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軍事 資料 綜合

장진호 전투

鶴山 徐 仁 2006. 1. 30. 23:55
장진호 전투
장진호 전투 (Chosin Reservoir Campaign)


올해는 참 더럽게도 추운 겨울입니다..항상 11월 중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자꾸 군대 생각이 납니다.. 한 겨울 팬티만 입고 물세례를 받던 기억, 하늘도 얼고 땅도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청명한 겨울날 돌덩이 같이 얼어붙은 땅을 야전삽으로 파 개인용 A텐트를 설치하고 세명이서 다닥다닥 붙어 떨떨 떨면서 밤을 보내던 기억.....

추운 겨울 훈련을 나가기 전에 정훈장교가 틀어준 비디오와 작전장교가 해주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한국 전쟁당시 원산에 상륙했던 미 해병대가 함경도 흥남 북쪽 장진호에서 벌였던 혹독한 겨울 추위와 싸워가면 중공군의 포위를 돌파해 탈출했던 작전에 대해...

중공군의 인해전술보다도 무서운 것이 겨울 추위라는 것.... 그 추위에 익숙해지고 적응하지 못하면 총에 맞기도 전에 동상으로 죽게 된다면서

여러 가지 동계훈련시 숙지사항을 교육시키던 생각이 납니다.. 물론 교육시간에 꾸벅 꾸벅 졸고 있었지만....

장진호 전투는 2차대전시 독일 6군과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벌였던 전투와 더불어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2대 동계작전 중에 하나이며, 가장 유명하고 성공적인 철수작전의 사례로 꼽힙니다. 아울러 미 해병대가 창설이후 세계 곳곳에서 치렀던 전투 중에 가장 치열한 전투로 손꼽입니다.

재미난 것은 전쟁의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군이 쏙 빠지고 미국과 중국군이 남에 나라인 한국에서 수 만명의 꽃다운 자국의 젊은이들을 희생해가면 싸운 전투라는 겁니다...어쩌면 이런 점 때문에 한국 사람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이야기 일수도 있습니다만 이 전투에는 여러 가지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는 겁니다..

전멸에 위기에 빠진 군인들이 어떻게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잘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자만심과 허영심의 결말은 어떤 건인지..위기를 감지하고 대비할줄 아는 리더의 역량과 희생정신은 어떤 것인지를......


1950년 9월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의 전선을 일거에 무너뜨리고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구상한다. 그는 휘하 군대를 미 제8군과 10군단으로 나눠 서쪽 방면은 워커장군의 제8군이 서울 북쪽으로 개성-사리원 평양 축을 따라 압록강으로

동쪽 방면은 알몬드 장군의 10군단이 원산에 상륙하여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해 들어가 동서로 분할하여 섬멸한다는 구상을 하게 된다.

이 구상은 한만 국경으로부터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으로 이어져 동서로 나눠진 한국의 지리적 특성과 이에 따른 군수지원 문제를 감안하여 결정된 것이나 취약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지휘권이 동서로 양분되고 동서 양 부대의 거리가 멀어 상호 지원이 불가능함에 따라 거의 독립적으로 작전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북쪽으로 속절없이 패주를 하고 있었고 그들의 군수시설도 연합군의 공중 폭격으로 대부분 파괴된 상태라 별 걱정 없이 작전은 추진되기 시작한다.

한편 중국은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중국이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는 경고를 했지만 연합군 사령부는 이런 중국의 태도를 거의 무시하고 있었고 중국군의 압록강 도강과 북쪽 지역 출몰도 거의 형식적인 지원부대쯤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1차대전의 전공과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 장군은 만년에 한국전쟁을 지휘하며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미국의 영웅이 되어 있었고 이 출중한 능력을 보유한 군인은 벌써 한국전쟁도 승리로 이끌었다고 자평하며 자만의 늪으로 빠져들어 갔다.

그러나 중국군은 맥아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기도비닉을 유지한 체 압록강을 은밀하게 도강하고 있었다. 당시 중국군은 연합군에게 발각되지 않기 위해 낮에는 산속에 숨어있다 밤에만 행군하는 방법으로 백만군대를 소리 소문 없이 한반도로 이동시킬 수 있었다.


원산 앞바다의 기뢰 때문에 계획보다 한참이 지난 1950년 10월 26일에 원산에 상륙한 미해병 1사단의 올리버 스미스(Oliver. P. Smith) 장군은 상급부대인 10군단의 에드워드 알몬드 (Edward M. Almond) 중장의 작전계획을 보곤 걱정이 앞섰다.

사단의 작전거리가 무려 480km에다 도로라는 것이 거의 좁은 산길이라는 점과 해병1사단 예하 보병연대를 1연대는 원산 주변, 5연대는 신흥, 7연대는 수동 북쪽에 분산배치 시켜 진격을 하라는 알몬드 장군의 진격명령과 사단 장비의 타부대로의 차출 지시로 상당히 화가 나 있었다.

게다가 도주하는 북한 패잔병만 있을 줄 알았던 유엔군은 압록강 부근에서 중국군이 출몰하여 곳곳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고 해병1사단 전방에서 포로로 잡힌 한 중국군은 대군이 산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다 일거에 포위하여 연합군을 섬멸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주었으나

사령부의 지휘관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승전무드에 젖은 미군은 시시각각 다가오는 거대한 재앙의 전조를 무시했다.



지 휘 관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

북진의 동부전선을 담당하는 미 제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은 전황을 너무도 낙관하고 있었고 전방의 중국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게다가 작전지역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리한 진격명령을 내리는 과오를 범했다.

그는 완강하고 급한 성격의 소유자로 맥아더 원수의 신임이 아주 두터운 장군이었다. 책임감이 강하고 부하들의 헌신적인 충성을 요구하였으며 맥아더 장군에 충실하여 조속히 한국전쟁을 종결시키려는 맥아더 장군의 의도를 파악하고 자신의 10군단과 소속 해병1사단의 성급한 진격을 명령하게 된다.

장진호 전투에서 그가 보여준 인상적인 행동으로는 깨끗하게 면도한 얼굴과 따뜻해 보이는 방한복을 차려입고 헬기로 전방을 방문해 ‘중국의 세탁청소부 몇몇 때문에 진격이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고 일장 훈시를 하고 전방에 고립일보 직전의 부대원들에게 훈장 몇 개를 달아준 것이 고작이었다.

그날 훈장을 받은 육군 7사단 소속 대대장인 페이스 중령은 알몬드 장군이 돌아가자 신경질적으로 훈장을 가슴에서 떼어내고 “훈장 말고 지원군을 주지” 라고 했다.



미 해병 제1사단장 스미스 장군

해병1사단장 스미스 장군은 깡마른 체구에 조용한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원칙주의자였고 전장에서는 특유의 대범함을 보여주는 지휘관이었다. 그는 대한한 독서가로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을 가진 장교로도 유명했다. 특히 그는 속기의 명수로 자신이 겪은 전장에 대한 세세한 메모 덕에 장진호 전투 역사기록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그는 항상 최악에 상황에 대비하라 그리고 최악에 상황에서도 항상 낙관적으로 임하라는 평소 소신에 따라 이번 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전시에 말단 부하가 먹는 음식을 똑같이 먹고 허름한 야전 지휘부를 설치하고 부하 장병들과 동거 동락한 것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원산 상륙 이후부터 10군단장 알몬드 장군과 삐걱거리기 시작 했는데 그는 알몬드 장군의 낙관적인 전황파악과 비상식적인 부대 배치명령으로 그의 지휘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상륙작전이 끝난 이후 대규모 지상 작전 시에는 어쩔 수 없이 육군의 지휘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 해병대다. 따라서 육군 장성이라 할지라도 상관은 상관이고 명령은 명령이라 알몬드 장군의 지시를 따르기는 했지만 주도면밀하게 만일에 사태에 대비해 나갔다.

그는 알몬드 장군의 분산배치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고 부대를 장진호 축선상에 집중배치를 여러 번 요구했고 결국 관철시켰다.

만일 해병1사단이 알몬드 장군이 원했던 대로 각 연대별로 쪼개져 진격했다면 분명 중국군에 의해 각개 격파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알몬드 장군의 진격명령을 거의 명령불복종에 가까울 정도로 지연시켰으며 작전지역의 특성을 잘 관찰하여 장진호 축선상 보급로가 좁아터지고 꾸불꾸불한 산악도로라는 것을 파악하고 충분한 양의 탄약과 보급물품을 하갈우리와 몇몇 곳에 비축해 놓았고

야전활주로를 건설하게 한 것은 그의 선견지명이었다. 결국 지휘관의 이런 노력으로 해병1사단과 육군 7사단의 전멸이라는 재앙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군 제9병단 사령관 송시륜 장군

그는 중국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1927년 농민무장군을 조직 유격대장 생활을 하다 1930년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인 홍군 20군단 참모장을 시작으로 전장을 누빈 사람이다.

그는 1949년 2월부터 홍군 제9병단을 맡아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9병단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홍군출신답게 게릴라 전법을 구사 낮에는 미군의 공중폭격과 야포 공격을 피해 산속에 숨어 있다 밤에만 극도의 행군 군기를 유지하면 도로가 아닌 산 능선을 타고 남쪽을 진격해들어 왔다.

그는 장진호 축선상의 좁은 산악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진격해오는 해병1사단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접촉을 유지시키며 진흥리-고토리-하갈우리-유담리 사이에 좁은 산악도로에 길게 늘어서 배치되기를 기다렸다. 작전은 성공했다.

주력부대들을 산악도로를 따라 주변 산정상에 배치시켜 해병1사단과 육군7사단을 커다란 자루 속에 넣어 완전 포위하는데 성공한다.

이 작전이 성공하자 해병1사단과 주변 미군을 완전 전멸시키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자만했다. 그는 해병1사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동 장군

1950년 11월이 되자 알몬드 장군은 스미스장군에게 압록강 방면으로 진격을 하라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11월 중순경에는 해병1사단이 장진호 서쪽 유담리까지 진격을 했다.

송시륜 장군의 의도대로 장진호 축선상에 길게 늘어져 배치된 것이다. 다행인 것은 예하 부대들이 여기저기 수십킬로 씩 흩어져 있지 않고 비교적 지근거리에 위치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시 장진호 지역에 미군 병력은 해병1사단 13,500명 과 육군 7사단 일부 병력 4,500명 정도였고 주변에 중국군은 대략 7만명이 넘는 수준이었다.

11월 초에 첫눈이 내리고 얼마 되지 않아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장진호 주변은 평균적으로 해발 1000m가 넘는 산악지역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추운 개마고원 지역으로 겨울철 평균 기온이 영하 30도이며 종종 영하 45도까지 내려가기도 하는 극한지였다.

이제 미군과 중국군은 상대방 보다 더 무서운 적 동장군과도 싸워야 할 판이었다. 이 동장군은 병사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주었는데 혹한의 날씨는 식수와 음식 모두 얼려버렸고 모든 장비의 성능을 크게 떨어뜨렸다.

소총의 발사불능, 야포의 불발율이 크게 증가했고 환자용 혈액과 몰핀도 얼어붙어 위생병이 몰핀 앰플을 얼지 않게 입속에 넣고 다닐 정도였다.

부상자는 잠시만 눈위에 두어도 바로 동사했고 대부분 병사들의 발은 동상으로 시커멓게 변해갔다. 무시무시한 추위는 병사들을 무기력증에 빠지게 했다.

특히 중국군은 열악한 방한장비로 인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웅쿠리고 있다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집단으로 투항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중국군의 포위

1950년 11월 27일 북쪽으로 전진하던 해병1사단 5연대와 7연대 앞에 전방에 강력한 중국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사실 이때 중국군은 이미 유담리 부근 일대를 완전히 포위한 상태였다.

밤이 되자 기온은 영하 30도까지 내려갔다. 유담리를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30cm가 넘게 얼어붙은 땅을 파고 진지를 구축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9시가 넘자 중국군은 유담리를 애워싼 고지능선을 따라 인해전술로 물 밀 듯이 공격해 해왔다.

중국군은 79사단과 89사단이 유담리 지역을 공격할 때 중국군 59사단은 유담리와 하갈우리 사이 도로상 요충지인 덕동고개 쪽으로도 공격을 해와 유담리 지역 해병부대를 고립시키려 했다.

치열한 전투는 밤새 지속되었다. 해병 5연대와 7연대는 탄약과 수류탄이 떨어지자 육탄전으로 진지를 지켜냈다.

한편 하갈우리와 고토리 주변 지역도 중국군의 공격이 개시되었다. 이제 서야 미해병대는 자신들이 중국군이 쳐놓은 덧에 걸려 완전히 포위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국 해병 코만도 부대의 적진돌파

11월 28일에 쯤에는 고토리도 중국군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였다. 당시 사단본부 지휘소는 하갈우리에 설치되어 있었고 하갈우리 남쪽 고토리와 진흥리는 해병 1연대 병력이 후방을 방어하기 위해 주둔 중이었다.

스미스 장군은 고토리와 하갈우리 사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는 중국군을 격퇴하여 보급로를 확보하고 병력일부를 하갈우리로 진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하갈우리는 1사단 지휘소와 보급기지, 건설중이던 야전비행장이 있는 요충지였으나 본부 근무부대와 기타 잡다한 사단 직할부대들이 가까스로 지키고 있었는데

병력수가 1개 대대 규모 정도여서 부대 충원도 필요했기 때문에 고토리리로부터의 보급로 확보와 부족한 병력 충원이라는 두 가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토리 지역을 담당하던 1연대장 풀러 대령은 1개 중대를 보내 이 임무를 수행하게 했으나 결과는 실패로 돌아갔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로 이어지는 이 도로 주변에는 중국군의 강력한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어 더 이상의 진출이 불가하여 철수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마침 하갈우리로 북상중인 영국 해병 제41 코만도 부대와 미해병 1연대 G중대 그리고 육군 7사단 B중대가 임시로 편성되어 북쪽 하갈우리로 진격하여 보급로를 개통시키려는 두 번째 시도가 개시된다.

이 임시부대는 영국 해병 41코만도 부대 지위관인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 지휘하에 개시되었다. 총 900여병의 병력이 차량에 분승하여 전차의 호위아래 하갈우리로 돌파를 시도하기로 되어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의도를 중국군이 미리 예측하고 있었다는 점이고 이에 대비해 주 도로 옆 고지에 부대배치를 완료하고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이 휘하 부대를 이끌고 하갈우리로 진격해 들어가자 중국군의 집중사격이 개시되었다. 부대는 도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갔으나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은 하갈우리 사단본부에 무전으로 사상자가 급증하고 있다며 전진을 계속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 순간 스미스 장군은 군 지휘관으로서 가장 힘들고 고통스런 결정을 해야 했다. 증원부대고 오지 않으면 사단본부가 적에 손에 떨어질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그는 단호하게 명령을 내린다. “어떠한 희생이 있더라도 반드시 돌파하라!”

드라이스데일 부대의 선두가 하갈우리와 고토리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중국군의 공격은 절정에 다 달았다. 빗발치는 총탄 앞에 부대는 다시 정지해야 했고 순간 탄약을 가득 실은 차량에 박격포탄이 명중되자 큰 폭발과 함께 차량이 도로에 전복되어 버린 것이다.

후속부대가 따라올 것이라 생각하고 선두부대는 적의 화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속력을 높여 앞으로 전진을 계속했지만 후속 부대들은 전복된 차량으로 더 이상 전진을 하지 못하고 중국군의 총탄세례를 계속 받아야만 했다.

결국 후속부대는 철수를 해 다시 고토리로 돌아오거나 포로 신세가 되어야했고 드라이스데일(Douglas Drydale) 중령을 포함한 선두부대는 가까스로 하갈우리 사단 지휘소에 도착 할 수 있었다. 훗날 드라이스데일 중령은 자신이 지나갔던 이 길을 죽음의 계곡(hell fire valley)이라 했다.



고립무원

아군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끊기고 1개 사단 병력이 꼬불꼬불한 한국의 살길을 따라 고지몇 개를 지키며 중국군에게 완전히 포위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중국군은 미군의 공중폭격과 야포 공격을 피하기 위해 야간에만 공격을 해왔다.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중국군과의 혈전 끝에 고지를 지키기도 했지만 빼앗꼈다 주간에 역습을 가해 다시 탈환하기도 하면서 절망적인 전멸 일보직전의 상황을 지키고 있었다.

이 일이 외부로 알려지자 미국 본토는 발칵 뒤집혔다. 곧 승리할 것으로 알고 잊혀져 가던 한국 땅에서 미국 최정예 부대가 완전 포위당해 곧 전멸하던지 투항해야 하는 상황이 믿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유명 일간지 일면에는 “미해병대 한국 동북부 장진호에서 전멸위기” 뭐 이런 기사로 도배가 되었다. 해병대 사령부에는 자식을 해병대에 보낸 부모 형제 아내 친구들의 전화로 교환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미 해병대의 위기는 2차대전당시 타라와 과달과날 이오지만 등지에서 숫하게 있었지만 1개 사단 전체가 전멸에 처한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 위기감은 정말로 심각했다.

미국 전역의 신문 대부분이 해병1사단의 전멸을 예상했고 미 정부 고위 관리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11월 30일 경 해병 1사단 5연대와 7연대는 장진호 서쪽 유담리에 포외된 상태였고 장진호 아래 하갈우리에는 사단 지휘소에 1개 대대 병력이 방어중이고,

장진호 동쪽에는 미 7사단 일부 병력이 하갈우리 아래쪽 고토리에는 해병 1연대 병력이 중국군에 포위되어 있는 상태였다. 그야말로 고립무원 처지였다.

이건 후퇴가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이다~!

12월 1일경 스미스 장군은 장진호 전투 전체의 양상을 바꾸는 결정적인 명령을 내린다.

유담리에 5연대는 유담리 지역 전부를 방어하고 7연대는 5연대가 시간을 끄는 동안 전 부대원을 이끌고 하갈우리 쪽으로 돌파하라. 7연대가 하갈우리 쪽으로 접근을 하면 5연대도 서서히 유담리 지역을 벗어나 하갈우리로 후퇴하라~!

때마침 희망의 불빛이 보였다. 스미스 장군이 장진호 전투 초기부터 진행시켰던 하갈우리 야전활주로가 12월 1일 경에 부분적으로나마 개통된 것이었다.

전투 초기 스미스 장군이 유담리, 하갈우리, 고토리 등지에 야전비행장 건설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대해 일부에선 야전지휘관이 너무 신중을 기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훗날 역사가들은 이 당시 야전비행장이 건설되지 못 했다면 분명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라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오후 2시경 C-47 수송기가 활주로에 착륙을 하자 부상자 수송이 시작되었다. 이 활주로가 고립무원의 해병1사단과 외부를 연결해주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 보급품 수송과 부상자 이송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12월 4일경 5연대와 7연대는 치열한 전투를 거치고 수백명의 부상자를 대동한 채 유담리에서부터 23km의 지옥 굴 같은 포위망을 돌파해 하갈우리로 후퇴했다.

하갈우리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단 지휘부와 부대원들은 유담리 방향에서 돌아오는 병사들을 보고 마치 유령이 걸어오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 각 언론사들의 특파원과 기자들이 수송기 편으로 하갈우리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뉴욕 헤럴드 튜리뷴의 미모의 여성 기자였던 마가릿 히긴스의 도착은 하갈우리 병사들을 떠들썩하게 했다.

이 여기자는 스미스 장군에게 이 작전이 후퇴작전이냐고 물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방을 포위당해 어딜 가나 적군인데 후퇴는 가당치 않다.

"후퇴라니 빌어먹을 우리는 다른 쪽으로 공격중이라고"~! 라고 호기 있게 대답했다.

이 말은 지상을 통해 세계각국에 보도됨으로 써 유명한 말이 되었는데 특히 이 전투를 상징하면서 매 해병대의 불굴의 투지를 알리는 말로 역사에 남게 된다.

특히 사단장의 이 말이 장병들에게 전파되면서 중국군에 의해 완전 포위되어 기약 없는 철수작전을 수행 중이던 많은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고양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흥남방향으로의 돌파

12월 5일 스미스 장군은 자신이 말한 다른 방향으로의 공격을 위해 예하 지휘관을 불러 작전회의를 갖는다. 늦가을에 원산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100km나 진격한 해병대는 이제 반대방향으로 진격하여 흥남으로의 힘겨운 철수를 해야만 했다.

스미스 장군은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적진 돌파시기를 12월 6일로 결정한다. 유담리서 철수한 제5, 7연대의 휴식과 재편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스미스 장군은 사단병력을

제5연대를 근간으로 영국 41코만도, 육군 31연대 전차중대, 포병1연대 등으로 구성된 5연대 전투단과

제7연대를 근간으로 육군 7사단 31연대 임시대대, 포병11연대 2개 대대, 사단 지휘부 등으로 구성된 제7연대 전투단

그리고 제1연대를 근간으로 육군 7사단 31연대 2대대, 사단 본부대대 등으로 구성된 제1연대 전투단으로 부대를 구성한다

스미스 장군의 작전계획은 다음과 같다.

먼저 하갈우리에 있던 제5, 7연대 전투단이 우선 고토리-진흥리 도로를 따라 함흥으로 돌파한다.

우선 5연대 전투단이 하갈우리 전부를 방어하는 동안 7연대 전투단이 먼저 고토리 방면으로 돌파를 하고 7연대가 하갈우리를 빠져나가면 5연대 전투단이 그 뒤를 이어 고토리로 철수하면서 사단 전체 후방을 방어한다.

1연대 전투단은 고토리와 진흥리 일대를 확보하다 7연대 전투단이 고토리를 통과할 때 호위를 하고 7연대가 빠져나가면 그 뒤를 따라 후속한다는 계획이었다.

포병부대들은 그 배치를 상호 지원 포격이 가능할 정도로 근접시켜 축차적으로 이동하고

적과 접적되어 있는 전투부대들은 지상 근접지원 전투기들의 엄호아래 신속이 전투지역을 이탈하게 했다.

지상의 해병부대와 해군 대지공격 전투기들 간에 효율적인 협조체제가 그 어느때 보다 필요한 시기였다.



탈 출

각 전투단들은 고토리와 진흥리 방향으로의 철수 와중에도 주변 진지를 탈환하여 측면을 보호해 가며 전진을 해야했고

도로 양쪽 5km 이내에는 전방 항공통제관이 미해군과 해병 항공대 소속 전폭기들과의 교신을 통해 지상부대들을 위한 근접 항공지원을 요청해가며 힘들지만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어 갔다.

중국군은 도로 옆 고지에서 내려와 도려 주변 지역에 계곡과 민가에 숨어있다 기습적인 공격을 가해와 차량들을 파괴하고 도로를 일시적으로 폐쇄시켜 미해병대의 진격을 중지시킨 이후

대규모 부대들이 도로 전면을 가로막는 등 거세 공격을 해왔다. 특히 주변지역 민간인 피난민들 때문에 미군은 골머리를 앓았다.

10만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은 중국군을 피해 미군 부대 근처로 무질서하게 몰려들었고 종종 피난민 속에 섞인 중국군들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각 부대들은 이를 격퇴시켜 가며 도로 개통을 유지한 상태로 죽음의 장진호 지역을 벗어날 수 있었다.

12월 6일에서 시작된 흥남으로의 철수작전은 11일 전 사단이 진흥리를 통과하여 흥남에 도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하갈우리에서 고토리 그리고 진흥리를 지나는 길은 중국군의 마지막 격렬한 공세와 추위, 폐쇄된 도로와 교량을 개척해가며 악전고투 끝에 일궈낸 승리였다.



투 혼

애초부터 미해병대의 장진호 전투는 지휘부의 적정분석 실패와 오판으로 재앙을 예고하고 있었다. 지옥 같은 개마고원의 혹한과 중국군의 인해전술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병력의 열세를 특유의 투지와 전투정신으로 극복했다.

이는 전장에는 죽음이 따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료 전우와 부대 명예를 위해 임무 수행을 하다 전사한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한국전쟁 중 미국의 무공훈장중 최상위급에 해당되는 명예훈장 수여자가 총 131명인데 그중 미해병대에 수여된 명예훈장이 무려 46명으로 1/3가량이 되고

그중 장진호 전투에 참가한 장병중 명예훈장을 수여 받은 이가 13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한국전쟁때 파병된 미 해병대 수가 고작 1개 사단 규모임을 감안하면 장진호 전투에서 보여준 미 해병대원들의 투혼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여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결 론

장진호 전투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맥아더가 구상한 북진전략의 실패속에 이뤄진 전술적인 승리였다. 당시 중국군은 총 7개 사단이 정진호에서 미해병 1개 사단과 육군 1개 연대를 포위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결론적으로 중국군 제9병단은 해병1사단 전멸과 흥남까지 밀고 내려간다는 당초 목표를 달성하기는 커녕 전사 2만5천명 부상 1만2천명의 사상자를 내면서 괴멸되다시피 했다.

미 해병대도 718명의 전사자와 3508명의 부상자를 내며 단기간에 가장 많은 전상자를 낸 전투를 치러냈으나 그들의 값진 희생으로 서부전선의 미 제8군의 붕괴를 막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제공했다.

전사에 길이 남을 이 철수 작전은 미해병1사단의 단결력과 장병들 간에 끈끈한 전우애 그리고 신뢰 속에서 그 승리의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긴박한 전쟁터에서 환자와 보급품 수송이 가장 급한일 임에도 불구하고 전사한 전우의 시신이라도 전장에 두고 떠나지 않는 다는 그들의 오랜 전통에 따라 1구의 시신이라도 후송시키려는 그들의 노력을 타군은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미국 출신 사진작가 데이비드 더글러스 던컨(David Douglas Duncan)이 찍은 당시 사진은 라이프지에 표지를 장식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때는 모든 것이 얼어붙을 것 같이 매서게 추운 아침 이었다. 그 야말로 매일 아침을 맞이하는 것이 감사 그 자체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저녁이면 그 밤이 셀 때까지 견딜 수 있을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인생이 짧게도 또는 영원같이도 느껴지는 세계다.

여기에서 해병대원에게 ‘크리스마스날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내일을 달라’라고 대답하는 세계인 것이다. ”

더 많은 자료와 그림은: http://kr.blog.yahoo.com/ninestone702/175.html?p=1&pm=l&tc=5&tt=1137866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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