌운 우메기, 그리고 봉학맥주와 소주인 령통술. 음식은 서울보다 싱겁고, 맥주는 12도로 서울보다 독하다. 개성에 고향을 둔 노인들, 정말 장하다. 새벽같이 출발해 12시가 다 되도록 바삐 돌아다녔건만, 힘들다는 소리 한번 없다. “통일을 위하여!”라는 소리가 노인들 식탁 주변에서 터져나온다.
1908년에 태어난 송한덕옹. 나이 서른둘에 개성을 떠나 55년만에 돌아왔다. 지팡이를 들고 있지만 정정하시다. 중절모에 정장을 갖춰 입은 송옹은 얼굴에는 아무런 감회가 없다. 세월이 그를 세상으로부터 초월하게 만든 것일까. 선죽교에서도, 표충비에서도 그는 말이 없다. 그저 “고대로야, 고대로…”라고 중얼거릴 뿐. 희미하게나마 노인 얼굴에 미소가 번진 건 박연폭포에서였다. 오후 1시. 박연폭포로 떠난다. 개성시내에서 24㎞ 북쪽. 개풍-평양간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개성시내가 내려다 보인다. 푸성귀를 심어놓은 텃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집안 마당에 앉아 있는 사람들, 작업장에서 손을 흔드는 사람들, 회색 건물들에 촘촘히 박힌 푸른 창틀… 그리고 송악산(松岳山)이 눈에 들어온다. “저거이가 자세히 보면 임신한 여자가 머리 풀고 누워 있는 형국이지요. 겨울이면 재미나요. 이름 그대로 바위산에 소나무가 많은데, 겨울에 눈 내리면 다 하얗고 저기 다리 가랭이 사이에 소나무숲만 파란거라. 그거 봐야 하는데….” 동승한 개성시 공무원 조성(趙成)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다 웃는다. 박연폭포는 송악산 뒤쪽에 있다. 갖 깔아놓은 아스팔트길로 사람들이 올라간다. 도대체 어떤 폭포길래 황진이가 자기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했을까.
과·연·그·러·하·다!
어디선가 세찬 빗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득 눈앞에 폭포가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 알고 있는 음악가 박연이 아니라 폭포 위에 바가지처럼 생긴 못이 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비 젖은 속치마와 저고리를 입고서 서경덕을 유혹하러 갔던 황진이, 인품에 감명받아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하는 말, “개성에서 꺾을 수 없는 것이 셋이 있는데 서경덕 당신과 나, 그리고 박연폭포”라고 했다. 폭포는 천연기념물로, 황진이 무덤은 김정일 지시로 정비되었고 서경덕은 ‘조선시대 유물론의 선구’라는 이름으로 추앙받는다. 그 폭포 앞에서, 송한덕옹 얼굴이 밝아졌다. 말이야 그저 “고대로야, 고대로”뿐이었지만, 100년을 살아온 노신사 마음이 저렇게 열린다. 그만큼이나 폭포는 장관이다. 37m 높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거센 물길, 시퍼런 못과 하나가 되어 수로를 따라 계곡으로 흘러간다. 그 옛날 박씨 성을 가진 청년이 폭포 앞에서 피리를 불었는데 거기에 반한 용녀가 그를 유혹해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 그게 박연이다. 죽은 아들 그리워 어머니가 몸을 던졌다는 못이 폭포수가 떨어지는 고모담이다.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박연폭포에서 떨어지면 서해로 나온다”고 안내원이 말한다. 폭포 앞 광장에서 창이 울려퍼진다. “박연폭포 흘러가는 물은 범사정을 에돌아든다. 에야데야 에야데야, 모두가 내사랑이야. 박연폭포가 제 아무리 깊다 해도 우리네 정만 못하더라….” 광장에 춤판이 벌어진다. 다리로 연결된 폭포 앞 바위도 사람들로 붐빈다. 폭포수, 안개처럼 얼굴에 달라붙는다. 절벽에도 바위에도 옛 사람들 이름이 빼곡하다. “옛날에 돈많은 양반놈들이 여자들 끼고 와서 놀면서 노비들 시켜서 새겨놓은 것들”이라고 한 안내원이 설명한다. ‘놈’자가 마음에 걸렸는지 “아, 양반”이라고 덧붙인다.
飛流直下三千尺(비류직하삼천척) 疑是銀河落九天(의시은하락구천) 그 낙서 가운데 하나다. ‘폭포가 날 듯이 3000척을 떨어지니 은하수가 구천에서 떨어지는 것 같구나’ 황진이가 이태백의 시를 인용해 지은 ‘박연폭포’다. 황진이가 머리채에 먹을 묻혀 썼다고 한다.
●주의:전화, 녹음기, 160㎜가 넘는 렌즈는 반입 불가능.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에는 사진 촬영이 금지된다.
●미국달러만 쓰인다. 쇼핑은 북측 출입사무소에 있는 평양 아리랑총회사 면세점이 조금 싸다.
●관광 문의:(02)3669-3000 개성=글·사진 박종인기자 / 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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