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금요일 일본언론은
일제히 일본인 납북 문제의 가장 중요한 계기를 만든 요코다 메구미 양(납치당시 13세)을 1977년 니이가타에서 납치한 것은 김대중이
2000년9월 김정일 품으로 보내준 거물간첩 辛光洙라고 보도했다. 辛은 1980년에 일본인 요리사 하라타다아키를 미야자키 해안에서 납치하여
북한으로 데려갔던 인물이다. 하라타다아키는 북한에서 역시 납치되어 온 다구치 야에코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살다가 두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것이
북한측 주장이다. 다구치는 KAL 858편 폭파범 金賢姬에게 일본어를 가르쳐주었던 리은혜로 불린 여성이었다. 다구치의 존재와 사진을 확인해준
것이 김현희였다. 이 辛光洙는 확인된 것만 해도 직접 납치한 이가 하라타다아키와 요코다 메구미 두 사람이고,
地村保志 부부 납치사건에도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 자가 납치했다는 요코다 메구미양은 북한측 발표에 의하면 북한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요코다
메구미양 부모는 이를 믿지 않고 있다. 작년에 북한에서 요코다 메구미양의 유골이라고 보내준 것의 유전자감식 결과가 엉뚱한 사람의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일본인을 불행으로 몰고갔던 辛光洙보다 더 문제가 많은 인간은 辛을 김정일 품안으로
보내준 김대중이다. 요코다 메구미 부모는 辛이 북송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2000년 8월 駐日한국대사관을 방문하여 "그는 일본인 납치의 진상을
알고 있으므로 송환해주지 않았으면 한다"고 요청했었다고 한다. 辛이 중요한 것은 이 자가 일본인 납치를
실행한 범인으로 확인된 유일한 사람이란 점이었다. 일본인 납치 범죄, 즉 김정일의 反인류범죄를 증언해줄 유일한 물증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도
辛을 보내준 김대중은 김정일의 反인류범죄를 은폐하는 데 협조한 일종의 공범이다. 辛을 보내면서 이 자가 납치해갔던 하라타다아키의 송환이나
生死확인요구도 하지 않았던 김대중에게 어떻게 노벨평화상이 주어졌을까? 인간 생명의 존귀성을 모르는 이런
인간에게 주어지는 노벨평화상은 100원짜리인가? 납치범 송환, 對北비밀불법송금 5억 달러 등 사기적 숫법으로써 심사위원들을 홀린 뒤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은 그 상을 받은 날을 1주년, 2주년, 3주년, 4주년, 5주년식으로 기리고 있다. 하지만 하늘은 속지 않을 것이다. 그는
辛光洙건으로 하여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일본 경찰은 이미 辛光洙를 국제수배해놓은 상태이다. 이는 김대중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이기도 하다. 辛은 북한으로 돌아간 뒤엔 대한민국을 비방하는 선전에 앞장서고 있다. 며칠 전에는 김대중이 북한으로 보내준
60여명의 빨치산과 간첩들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피해보상 10억 달러를 요구하는 문서를 盧정권 앞으로 보냈다.
김대중은 신광수를 보내주면서 김정일이 억류하고 있는 납북어부와 국군포로를 단 한 사람도 데려오지 못했던 것은
물론이고 그런 요구 자체를 하지 않았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국에 대한 자부심이 원천적으로 결여되어 있는 이 자가 올해 북한을 또 다시
방문하여 김정일과 무슨 작당을 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가 믿는다는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여 이 자를 응징하지
않을까? 아래 관련자료는 2002년12월호 월간조선에 실렸던 것이다.
------------------------------------------------ 金賢姬와
이은혜 이은혜. 일본명은 다구치야에코(田口八重子)로서 대한항공 858편 폭파공범 金賢姬가 공작원 교육을
받을 때 일본어 선생이었다. 1989년 봄 기자는 서울 강남의 안기부 시설에서 金賢姬를 내리 5일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자는 이 인터뷰를
중심으로 하여 金賢姬의 증언과 대한항공 폭파 과정을 그해 月刊朝鮮에 석 달간 연재했다. 金賢姬는 나에게
이은혜와 관련된 이야기를 상세하게 털어놓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녀의 기억력이 상당히 정확했음을 알 수 있다. 1980년 3월 평양외국어대학
일본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金賢姬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조사부 공작원으로 소환된다. 그녀는 묘향산
골짜기 2지구 2호 초대소에 밀봉수용되어 교육을 받게 되었다. 金賢姬는 1981년 7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는 평양시 용성구역內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여기서 그녀는 이은혜라고 불리는 일본인 여자와 2년간 기거하면서 일본어 및 풍습 등을 익히는
일본인化 교육을 받았다. 金賢姬는 이은혜로부터 일본 노래도 배우고 일본식 손님대접법과 예절을 익힌다. 金賢姬는 자신이 교육을 받을 당시 이은혜가
25세 가량이었다고 말했다. 1991년에 이은혜의 정체가 일본인 다구치야에코로 밝혀졌을 때 그녀가
1955년 8월생임이 확인됨으로써 金賢姬 기억의 정확성이 입증되었다. 金賢姬가 2년간 함께 생활하면서
지켜본 이은혜는 이런 모습이었다. <키 165cm에 몸무게는 56kg 정도. 이은혜는 이혼녀인데
해변을 산책하다가 납치되어 끌려와서 공작원 교육기관에서 일본어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음. 그녀는 술을 자주 마시고 술을 따르는 데 익숙하여
일본에서 그런 업소에 종사하지 않았나 추정. 밥은 공기를 들고 젓가락만을 사용하여 먹었다. 그녀는 『조선사람은 食後에 입가심을 한 물을
마신다』고 흉을 보기도 했다. 1982년 2월 어느 날 이은혜는 이런 푸념도 했다. 『金正日 동지의 생일
만찬에 일본인 여자로서 특별히 초대되어 갔었다. 나처럼 납치돼 온 것 같은 일본인 부부를 만났는데 이 사실을 절대로 알려선 안 된다』
이은혜는 술에 취하면 멍하니 앉아서 끌려온 신세타령을 하며 자식들이 보고 싶고 일본에 가고 싶다면서
울기를 잘 했다> ■ 다구치야에코와 하라타다아키의 죽음
일본 경찰은 金賢姬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이은혜로 돌변한 피랍 일본 여성을 찾기 위해 몽타주를 만들어 전국에 돌렸다. 몇몇
유력한 실종자의 사진을 가져와 金賢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金賢姬가 『바로 이 여자이다』라고 찍어 준 사람이 다구치였다.
도쿄 가까이에 있는 사이타마縣 출신인 다구치는 金賢姬의 추측대로 음식점에 종사한 적이 있는 여성이었다. 북한 측이 최근 일본
정부 조사단에 밝힌 바에 따르면 다구치는 후쿠오카 미야자키의 아오지마 해안에서 1978년 6월29일에 납치되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본인이 공화국에 3일 정도 관광을 갔다 오고 싶다고 말하여 특수공작원이 신분을 위장하는 데 이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리고 왔다」고 일본 측에 알렸다. 다구치는 1978년 6월부터 1984년 10월까지
초대소(공작원 교육시설)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현실체험을 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설명이다. 金賢姬가 이은혜를 만났다는 장소와 시점이 일치한다.
다구치는 납치될 때가 23세였다. 그녀는 6남매 중 막내딸이었고 납치될 때 도쿄 이케부쿠로 지역
음식점에서 근무하고 있었고 이혼한 상태였다. 세 살배기 사내아이와 한 살짜리 딸을 두었다. 이번에 金正日
정권이 訪北한 고이즈미 수상 측에게 다구치야에코의 존재를 인정한 것은 사실상 金賢姬의 존재와 대한항공 폭파를 自認한 셈이다.
북한 정권은 다구치야에코가 이은혜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으나 이것이 거짓말임은 사태전개의 논리상 누구나 알 수 있다.
북한 정권이 일본 측에 통보한 자료에 따르면 다구치는 1984년 10월에 다른 피랍 일본인 하라타다아키와
결혼했다고 한다. 이 하라타다아키는 포항 출신 거물간첩 辛光洙가 납치했다. 납치장소도 다구치의 경우와 같은 규슈 미야자키 아오지마 海岸이고
음식점에서 근무한 경력도 같다. 북한 측 자료에 따르면 하라타다아키는 1986년 7월19일에 肝硬變으로 죽었고 다구치는 7월30일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고 한다. 북한 측은 그녀가 남편의 사망으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뒤 회복단계에 있던 중 황해도
麟山郡의 고갯길에서 타고 있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여 사망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은 승용차에 타고 있던
세 명이 죽고 트럭에 타고 있던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두 사람의 무덤은 麟山郡에 있었는데, 1995년 7월의 홍수로 上月里 댐이
무너지면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북한 측이 죽었다고 발표한 여덟 명의 피랍 일본인 가운데 여섯 명의
유골이 1995년 홍수로 유실되었다는 것이다. 일본 언론은 이런 북한 측의 발표를 믿지 않고 있다. 북한
측은 다구치를 납치한 이유를 신분위장용이라 주장했으나 신분위장이 되려면 연고자나 직계가족이 없어야 하는데 다구치는 6남매 중 막내였고 이혼한
상태에서 두 자녀를 두고 있었다. 무덤이 유실되어 유골을 발견할 수 없었다는 북측 주장에 대해서도 일본
언론과 對南 공작원 출신 탈북자 安明進씨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공작기관이 피랍 일본인에 대한 관리를 엄격하게 하는데 그런 식으로 죽도록
방치할 이유가 없다면서 살아 있든지 죽였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본 정부 측에서는
「다구치씨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곳은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곳인데 충돌사고라니?」라면서 의문을 표시하기도 했다.
■「金正日이 일본인 납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는 장봉림 장군은 李韓永 암살 실패로 숙청되었다」
金正日 정권은 일본인 납치를 지휘한 책임자로서 장봉림(사형)과 김성철(15년형)을 처벌했다고 밝혔는데 이
주장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해 간 辛光洙는 안기부에 붙들렸을 때 『金正日의 직접 지시를 받아
납치했다』고 자백했다. 일본인 납치 같은 중대사를 결정하고 지시할 수 있는 사람은 金正日뿐이란 것은 북한 상식에 속한다. 더구나 지난 9월 초
辛光洙는 판문점 북쪽 지역에 나타나 북한 귀환 2주년 행사에서 金正日에 아부하는 발언을 했었다. 장봉림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정보가 있다. 지난해 초 月刊朝鮮 앞으로 北京에서 팩시밀리 다섯 장이 도착했다. 月刊朝鮮 禹鍾昌 기자는 「탈북한 북한 로열
패밀리의 최측근」이란 사람이 보낸 이 정보를 확인하여 2001년 2월호에 「李韓永(金正日의 처조카) 살해는 김정남(金正日의 장남) 지시를 받은
李昌善(사회문화부장)이 지휘했다」는 題下의 추적 기사를 썼다. 취재과정에서 이 팩시밀리 내용은 상당히 신빙성이 높은 提報임이 밝혀졌다.
팩스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金正日의 처조카인 李韓永이
手記 「대동강 로열 패밀리 서울 잠행 14년」을 펴냈을 때 김정남은 자기의 해외 채널을 이용하여 金正日보다 먼저 책을 입수하였다고 한다.
김정남은 그 후 인민무력부 문화연락실(북한군부內의 對南공작 부서) 장봉림 장군을 만나 李韓永을 제거하라는 지시를 준다. 그 후 장봉림이 김정남의
명령을 집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김정남은 아버지 몰래 같은 지시를 중앙당 사회문화부 李昌善에게 주었으며, 그 결과 사회문화부에서 「새끼
장군님」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장봉림은, 김정남이 인민군 보위사령부 김장성 부사령관에게 지시하여 간첩혐의로 체포, 숙청해 버렸다는 說이
있다> DJ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 다구치와 결혼하여 함께
살았다는 하라타다아키는 남한 출신 辛光洙가 1985년 우리 안기부에 검거되어 자신의 여러 가지 범행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이다.
납치했다는 사람(辛光洙)과 납치된 사람(하라)이 확인되고 납치범이 자백한 유일한 경우이다. 앞으로 국제법
위반이나 인류에 反하는 범죄 혐의로 金正日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재판이 제기될 경우 하라타다아키-辛光洙 관계는 범죄의 立證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
건은 金正日의 개인적인 安危와도 직결된다. 더구나 辛光洙는 金正日을 만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지시를 직접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 측도 하라타다아키의 자료를 일본 측으로 통보하면서 「辛光洙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후 법적인 절차가 생기면
제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91년 6월4일에 본 기자는 안기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전 교도소에
가서 무기징역형을 받아 수감되어 있던 辛光洙를 면회하려고 한 적이 있다. 辛光洙는 교도관을 통해서 면회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안기부 및
교도소 직원은 本人의 의사가 그러하다면 강제로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있는 일본인
납치범이자 간첩인 그가 민주화 시대에 기본적 인권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金大中 정부는 일본 정부와 언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 辛光洙를 2000년 9월에 다른 남파간첩 및 빨치산 출신 長期囚와 함께
북한으로 보냈다. 金大中 정부는 그러면서도 辛光洙가 납치해 간 하라타다아키의 生死 확인 등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여러 문명국가 중 납치범을
돌려주면서 그가 납치해 간 사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은 정부는 아마도 金大中 정부가 유일할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이 辛光洙를 북한으로 보내기 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정부에 再考를 요청한 사실은 없다. 일본정부는
조사요원을 보내 辛光洙를 면담하고 싶다는 요청은 했으나 한국 정부는 辛光洙가 그런 조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고 辛光洙의 공범만
면담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고 한다. 辛光洙의 인권을 이토록 생각해 준 金大中 정권은 왜 이 자가 납치해
간 일본인의 인권과 우방국의 처지는 무시했을까. 우리를 압제했던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랬다면 이는 인종차별주의이다. 金正日이 두려워 그랬다면 이는
반역적 굴종이다. 지난 여름 일본 경찰은 하라타다아키 납치와 관련하여 우선 辛光洙를 여권법 위반혐의로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하여 국제수배하면서 북한당국에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金正日도 이제 이 문제를 적당히 넘길 수 없게 된 것이다.
金正日을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는 결정적 物證을 북한에 보내 준 金大中 대통령의 책임은 무엇인가. 범인
은닉인가? 일본 경찰이 새삼스럽게 辛光洙를 국제수배한 것은 그 성격상 金大中 대통령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가 아닐까. 金大中 대통령이 놓아서
보내 준 辛光洙란 인간은 무슨 짓을 했나? 1985년 6월28일자 안기부 수사 발표자료에 나타난 辛光洙의
행적을 소개한다. ■ 1. 사건 개요 ■
○國家安全企劃部는 1973년 7월2일부터 12년 동안 여섯 차례 일본에 침투하여 일본을 거점으로 對南 간첩활동을 해왔던 北傀 거물간첩
辛光洙(신광수ㆍ56세ㆍ북괴 노동당 소속)와 同 辛光洙에게 포섭된 후 25회에 걸쳐 국내를 출입하면서 북괴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해온 在日교포
간첩 金吉旭(김길욱ㆍ57세ㆍ오사카 소재 의류소매상), 方元正(방원정ㆍ50세ㆍ도쿄 소재 「뉴코리안」 주점 자영) 등 세 명의 간첩을 검거하여 서울
지검에 송치하고 이들에게 포섭되어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해오다가 자수한 예비역 장교 李成洙(이성수ㆍ47세ㆍY정밀주식회사 부사장)는 자신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자수한 情狀(정상)을 참작, 관용을 베풀어 훈방 처리. ▲ 1. 간첩
주범 辛光洙(56세ㆍ북괴 노동당 소속) (1) 간첩 선발경위 및 교육사항
○간첩 辛光洙는 일본 靜岡縣(시즈오카현)에서 출생, 8ㆍ15 광복 후 귀국하여 포항중학교에 재학시 소위 「2ㆍ7 구국투쟁」에
가담하여, 좌익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도피하여 보성중학교 4년에 편입 수학 중에 6ㆍ25사변이 일어나자 북괴군에 자진입대, 월북한 자로서
○1954년 10월~1960년 10월(6년)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工大 기계학부에 유학하고 북괴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원으로 종사하다가 ○1971년 2월 북괴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의 당시 對南공작기관인 198부대 對南간첩요원으로 선발되어 2년5개월간 청진초대소에서 간첩 밀봉교육을 받음.
(2) 1차 일본 침투 및 임무활동사항 ○198부대장
임창석으로부터 일본에 침투 후 ―북송 연고 교포를 포섭하여, 在日 지하공작 토대를 구축할 것
―혁명역량이 있는 동조자를 포섭하여 입북시킬 것 ―남한 및 일본의
각종 정보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할 것 등의 공작지령과 무전기(A-1 송수신기), 亂數암호표, 미화 2만 달러 등의 공작금품을 받고
○1973년 7월2일 북괴 공작선편으로 원산항을 출발하여, 일본 이시카와현 후게시군 사루야마(石川縣
鳳至郡 猿山) 등대 옆 해안으로 침투한 후 ―在北시 포섭대상으로 선정한 북송연고 재일교포인 오사카시
이쿠노구 모모다니초(大阪市 生野區 桃谷町)에 거주하는 洪庚生(홍경생ㆍ65세ㆍ여)을 찾아가 ―1961년에
북송되어 당시 황해북도 사리원 도시시설사업소 기사로 있던 그녀의 외아들 이진배(45세)의 자필서신과 사진을 제시하고
―만약 협조치 않으면 在北中인 이진배의 신상에 좋지 않다고 협박, 포섭하여 洪庚生의 집에 은신거점을 마련하고
○1973년 7월 하순 洪庚生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김차훈(51세)의 집으로 은거지를 옮긴 후
―인근 지역 소재 비닐신발 부품공장의 배달원으로 1차 위장취업하여
―同 공장 공원인 濟州 출신 密航 도일자 최모(35세), 박모(40세) 등을 포섭 기도하고 ○1973년
9월 하순에는 김차훈의 주선으로 그의 장인 殷武岩(은무암ㆍ79세)이 관리 중인 나가노현 치이사가타군 다케이시무라(長野縣 小縣郡 武石村) 관광지의
有料도로 통행료 징수원으로 위장 전직한 후 ―1960년 1월에 북송되어, 신의주 화학섬유공장 지사로 있는
「殷」의 차남 殷曜安(은요안ㆍ43세)의 신상에 해로울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로 殷武岩을 포섭한 후
―1974년 6월 在南 同生인 殷某(72세)를 유인 도일케 하여 포섭을 기도하였으며 ○1976년 2월에는
조총련 교포 殷正雄(은정웅·55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교포인 高基元(고기원ㆍ52세)을
포섭하고 ―高基元을 통하여 또다시 前 조총련 오사카 초급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신병으로 퇴직 후
오사카에서 의류소매상을 하고 있는 金吉旭(김길욱·57세)에게 접근하여 ―동인의 在北 처남
이재희(37세)의 신상을 위협하는 등 동일한 수법으로 포섭하여 ㆍ民團에 위장 전향하여 남한에 자유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것 ㆍ남한에 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포섭, 지하망을 구축할 것 등 간첩활동을 지시.
동거녀 朴春仙의 증언 <편집자 注:
1973년 무렵 辛光洙와 동거했던 在日 동포 여인이 있다. 朴春仙씨는 도쿄 메구로에 살고 있었다.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家出한 상태였다. 知人은 辛光洙를 사카모토(坂本)라고 그녀에게 소개하면서 『북해도 사람인데 도쿄에서 장사를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2층 가옥에서 사카모토는 2층, 1층에는 朴씨 가족 네 명이 살았다. 집세는 사카모토가 내고 식사와 세탁은 朴씨가 맡았다.
朴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카모토는 2층으로 아이들을 불러 잘 놀아주었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발음이 좋았다. 외국어를 몇 개나 아느냐고 물었더니 영어, 일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중국어를 안다고 했다. 사카모토는 거의
외출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외출할 때는 책방에 자주 갔다. 그럴 때는 꼭 朴씨를 데리고 가곤 했다. 1976년 사카모토는 朴씨를
규슈 미야자키 해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가방에 카메라, 라디오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朴씨는 처음으로
이 사람이 간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아오지마 해안에 도착한 그는 돌연 헤드폰을 쓰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사카모토는 朴씨를 먼저 도쿄로 돌려보낸 뒤 며칠 뒤 나타났다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金正日로부터 직접 일본인 납치 지시 받다 (3) 북괴 복귀 후 再침투 활동
○(辛光洙)는 1976년 9월12일 북괴의 소환에 따라 일시 복귀하게 되자 간첩 金吉旭에게
―앞으로 북괴 공작원의 접선연락이 있을 테니 그 지시에 따라 입북하라고 지시하고
―간첩 金吉旭의 안내로 도야마현 나메리가와시 하야츠키가와(富山縣 滑川市 早月川) 하류 해안에 도착, 대기 중이던 북괴공작선과
접선 복귀하였으며 ○북괴에 소환된 간첩 辛光洙는 당시 북괴 對南공작 담당비서인 金仲麟(김중린)과 조사부장
李完基(이완기)에게 그간의 在日활동 상황을 보고한 후 ―평양용성5호 초대소 및 순안4호 초대소에 수용,
3년7개월간 재차 간첩 밀봉교육을 받고 ―金正日의 3호 청사 집무실에서 金正日로부터 『일본인을 납치하여,
北으로 데려오고 일본인의 신원사항을 완전히 익혀 일본인으로 완전변신한 후 在日 對南工作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암호해독용 책자 2권, 暗書用 시약 1봉, 미화 1만 달러 등의 공작 금품을 받아
―1980년 4월 남포항에서 북괴공작선으로 출발, 일본 미야자키현 휴가시(宮崎縣 日向市) 해안으로 2차 침투.
다시 나타난 사나이 <편집자 注: 사카모토가 사라진 지 한
달쯤 뒤 朴春仙씨 앞으로 평양에 있는 주소지로부터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사카모토로부터 「맡겨 둔 400만 엔을 돌려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朴씨는 그 돈을 친구한테 맡겼는데 친구가 도박으로 다 날려버린 뒤였다. 朴씨는 이런 사정을 적어서 평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오빠에게 보냈다. 사카모토를 만나서 설명을 잘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후 朴春仙씨의 여동생이 평양으로 가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가 사카모토, 즉 辛光洙를 만나려고 하다가 북한 경찰에 발각되어 미행당하는 등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카모토는 1981년 다시
朴春仙씨를 찾아왔다. 그때는 하라타다아키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4)
일본인 강제 납북 수행 ○2차 일본에 침투한 간첩 辛光洙는
―在日간첩망 殷正雄의 주선으로 도쿄도 이다바시구 오오야마초(東京都 板橋區 大山町)에 잠복하면서 ―조총련
오사카 商工會 회장 李吉柄(73세)에게 접근하여, 在北 중인 그의 장남 이석행(45세), 차남 이찬행(42세) 등의 사진과 자필서신 등을
제시하고 ―만약 협조치 않으면 北에 있는 아들들의 신상이 해롭게 된다고 협박하여 포섭한 후 同 李吉柄과
간첩 金吉旭에게 ―미혼자로 연고가족이 없는 자 ―여권을 한 번도
발급받지 않아, 인물사진을 제출한 적이 없고 전과도 없어 지문날인한 사실이 없는 자 ―개인 금전거래나
은행거래가 없는 자등 장기간 행방불명되더라도 노출될 염려가 없고 일본에서 안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45~50세 가량의 일본인을 물색해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으며 ○1980년 6월 李吉柄으로부터 ―『조총련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 李三俊(54세)이 자영하고 있는 중국 요리집 寶海樓의 요리사 「하라타다아키」(原勅晁)라는 일본인이 적격자』라는 보고를 받고
―李吉柄을 앞세워 동 상공회 이사장 李三俊 등과 함께 별장으로 휴양 가자는 구실로 「하라타다아키」를
아오지마(靑島) 해안까지 유인토록 모의한 후 ―북괴 공작기지와 무전연락을 통하여 미리 계획된 접선일시와
장소에 북괴공작선을 침투하도록 약정한 후 ―1980년 6월 중순 李吉柄, 李三俊, 金吉旭 등과 합세하여
「하라타다아키」를 미야자키현 아오지마(宮崎縣 靑島) 해수욕장 어린이놀이터 남쪽 끝 도랑으로 유인하고
―그곳에 事前 침투하여 대기 중이던 북괴 공작원 4명과 합세하여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은 뒤 자루에 넣어 8인승 고무보트로 500m 해상에
대기 중이던 북괴 공작선에 싣고 간첩 辛光洙가 직접 대동 납북. (5) 3차 침투 후
납치된 일본인으로 변신 암약 ○북괴로 복귀한 간첩 辛光洙는 일본인 「하라타다아키」를 평양 근교 동북리
3호 초대소에 5개월간 밀봉수용하면서, 金正日의 지시대로 「하라타다아키」의 인적사항, 學經歷, 가족사항, 거주이동사항, 과거생활, 그의 직업인
중화요리법 등 同人의 신상자료를 완전파악, 숙지한 후 자기 자신을 「하라타다아키」로 완전변신하였으며
○북괴 조사부 부부장 姜海龍(강해룡)으로부터 ―매우 힘들게 해결한 합법신분이니 사회적, 법적으로
위장신분을 더욱 공고히 하고 ―앞으로는 빈틈없이 일본인으로 행세하여 在日工作을 강화하라는 공작지령과
暗書시약, 미화 1만 달러 등의 공작금품을 받고 ○1980년 11월26일 남포항에서 북괴 공작선으로
출발, 「하라타다아키」를 납치했던 아오지마(靑島) 해안 해수욕장으로 세 번째 침투.
金正日로부터 직접 對南 공작 지령 (6) 3차 북괴 복귀 및 4차 침투 활동
○(辛光洙는)1982년 3월23일 북괴의 소환지시가 있자 일본인 하라타다아키 명의로 된 위조여권을 이용, 스위스, 파리,
모스크바 등을 경유하여 세 번째 북괴로 복귀하고 ○북괴에 복귀한 후 간첩 辛光洙는 평양 동북리 초대소에
3개월간 수용, 정치사상학습 등 사상무장교육을 다시 받고 1982년 4월15일 金日成 70주년 생일축하 행사에 참석 「국기훈장1급」을 수여받은
후 ○金正日로부터 직접 ―일본인 신분을 이용하여 동남아 거점을
조속히 확보할 것 ―일본인 납치사실이 노출되면 국제문제로 비화될 것이니 비밀을 철저히 고수할 것
―在日 下部網을 적극 활용하여 對南 침투 공작을 적극 전개할 것 등의 工作지령과 미화 1만 달러의
공작금을 받아 1982년 5월3일 평양을 출발하여 복귀 루트의 逆順으로 일본에 네 번째 침투.
<편집자 注: 辛光洙가 체포되고 2년이 지난 1987년 대한항공기 폭파범 金賢姬는 안기부에서 자신의 공작원 교육과정을 설명했다. 그녀는
1982년 3월 중순부터 약 40일간 교육장소인 평양 동북리 2층 3호 초대소에서 동북리 10호 초대소로 옮겨, 수용 교육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안기부는 2년 전 辛光洙의 진술조서에서 辛이 이 기간에 교육을 받은 곳이 바로 金賢姬가 쓰던 동북리 2층
3호실임을 확인하여 金賢姬가 북한 공작원임을 입증하는 여러 증거 중 하나로 활용했다> ○일본으로
돌아온 이후 일본 간첩 辛光洙는 1982년 6월 초순 포섭한 李東哲을 일본 도쿄도 다이도구 우에노(東京都 台東區 上野) 소재 다카라 호텔로
소환, 3일간 투숙시키면서 ―북괴 A-3수신요령, 암호사용방법, 暗書작성 및 보고방법 등 간첩교육을
시키고 ―A-3통신제원, 암호사용 설명서, 암호조립 및 해독용 책자인 모리오가이(森鷗外) 저 「청년」,
暗書 작성용 화학약품, 소형 라디오 1대 등 통신장비를 준 후 ―民團의 신임을 획득하여 民團 중앙본부
간부로 진출 후 民團 내부의 정보자료를 수집 보고할 것 ―在南 친척, 친구 중 포섭 가능한 대상인물을
선정 보고할 것 등 지시를 하고 ○은거지로 도쿄도 도시마구 가나메초(東京都 豊島區 要町)에서 간첩
方元正으로부터 ―김포공항의 對空砲 진지 배치 상황 ―현대조선소의
위치 및 도크 규모 ―학생들의 對정부 시위방향 등 간첩 方이
남한에 위장침투하여 수집한 각종 정보를 보고받고, 3일간 A-2지령 수신방법, 암호전문 해독요령, 점자식 化學暗書法 등을 再교육.
○이어 간첩 辛光洙는 方元正에게 ―일본인 하라타다아키로 변신하고
있으나 호적상 미혼으로 되어 있어 신변의 위험이 있으니 일본에 귀화한 여자를 물색 보고하라고 지시하고
―方元正이 경영하고 있는 도쿄도 도시마구 히가시 이케부쿠로(東京都 豊島區 東池袋) 소재 뉴코리안 주점을 在日 공작 거점으로 적극 이용토록 하는
한편 ○1982년 7월부터 1983년 5월 하순 북괴로 복귀할 때까지
―도쿄도 시나가와구 고단다에키마에(東京都 品川區 五反田驛前)에 있는 한국클럽 미란의 회계원
―군마현 다카사키시 도이야마치(群馬縣 高崎市 問屋町) 소재 파칭코점인 三光會館 기계수리공
―군마현 다카사키시 미나미오오루이(群馬縣 高崎市 南大類)에 있는 파칭코점 빠루코의 기계수리공 등의 위장직업을 갖고 간첩활동.
(7) 4차 북괴 복귀 및 5차 침투 활동
○또한 간첩 辛光洙는 1983년 5월26일 북괴의 4차 복귀지령에 따라 하라타다아키 명의로 된 여권을 이용하여 나리타(成田) 공항을 출발,
스위스 취리히, 비엔나, 모스크바를 경유 북괴로 다시 복귀한 후 東北里 招待所에 5개월간 머물면서
―정치사상학습, 간첩통신 등에 관한 간첩교육을 다시 받고 ―1983년 9월8일 평양시 모란봉 구역
비파동에 있는 「2ㆍ8 문화회관」에서 북괴정권 35돌 기념식(9ㆍ9절)에 참석하여 對南 공작 공로 「기념훈장」을 받음.
○이어 간첩 辛光洙는 북괴 조사부장 임창석으로부터 ―1982년 2월 方元正이
공작검열차 도일한 북괴 조사부 부부장 姜海龍에게 포섭대상자로 보고한 예비역 장교 李成洙를 완전 포섭할 것
―李東哲을 민단 중앙간부로 속히 침투시킨 후 대동 복귀할 것 ―동남아 지역에 새로운 공작거점을 구축할 것
―남한과 일본의 각종 정보를 수집 보고할 것 등의 공작지령과 미화 1만 달러의 공작금품을 받아 1983년
11월8일 평양을 출발하여 일본으로 5차 침투. ○그 후 간첩 辛光洙는 1983년 11월 중순 方元正을
만나 李成洙 포섭상황과 위장거점 뉴코리안의 운영실태 등 그간의 간첩활동 상황을 보고받고 ―李成洙 포섭에
전력을 다하라 ―내가 위장직업을 가져야 하니 주선하라는 등의 지시를 하고
―方의 주선으로 도시마구 히가시 이케부쿠로(豊島區 東池袋)로 은거지를 옮겼으며
○1983년 12월 초순 간첩 方元正의 자택에서 ―간첩 方에게 『자금을 적극 지원하겠으니 李成洙를 완전
포섭하라』고 지시한 후 ―李成洙에 대한 자금 지원계획과 李東哲의 民團 침투 및 入北준비 상황 등을 북괴에
보고하였으며(下略) (8) 5차 북괴 복귀 및 6차 침투 활동
○간첩 辛光洙는 1984년 3월14일 북괴의 5차 복귀 지시에 따라 東京 나리타(成田) 공항을 출발, 홍콩, 北京을 경유하여
북괴로 복귀한 후 東北里 초대소에서 간첩교육을 또 다시 받고 ―동년 3월 중순부터 하순경 在日 간첩
李東哲 입북기간 및 동년 8월 초순부터 하순간 方元正 입북기간 중 이들 在日 간첩들의 간첩밀봉 교육에 참여하여 공작지도책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한편 ○북괴 조사부장 임창석으로부터 ―40주년 8ㆍ15
행사를 앞두고 제3국에서 李成洙와 조사부장이 직접 접선할 수 있도록 조직할 것 ―東南亞 거점을 구축하여
젊은 공작원 4~5명이 일본에 침투할 수 있도록 양성할 것 등의 공작지령과 ―자살용 독약(캡슐이 터질시
기체화, 인근 인명살상)과 미화 2만 달러(1만 달러는 方元正 공작금) 등의 공작 금품을 받아 1984년 10월23일 평양을 출발하여 北京,
카라치, 방콕 등을 경유, 일본에 여섯번째로 침투. ○1984년 10월26일 간첩 辛光洙는 간첩 方元正과
만나 공작금 1만 달러를 전달하는 한편 李成洙와 북괴 조사부장과의 제3국 접선 주선을 再지시하고 李東哲과 만나 민단 침투를 독촉한 후 은거지를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나카구 오우기초(神奈川縣 橫濱市 中區 扇町)에 있는 간이숙박소 「하야시(林)」 회관 519호로 이전 잠복하다가
○1984년 11월 초순 공작검열차 도일하여 긴자(銀座) 第一호텔 6층에 투숙 중이던 북괴
공작검열담당과장 김봉록(조사부 4과장)을 方元正과 함께 찾아가 ―위장거점인 뉴코리안의 경영실태
―李成洙 포섭공작상황 ―方元正의 여권 再발급 추진상황(기존
소지여권은 경유국 입국 스탬프 날인으로 발각될 것을 우려 再발급 받음) ―在日 간첩 李東哲의 활동상황
등을 보고하고 ○검열담당과장 김봉록으로부터 ―제3국에서 북괴
조사부장과 李成洙의 접촉이 차질 없이 실현되도록 조직할 것 ―동남아 지역에 새로운 공작거점을 꾸릴 것
등의 공작지령을 재차 독촉받은 후 ○동남아 거점 구축을 위한 자금지원 대상자를 물색하기 위하여
―1984년 11월 초순 조총련 상공인 한성익(55세)을 접촉하고, 북송 후 金策市
城津製鋼所(성진제강소)의 기사로 있는 그의 막내동생 한찬익(46세)의 사진과 편지를 제시하며 자금헌납 강요
○1985년 1월 하순에는 在日 간첩 方元正을 접선하여 ―李成洙로부터 입수한
「팀스피리트 85」 훈련사항을 받아 북괴에 보고하고 ―1985년 2월 초순 在日간첩 한성익을 접선, 일본
방위청, 외무성, 내각 조사실 등에서 非공개 발간한 ▲공동통신자료 ▲국제정세자료 ▲방위안테나 ▲해외 정치 경제정보 ▲해외논설 속보 등 정보자료를
입수하여 당시 요코하마항에 寄港中이던 만경봉호 정치부 선장을 통해 북괴에 보고. (9) 국내 침투활동 중
피검 ○1985년 2월8일 方元正으로부터 ―『李成洙가 지득하고
있는 각종 군사자료 등 군사기밀을 계속 수집 보고하라』는 북괴의 독촉지시를 받은 사실과 ―李成洙에게
「85 팀스피리트」 훈련사항을 수집한 노고를 치하하라는 북괴의 전문지령이 있었던 사실 ―위장거점인
뉴코리안 주점에 와 있던 한국 연예인들이 귀국한 바, 이들과 친히 지내던 일본인들이 남한에 가려고 하니 이들과 함께 입국하면 의심을 사지 않을
것이라는 對南침투계획 등의 보고를 받고 자신도 간첩 方과 함께 한국에 침투해 在南조직망을 확인 검열하겠다고 북괴에 보고한 후
○1985년 2월24일 方元正을 대동하고 대한항공편으로 나리타(成田) 공항을 출발, 김포공항으로 침투하여 李成洙와 만나
북괴의 통일 3大 원칙, 5大 방침, 고려연방제 시정방침 10大 항목 등을 선전 교양하는 등 암약하다가 피검.
■ 노벨상 수상자의 人間觀 朴春仙씨는
1985년 6월28일 辛光洙가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일본 신문에서 보고 비로소 자신과 동거한 사람의 本名이 辛光洙임을 알았다고 한다. 그 두 달
뒤 평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자신의 오빠가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朴씨는 오빠의 죽음과 辛光洙의 체포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朴씨는 辛光洙가 2000년 9월에 북한으로 송환되기 직전에 서울로 와서 만나려고 했으나
辛光洙가 달아나는 바람에 성사되지 않았다. 辛光洙는 1심에선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수사에 협조한 것이 감안되어 그 뒤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고 刑이
확정되었다. 1999년 12월 金大中 정부에 의해 석방된 그는 북한으로 살아서 돌아갔다. 그가 납치한
일본인 하라타다아키는 시체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북한 측의 주장이다. 위의 안기부 발표 자료에서
유의해 볼 대목은 辛光洙가 구체적인 일본인 납치 지령을, 金正日이 자신을 만난 자리에서 직접 내렸다고 진술한 점이다.
金正日은 이 점 때문에도 辛光洙를 한국에서 데려오고 싶었을 것이다. 金正日은, 언젠가 日北 수교 회담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때
일본이 한국 정부에 납치 자백범 辛의 신병 인도를 요구할 것을 想定하여 이 物證을 金大中 대통령의 양해下에 데리고 간 것인가. 만약 辛光洙가
한국에 살고 있었더라면 납치된 일본인 여덟 명의 사망건(북측 주장)으로 격앙된 일본 여론과 정부는 辛光洙의 신병인도를 우리 정부에 요구했을
것이고 이는 金正日을 곤경에 빠지게 만들었을 것이다. 일본인 납치자들의 존재가 金正日에 의하여 확인되고
생존자들이 귀국하여 그 실체를 드러냄으로써 일본 국민들은 自責과 분노에 휩싸였다. 좀처럼 흥분하지 않는 일본 여론의 이런 격앙은 日北 수교
회담에 제동을 걸고 있고 「악마적 金正日 정권」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방향으로 돌고 있다. 辛光洙의 예에서 보듯이 조총련은 북한 공작원과 협력하여
일본인을 납치하는 데 助演을 했다. 이런 조총련을 수사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고 조총련에 대한 비판과 시위가 잇따르고 있다.
對北·對日 공작기지였던 조총련은 1년에 수억 달러를 金正日 정권에 제공하는 현금기지이기도 했다. 작년
조총련의 자금원에 대한 일본 정부의 수사에 이어 납치자 문제가 확인됨으로써 조총련은 더욱 고립되어 갈 것이다. 한때 최대의 외화조달 창구였던
조총련을 잃는다는 것은 金正日 정권이 한 팔을 잃는 것과 같은 전략적 충격이다. 냉정하던 일본 언론도
요사이는 金正日 정권을 「악마적」이라고 지칭하기 시작했다. 전쟁, 테러, 암살, 폭파, 대량살상 무기 개발, 학살을 서슴지 않아 온
金日成·金正日의 정체를 일본인들도 알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은 추세대로 가면 곧 세계의 여론이 金正日을 「죽일 놈」으로 단정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 가면 누가 金正日의 눈치를 보면서 아부하고 굴종하면서 조국을 반역했는지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