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대한민국 探訪

전설이 담긴 백제의 고도

鶴山 徐 仁 2006. 1. 15. 15:58
어떤 이가 말하기를, 부여를 찾고자 하는 사람, 특히 부소산에 오르려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나당 연합군의 말발굽에 무참히 짓밟힌 왕국의 고도(古都)로서 지금 그 때를 알려주는 '사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채 무궁무진한 '전설'만이 또렷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과 '전설' 사이에는 개연성은 있을지언정 인정할 수 없는 틈이 분명 존재합니다. 전해오는 '전설'에 온갖 역사적 지식을 동원해 아무리 그럴 듯한 해석을 내린다 해도 '사실'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더구나, 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와는 달리 역사적 기록이나 보존된 유물이 극히 적은, 퇴락한 도읍지인 부여의 경우는 전설이 지닌 사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 단장한 부소산의 입구, 사비문을 지나 부소산성을 돌고 돌아 오르는 길은 늦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산책로입니다. 평일이라 그런지 사람조차 없어 을씨년스럽기까지 합니다. 길옆으로 수북이 쌓인 낙엽들을 밟으며 그 서걱거리는 소리를 듣노라면, 부소산과 늦가을이 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한 쌍인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오르다 보면 군데군데 백제의 멸망과 함께 스러졌을 부소산성 안의 옛 건물들이 복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단장되어 있습니다. 이것들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갈 휴게소의 역할은 할지언정 스러진 백제를 생각하며 늦가을 감상에 젖어보는 데는 방해가 되었습니다. 말끔하게 단장된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건물은 그 자체로만 볼거리일 뿐, 다른 생각을 할 여유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은 빈터가 찾는 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진짜 볼거리일 때가 많습니다.



▲ 부소산성의 가운데에 자리한 군창지
ⓒ2004 서부원
무덤덤한 건물들을 지나 군창지(軍倉址)에 올랐습니다. 장방형으로 주춧돌이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빈터입니다. 꽤나 규모가 큰 건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그것이 군창지라고 안내판에 소개된 대로 군수품을 보관했던 곳이라는 근거는 없습니다. 어느 자료에 따르면 발굴 작업 당시에 곡식 더미의 흔적이 있었고, 이것은 군량미로 쓰였던 것이라고 추정한 것이 전부입니다.



아무리 관련 기록이 아무 것도 전해지지 않아 후세 사람들의 연구와 견해에 따라 지정된 것이라고는 하나, '그럴 듯한' 추정만으로 공식적인 이름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정복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짓밟힌 백제의 그림자를 보는 듯합니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명명된 것은 이곳만은 아닐 겁니다.



이내 낙화암(落花巖)에 닿았습니다. 언젠가부터 백마강과 함께 부여의 상징이 되어버린 소중한 존재입니다. 백제의 멸망과 삼천 궁녀의 죽음이라는 전설로 인해 '꽃이 떨어진 바위'라는 선정적인 이름이 생겨나 과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의 소재로 활용되었고, 일제시대에는 유행가의 가사로 불리며 국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오르내린 (전설이 아닌) '사실'이 되었습니다.



▲ 낙화암에서 내려다 본 백마강의 도도한 물결
ⓒ2004 서부원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말 즈음이라고 합니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의하면 본디 왕포암(王浦巖), 타사암(墮死巖)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떨어져 죽은 바위라는 타사암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통해, 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될 당시 도읍이었던 이곳 부여(당시 사비성)의 '비빈(妃嬪)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기록을 통해 낙화암이 백제 최후의 저항이 있었던 곳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다만, 상황이 급박했던 당시 이 바위 아래로 몸을 던져 죽어간 이들 대부분이 백제의 군사들과 백성들이었음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자취는 온데간데없이 묻힌 채 궁녀들'만'이 그랬다는 듯이, 더구나 그 '꽃'의 수가 3천이나 될 만큼 많았다는 낙화암 '전설'은 백제 멸망의 비장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과장, 왜곡된 이야기입니다.



백마강이 내려다보이는 바위의 꼭대기에 백화정(百花亭)이 예쁘게 서 있습니다. 엄혹한 식민지 시절이었던 1929년 당시의 부여군수가 세운 것이라 합니다. 3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운 것이라지만, 백마강 주변의 멋진 풍광을 편히 조망할 수 있게 한 전망대일 뿐, 오히려 울퉁불퉁한 바위와 바로 옆에 굽어 있는 소나무와의 조화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 삼천 궁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세워졌다는, 예쁘기만 한 백화정
ⓒ2004 서부원
어쩌면 그 예쁘기만 한 정자 대신에 이 고장이 낳은 대표적인 문인인 신동엽 선생의 오롯한 시비를 이곳에 세워놓았다면 참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가능하다면 그 비에 <금강>이라는 시가 새겨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비스듬히 바위에 걸터앉아 백마강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경관이지만, 다른 곳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곳만의 비장미가 스며 있습니다.



벼랑을 타고 더 내려오면 백마강물이 닿을 만한 곳에 또 하나의 전설 보따리인 고란사(皐蘭寺)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절이 들어설 만한 곳이 아닙니다. 강물과 면한 벼랑에 기댄 것도 그렇지만, 법당 건물이 북쪽을 향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이 절이 지어진 까닭이 궁금할 수밖에 없습니다. 창건에 대한 이야기가 안내판에 친절하게(?) 적혀 있습니다. 창건에 대한 분명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역시나 전설에 기댄 채 3천 궁녀의 한을 달래기 위해 지었고, 여러 차례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그저 그런 이야기뿐입니다.



▲ 낙화암 벼랑 아래 깊숙히 숨어있는 고란사 전경
ⓒ2004 서부원

낙화암이 인접해 있다는 사실, 곧 3천 궁녀의 전설을 빼고 생각하면 이곳은 무속 신앙의 기도처로 어울릴 만한 곳입니다. 거대한 바위 안쪽으로 움푹 들어간 절터의 비범한 앉음새도 그렇지만, 법당 뒤편에 신비스러운 이야기가 전해지는 약수(皐蘭井)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이곳에서만 자생한다는 고란초(皐蘭草)가 있어 더욱 그럴 듯해 보입니다. 사실, 고란사라는 절과 고란정이라는 약수터 이름은 이 고란초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고란사 약수는 물을 한 번 떠 마실수록 3년씩 젊어진다는 명수로, 회춘하려는 할아버지가 너무 많이 마셔서 어린아이가 되었다는 유명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지만, 지금은 오염 때문인지 입구 안내판에 식수로 부적합하니 가급적 끓여서 마시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오염된 명수'가 주는 묘한 느낌을 안고 왔던 길을 돌아서려니, 백마강 쪽에서 귀에 익숙한 유행가가 들려옵니다. 백마강을 왕복하는 유람선에서 들려오는 '쿵짝쿵짝' 트로트지만, 유난히 애절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그것은 부소산에 올라 낙화암과 고란사를 돌며 느낀, 스러진 백제에 대한 시린 전설들이 늦가을의 정취에 그득 담겼기 때문일 겁니다. 부여를 찾아 애틋한 마음으로 스러진 백제를 느껴볼 요량이라면 바로 지금이 적기입니다.

 

 

 


▲ 천 오백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면 이렇게 평화로운 정경이 되나봅니다
ⓒ2004 장권호
모든 것이 본질로 돌아가 안식을 취하는 11월을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만물을 거둬들이는 달'이라고 했다. 대지는 뭇 생명을 본연의 자리로 돌려보내 겸허하게 비어있고, 나무는 잎을 떨궈 땅을 덮는다. 헤아릴 수 없이 오랜 세월 동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되풀이 해온 자연의 아름다운 순환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11월을 밖에서 나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퍼 올린 것으로 나를 채우는 계절이라고 했다. '밖'이 아닌 '내 안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오늘은 천오백 년의 오랜 세월을 통해 그 자신이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 백제의 왕릉, 부여 땅 '능산리 고분군'을 찾아 길을 떠난다.



마음의 눈(心眼)으로 찾아야 할 백제 땅 부여



▲ 왕릉으로 오르는 잔디밭 길에서 만난 환상적인 초겨울 풍경입니다
ⓒ2004 장권호
26대 성왕에서 31대 의자왕까지 백제 왕조의 마지막 123년을 의탁했던 왕도 부여. 위례성에서 임시 도읍지 웅진을 거쳐 사비에 정착한 백제가 자신의 최후를 예감이라도 하듯 혼신의 힘을 다해 찬란한 꽃을 피우고 꿈결처럼 스러져 버린 비운의 땅 부여.



오늘 찾아가는 백제의 왕도 부여는 정림사지 오층석탑 외에는 지상에 이렇다 할 유물이나 유적을 남기지 못할 만큼 침략자들의 발길 아래 철저히 파괴되어 버렸다.



그래서 유홍준 교수는 답사의 초심자는 공주와 부여에 가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백제 땅 부여를 찾는 답사 길은 허망한 여로가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유 교수 표현을 빌리자면 네다바이 당한 기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부여 답사의 허망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육(肉)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心眼)'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수능 끝난 토요일 오전, 카메라와 자료집, 가벼운 옷가지를 챙겨 집을 나선다. 호남고속도로 상행선 전주 나들목을 빠져 나와 전주-군산간 국도에 접어들면서 비로소 겨울 들판의 고즈넉함이 눈에 들어온다.



낙엽이 융단처럼 덮인 초겨울 부소산 산책길



▲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가 부소산 산책의 절정을 맛볼 수 있답니다
ⓒ2004 장권호
봄부터 가을까지 주어진 소임을 성심으로 다하고 이제 긴 휴식에 들어가 다시 올 봄을 기다리는 겨울 들판의 저 편안한 여유가 부럽다. 끝없이 펼쳐진 국도 변 겨울 들판의 침묵에서 '비움의 미덕'을 본다. 금강 하구언 둑을 지나 서천을 거쳐 부여에 도착하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지났다.



오늘 둘러 볼 유적지가 모두 반경 2km 내외에 자리하고 있어 서두를 것은 없지만 시간대 배정을 잘 해야 답사의 효과를 배가시킬 수 있다. 구드레 나루터 부근 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으로 요기를 하고 근처 유스호스텔에 들러 숙소를 예약한 후 곧바로 부소산으로 향한다.



낙엽이 융단처럼 덮인 부소산 산책길엔 젊은 연인들보다는 어깨 나란히 하고 걷는 중년 부부가 유독 많이 눈에 띈다. 토요일 오후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부소산 산책길은 호젓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갈색으로 물든 졸참, 갈참, 상수리 잎들이 벚꽃처럼 날려 아내의 머리와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영일루와 백화정, 고란사로 이어지는 꿈결같이 행복한 부소산 산책은 여유롭게 잡아도 두 시간 정도면 족하다.



안온하고 부드러우며 인간적인 백제의 미학



▲ 조선 사람의 심성만이 저렇게 부드럽고 원만한 무덤을 만들 수 있다고 믿어봅니다
ⓒ2004 장권호
부소산을 내려와 천 오백 년의 빛 바랜 꿈이 금빛 잔디로 익어 가는 능산리 고분군으로 향한다. 논산에서 부여로 들어오는 초입 남향받이 야트막한 구릉에 자리한 능산리 고분군은 초겨울 저녁 햇살을 받을 때가 아름답다. 규모와 거대함에서 흔히 비교되는 신라의 왕릉이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면, 백제의 왕릉은 언제 보아도 아늑하고 부드러우며 온화하고 인간적이다.



능산리 고분군은 사비 시대 여섯 명의 왕 중 30대 무왕과 31대 의자왕을 제외한 나머지 왕들과 왕족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두 7기의 능들이 오랜 세월 동안 이무로운 이웃처럼 오순도순 자리를 잡고 있는 왕릉의 모습은 멀리서 보면 여지없이 동산에 떠오르는 반달 모양이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천 오백 년의 세월이 만들어 낸 자연의 작품이라는 말이 어울릴 듯싶다.



▲ 동 1호 고분 사신도를 그대로 재현한 천정 연꽃무늬에는 백제 미술의 특징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고 합니다
ⓒ2004 장권호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최근에 새롭게 단장한 백제고분모형관을 향한다. 그 까다로운 백제분묘 구조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시대별로 9개의 무덤 내부를 해부하듯 재현해 놓았던 예전의 모형분묘는 모두 철수하고 없다. 모두 백제문화재현단지로 옮겨갈 것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부여군 측이 실수한 것 같다.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막대한 돈을 들여가면서 첨단 시설로 꾸며 과시하는 전시행정이 결코 능사가 아님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백제고분모형관에서의 아쉬움을 달래며 고분 모형관 바로 앞에 조성해 놓은 신암리 고분으로 향한다. 발굴 당시의 실물을 그대로 옮겨 재현해 놓은 이 신암리 고분은 입구를 개방해 놓아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무덤 안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도록 했다. 백제 후기 지배층의 전형적 무덤양식인 신암리 고분은 장방형의 6각 돌방무덤이다.



▲ 백제 후기 지배층의 전형적 무덤 양식을 보여주는 신암리 고분 내부
ⓒ2004 장권호
성인 남자 둘이 나란히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폭에 높이 1.2m 가량의 무덤 속 돌방. 무덤 속이라는 선입감과는 달리 돌방 안은 음습하지도 답답하지도 않다. 지상의 시간과는 단절된 채 아주 느린 호흡의 시간이 지배하는 이 나른한 느낌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죽은 자를 위한 집이나 산 자를 위한 집이나 결국 집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으리라.



이승의 업 다하고 평화로운 안식 취하는 왕릉



신암리 고분에 이어 동1호 모형고분에 그려진 사신도까지 둘러보고 금빛 잔디밭 사이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동편 왕릉으로 향한다. 오후 4시가 넘은 시간인데 겨울 하늘엔 반달이 떠 있다. 능의 부드러운 자태와 곡선이 여지없이 하늘의 반달과 꼭 닮은꼴이다.



▲ 초겨울 하늘에 뜬 반달과 능의 모습이 여실히 닮은 모습이랍니다
ⓒ2004 장권호
능산리 고분군에서 가장 조망이 좋은 7호 고분 솔밭 위까지 올라 왕릉 전체를 조망한다. 일곱 기의 무덤들이 만들어 낸 유려한 곡선과 물결치듯 펼쳐지는 부드러운 산자락 아래 고즈넉이 잠들어 있는 겨울 들판이 현실의 공간이 아닌 천 오백 년 전 백제의 신화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초겨울 잔광이 깔리기 시작하는 왕의 유택은 절대 평화 구역이다. 묻힌 자의 욕망과 회한 그리고 음습한 주검의 냄새까지도 모두 세월의 무게 앞에 맑게 씻겨져, 이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모습을 보여 준다. 언젠가 이승에서의 업이 다하면 우리도 천오백 년 전 무덤 속 영혼처럼 저렇게 평화로운 안식을 취할 수 있을까?



▲ 능산리 고분 건너편 솔밭에 잠들어 있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묘비입니다
ⓒ2004 장권호
다섯 시면 문을 닫는다는 왕릉에 어둠이 밀려온다. 이제 일어서야 한다. 능산리 고분군 건너 편 산자락에 따뜻한 흙 가슴으로 잠들어 있는 민족시인 신동엽의 묘지까지 다녀오려면 서둘러야겠다.



백제

예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예부터 이곳은 모여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신동엽의 <금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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