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注: 이 단편소설은
1934년 7월에 발표되었다. 깊은샘刊 ‘李泰俊 전집1’ 1988년 판에서 소설의 일부를 발췌했다. 具常씨
추천. ================================================================ 〈前略〉 그는
이튿날 저녁, 집을 알고 오는 데도 아홉시가 지나서야 “신문 배달해 왔습니다.” 하고 소리를 치며
들어섰다. “오늘은 왜 늦었소?” 물으니 “자연 그럽죠.” 하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자기는 워낙 이 아래 있는 삼산 학교에서 일을 보다 어떤 선생하고 뜻이 덜 맞아 나왔다는 것, 지금은 신문 배달을 하나
원배달이 아니라 보조 배달이라는 것, 저희 집엔 양친과 형님 내외와 조카 하나와 저희 내외까지 식구가 일곱이란 것, 저희 아버지와 저희 형님의
이름은 무엇무엇이며, 자기 이름은 황가인 데다가 목숨 수자하고 세울 건자로 黃壽巾이기 때문에 아이들이 노랑수건이라고 놀리어서, 성북동에서는
가가호호에서 노랑수건 하면 다 자긴 줄 알리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다가, 이날도 “어서 그만 다른 집에도 신문을 갖다 줘야 하지
않소?” 하니까 그 때서야 마지못해 나갔다. 우리 집에서는 그까짓 반편과 무얼 대꾸를 해가지고
그러느랴 하되, 나는 그와 지껄이기가 좋았다.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열심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좋았고, 그와는 아무리 오래 지껄이어도 힘이 들지 않고, 또 아무리 오래 지껄이고 나도 웃음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 기분이 거뜬해지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나는 무슨 일을 하는 중만 아니면 한참씩 그의 말을 받아주었다. 어떤 날은 서로 말이 막히기도
했다. 대답이 막히는 것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막히었다. 그러나 그는 늘 나보다 빠르게 이야깃거리를 잘 찾아냈다. 오뉴월인데도
“꿩고기를 잘 먹느냐?”고도 묻고, “양복은 저고리를 먼저 입느냐, 바지를 먼저 입느냐?”고도 묻고, “소와 말과 싸움을 붙이면 어느 것이
이기겠느냐?”는 둥, 아무튼 그가 얘깃거리를 취재하는 방면은 기상천외로 여간 범위가 넓지 않은데는 도저히 당할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는 “평생
소원이 무엇이냐?”고 그에게 물어 보았다. 그는 “그까짓 것쯤 얼른 대답하기는 누워서 떡먹기”라고 하면서, 평생 소원은 자기도 원배달이 한번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남이 혼자 배달하기 힘들어서 한 이십 부 떼어 주는 것을 배달하고, 월급이라고
원배달에게서 한 삼원 받는 터이라, 월급을 이십여 원을 받고 신문사 옷을 입고, 방울을 차고 다니는 원배달이 제일 부럽노라 하였다. 그리고
방울만 차면 자기도 뛰어다니며 빨리 돌 뿐 아니라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조금도 무서울 것이 없겠노라 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럴 것 없이 아주 신문사 사장쯤 되었으면 원배달도 바랄 것 없고 그 은행소에 다니는 집 개도 상관할 배 없지 않겠느냐?” 한 즉, 그는
뚱그레지는 눈알을 한참 굴리며 생각하더니 “딴은 그렇겠다”고 하면서, 자기는 경황이 없어 거기까지는 바랄 생각도 못하였다고 무릎을 치듯 가슴을
쳤다. 그러나 신문사 사장은 이내 잊어버리고 원배달만 마음에 박혔던 듯, 하루는 바깥마당에서부터 무어라고
떠들어대며 들어왔다. “이선생님? 이선생님 계쇼? 아, 저도 내일부턴 원배달이올시다, 오늘밤만
자면입쇼…” 한다. 자세히 물어보니, 성북동이 따로 한 구역이 되었는데 자기가 맡게 되었으니까, 내일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막
떨렁거리면서 올 테니 보라고 한다. 그리고 “사람이란 게 그러게 무어든지 끝을 바라고 붙들어야 한다.”고 나에게 일러주면서 신이 나서 돌아갔다.
우리도 그가 원배달이 된 것이 좋은 친구가 큰 출세나 하는 것처럼 마음속으로 진실로 즐거웠다. 어서 내일 저녁에 그가 배달복을 입고 방울을 차고
와서 쭐럭거리는 것을 보리가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그는 오지 않았다. 밤이 늦도록 신문도 그도 오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신문도 그도 오지 않다가 사흘째 되는 날에야, 이날은 해도 지기 전인데 방울 소리가 요란스럽게 우리 집으로
뛰어들었다. “어디 보자!” 하고 나는 방에서 뛰어나갔다. 그러나 웬일일까, 정말 배달복에
방울을 차고 신문을 들고 들어서는 사람은 황수건이가 아니라 처음 보는 사람이다. “왜 전엣 사람은 어디 가고
당신이오?” 물으니 그는 “제가 성북동을 맡았습니다.” 한다. “그럼 전엣
사람은 어디를 맡았소?” 하니 그는 픽 웃으며 “그까짓 반편을 어딜 맡깁니까? 배달부로 쓸랴다가 똑똑치가
못하니까 안 쓰고 말었나 봅니다.” 한다. “그럼 보조 배달도
떨어졌소?” 하니 “그럼요. 여기가 따루 한 구역이 된 걸요.” 하면서 방울을 울리며
나갔다. 이렇게 되었으니 황수건이가 우리 집에 올 길은 없어지고 말았다. 나도 가끔 문안엔 다니지만, 그의
집은 내가 다니는 길 옆은 아닌 듯 길가에서도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가까운 친구를 먼 곳에 보낸 것처럼, 아니 친구가 큰
사업에나 실패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못 만나는 섭섭뿐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기도 하였다. 그 당자와 함께 세상의 야박함이 원망스럽기도
하였다. 한데 황수건은 그의 말대로, 노랑수건이라면 온 동네에서 유명은 하였다. 노랑수건 하면, 누구나
성북동에서 오래 산 사람이면 먼저 웃고 대답하는 것을 나는 차츰 알았다. 내가 잠깐씩 며칠 보기에도 그랬거니와 그에겐 우스운
일화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삼산 학교에 급사로 있을 시대에 삼산 학교에다 남겨 놓고 나온 일화도 여러 가지라는데, 그 중에
두어 가지를 동네 사람들의 말대로 옮겨보면 역시 그 때부터도 이야기하기를 대단 즐기어 선생들이 교실에 들어간 새 손님이 오면 으레 손님을
앉히고는 자기도 걸상을 갖다 떡 마주 놓고 앉는 것은 물론, 마주 앉아서는 곧 자기류의 만담삼매로 빠지는 것인데, 한번은 도 학무국에서 시학관이
나온 것을 이따위로 대접하였다. 일본말을 못하니까 만담은 할 수 없고, 마주 앉아서 자꾸 일본말을 연습하였다. “센세이 히,
오하요 고사이마쓰까… 히히, 아메가 후리마쓰 유끼가 후리마쓰까, 히히… (선생 히, 안녕하십니까… 히히, 비가 옵니다. 눈이 옵니까,
히히…)” 시학관도 인정이라 처음엔 웃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을 되풀이하는 데는 성이 나고 말았다.
선생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가 나지 않으니까, 한 선생이 나와 보니 종칠 것도 잊어버리고 손님과 마주 앉아서 “오하요 유끼가 후리마쓰까…”
하는 판이다. 그날 수건이는 선생들에게 단단히 몰리고 다시는 안 그러겠노라고 했으나,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해서 그예 쫓겨나오고
만 것이다. 그는 “너의 색시 달아난다.” 하는 말을 제일 무서워했다 한다. 한번은 어느 선생이
장난엣말로 “요즘 같은 따뜻한 봄날엔 옛날부터 색시들이 달아나기를 좋아하는데, 어제도 저 아랫말에서 둘이나 달아났다니까 오늘은
이 동리에서 꼭 달아나는 색시가 있을걸…” 했더니, 수건이는 점심을 먹다 말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한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는 어서 바삐 하학을 시키고 집으로 갈 양으로, 오십 분 만에 치는 종을 이십 분 만에, 삼십 분 만에 함부로 다가서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後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