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김제 만경평야
코스모스가 활짝 핀 길 너머로 만경평야가 광활하게 뻗어있다.
익숙한 듯 하지만, 잊혀져가는 우리의 들녘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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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수해가 나더라도 이곳만은 비켜간다지요.” 유성열 김제시 지평선축제팀장의 말이 허튼 소리는 아닌 듯 싶었다. 남쪽을 할퀸 태풍
매미의 기승도 이 너른 들녘을 건드리진 못했다.
국내 최대의 곡창지대인 김제의 만경평야. 국내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을 볼 수 있다는 그 드넓은 들녘이 한껏 무르익었다. 익어가는 벼이싹 만큼
들녘의 빛깔도 농염해졌다. 가을은 자연이 빚어내는 황금빛 숙성의 계절이다. 다음달 2일부터 5일, 이 들녘 지평선에선 수확을 준비하는 흥겨움이
울려퍼진다. 이 곡창지대의 풍요를 전국에 알린 지평선 축제가 올해로 5회째를 맞았다.
코스모스 꽃길 36㎞
'秋香' 코스모스 어울린 황금들녘
서해안 고속도로 서김제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나오면, 김제의 확 트인 들녘이 시원하게 펼쳐지고, ‘지평선 축제’를 알리는 허수아비들이
이방인을 반갑게 맞는다.
우선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 꽃길. 김제시 진봉면, 광활면으로 이어지는 29번 국도, 702번, 711번 지방도 양
옆으로는 진홍, 분홍, 하얀 빛의 코스모스가 해맑게 하늘거리며 끝없이 이어진다. 김제시가 지평선 축제를 위해 4년전부터 조성해온 것으로 36㎞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코스모스 드라이브 코스다. 지난 달 28일에는 이 길에서 전국 마라톤 대회도 열려 마라토너들의 사랑도 한껏 받았다.
코스모스 너머로 펼쳐진 정겨운 우리의 가을 들녘, 그 황금빛의 물결이 아스라하다. 코스모스와 어울린 모습이 가을의 운치를 더한다. 잠깐
차를 멈춰 들녘에 나서면, 가을 햇살에 황토빛 내음이 물씬 풍긴다.
수리민속관 농경역사
한눈에 농경문화의 상징, 벽골제
수문과 제방만 남아있는 벽골제. 우리 농경문화의 뿌리를 알리는 상징적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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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평야, 김제시에 있어서 김제 평야로도 불리는 이곳. 노령산맥의 마지막 자락인 모악산을 방패 삼고, 북으로 만경강, 남으로 동진강을 젖줄
삼아 예로부터 한반도를 먹여 살렸던 우리 농경문화의 터전이다. 그 땅이 얼마나 넓으면, 광활(廣闊)면이니, 일만 이랑이란 뜻의 만경(萬頃)리니
하는 이름이 생겼을까.
그 상징은 교과서에서 익히 들었던 벽골제에 있다. 백제 비류왕 때(서기 330년) 축조된 동양 최고(最古)이자 당대 최대의 저수지. 이를
쌓기 위해 동원된 백제 일꾼들이 짚신에 묻은 흙을 털어 모은 것이 산이 되었다는 ‘신털미산’까지 있다. 축조 당시 둘레가 140㎞. 벽골제가
마르면 나라에 흉년이 들었다고 할 만큼, 우리 농삿일의 큰 물줄기였다.
29번 국도를 타고, 김제 도심을 조금 지나면 그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 옛날의 저수지는 모두 메워져 논이나 주택지로 변했고, 지금은
장생거, 장경거라는 두 수문과 3㎞ 남짓한 제방만이 남아 있다. 명성에 비해 볼 게 없다고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런 헛헛한 마음을 벽골제
수리민속유물전시관(063-540-3225)에서 달랠 수 있다.
가래, 보습, 지게 등 잊혀져가는 우리 농기구에서부터, 농경문화의 역사까지 한 눈에 잡힌다. 우리 뿌리에 대한 근원적 향수를 확인할 수
있다. 다음달 2~5일까지 지평선 축제기간 벽골제에서 연날리기, 메뚜기잡기체험, 우마차 여행 등의 행사가 마련돼 그 향수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다.
벽골제 인근에는 조정래의 대究寗?‘아리랑’을 기념하는 아리랑 문학관이 자리잡고 있다. 곡창지대 김제가 일제 강점기 쌀 수탈과 착취의
한복판에 있었던 것도 당연했다. 소설 아리랑의 주무대가 그래서 김제였다. 죽산면에는 소설 속 일본인이자 실제 인물이었던 하시모토의 관리사무실이
그대로 남아있다.
새만금 갯벌 일몰
'장관' 갯벌과 노을
망해사 뒷편 전봉사 정상에서 바라본 새만금 갯벌의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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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만이 아니다. 만경강과 동진강이 밀고 내려온 토사는 바다에도 거대한 옥토를 만들었다. 광활한 갯벌, 그러니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바로 그 새만금 갯벌 지대다. 지평선 들녘은 갯벌과 만나고, 갯벌 반 바다 반이 어울려진 끝 모를 수평선으로 이어진다.
702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나오는 진봉 반도 끝머리 심포항. 멀리 고군산군도가 가물거리고, 누런 회색빛의 갯벌은 작열하는 햇빛에
은빛의 광채를 반사한다. 방조제 공사로 새만금 갯벌 지대가 많이 죽었다고 하지만, 이곳은 여전히 생생하다. 주민들은 예년에 비해 올해 오히려
생합(백합)이 더 많이 잡힌다고 말했다. 물 흐름이 바뀌면서 생긴 일시적 현상이겠지만, 어쩌면 전설의 땅이 될지도 모르는 그 현장에 발을 한번
담궈 보자.
심포항 뒤편에 자리잡은 전봉산 깎아지른 절벽에는 망해사가 있다. 망망대해 앞에서 깨치는 연기(緣起)의 도리다. 사찰 뒤편 솔숲을 올라가면
전봉산 정상이다. 전망대가 조성돼 있는데, 기막힌 장소다. 동으로는 들녘의 지평선이, 서로는 갯벌 반 바다 반의 수평선, 북으로는 강과 산이
어우러진 만경강 하구, 남으로는 진봉반도 끝 포구가 오묘하게 펼쳐져 있다. 그 절묘한 자리에 낙조가 떨어지면, 자연은 빛깔의 마법을 부리며
천상에 숨겨둔 환상적 경치 한 자락을 지상에 슬쩍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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