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스크랩] 우리나라 조선의 최초 기독교인

鶴山 徐 仁 2006. 1. 19. 22:09


고쯔시마(神津島)의 오다 쥬리아 묘

오다 쥬리아는 한국인 최초의 기독교인들 중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1592-1598) 때 적장이었던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세례명 아우구스티노)가 전쟁고아가 된 조선인 어린 소녀 한 명을 일본으로 보내어 부인 유스티나에게 기르게 하였다.

이 때부터 이 소녀는 고니시 집안의 양녀가 되어 일본에서 학문과 기독교 신앙을 익히게 되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에게 패하면서 히데요시의 부하였던 고니시 유끼나가가 1600년에 처형되었고 집안도 몰락하였지만, 쥬리아의 미모와 총기가 이에야스의 눈에 띄어 측실로 간택되었다. 그러나 쥬리아는 자신에게 주어진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만을 따랐다.

이 점에 대해서 일본에서 활동했던 아론죠 뮤뇨스 신부는 '1606년에 발생한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이란 제목의 예수회 연례보고서에서 "쥬리아 자신은 한국 태생의 포로출신인데 고니시 장군의 양녀로서 신앙을 갖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쥬리아 자신도 "만일 이에야스 장군이 여인들을 자주 불러 가는 것처럼 나를 자기 침실에 들라 하더라도 내가 거기서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그것이 여의치 않을 경우에는 . . . .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습니다."고 하였다.

이에야스는 1611년 천주교를 박해할 때에 쥬리아를 회유하였으나,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를 저 버릴 수 없다."며 거절하였고, 1612년 4월 20일에 오오시마(大島)로 유배당하였다가 다시 니이시마(新島)를 거쳐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고쯔시마로 옮겼다.

쥬리아가 고쯔시마에까지 오게 된 이유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감화를 받고 기독교에 귀의함으로 지방의 관리들이 상부에 진정한 까닭이었다.

쥬리아는 고쯔시마에서 서너 세대밖에 되지 않는 섬 주민들에게 글과 사랑을 가르치며 기도로 생활하다가 1651년 경에 자유인이 되었다. 섬 사람들은 쥬리아가 죽은 뒤로 330년이 넘도록 그녀를 섬의 수호자로 받들며 지금도 생화를 바치고 있다고 한다[{절두산 순교 기념관 개관 20주년 기념 화집}, 28-29쪽 참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 순교한 이바라끼 가족 흉상.

1549년 7월, 일본 큐우슈우(九州)에 상륙한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한 일본 최고 지배자였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후계자로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예수회 신부들을 만나 명과 조선을 정복하여 전역에 교회당을 세우고 그들 백성들을 천주교인으로 만들겠다고 호언하며 1592년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실제로 세스페데스 신부(예수회)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 군에 종군하여 조선에 전도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포로로 끌러간 조선인들 가운데에는 기독교에 개종한 자들이 다수 있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1611년 도꾸가와 이에야스(德天家康)의 천주교 박해 때에는 무려 21명의 조선인이 순교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앞선 1597년 2월 5일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주교를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에 나가사끼(長崎)에서 조선인 바오로 이바라끼, 그의 동생 네오 이바라끼, 그의 아들 12세의 소년 루도비꼬 이바라끼가 순교하였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가서 일본에 살면서 기독교에 입교한 후에 성 프란치스코 3회에 입회하여 신앙생활을 했던 한국 사람들이다. 이들 3인은 1862년 6월 8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이바라끼 가족의 흉상은 서울 합정동 절두산 성지 서쪽 광장 끝 쪽에 세워져 있으며, 서울 대방동 성 안또니오 형제회에서 1976년 6월 8일 봉헌 건립하였다.[{절두산 순교 기념관 개관 20주년 기념 화집}, 32-33쪽 참고]


 
출처 : 블로그 >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 글쓴이 : 크레믈린 [원문보기]
 

 
출처 : 블로그 > 은혜(恩惠) | 글쓴이 : 은혜 (恩惠) [원문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