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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의 비밀아지트 `독립문 연구실`의 정체 - 남한혁명론 등 집중 연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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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석 NSC 사무처장은 1958년생으로 성균관대 행정학과 78학번이다. 출생지는 경기도 남양주. 이 지역에서 민정당 국회의원을 지낸 李聖浩씨가 그의 삼촌이다. 재학 중 고시를 통과 못한 그는 1984년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에 취직, 평범한 직장인의 길을 걷다가 스물아홉의 나이에 성균관대 대학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행정학에서 정치외교학으로 전공을 바꾸면서, 석사 2년차이던 1988년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하면서 이종석의 인생은 진로를 바꾸게 된다. ‘한국정치연구회’는 李壽仁(사망ㆍ前 영남대 교수, 평민당 국회의원), 崔章集, 孫浩哲(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孫鶴圭(前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現 경기지사) 등 이른바 진보 성향의 교수들이 보수 성향의 ‘한국정치학회’에 대항해서 1987년에 만들었다.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하고, 서구의 정치이론을 답습하는 기존의 연구 방식에서 탈피해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문제를 연구하겠다는 의도에서 ‘한국정치연구회’가 태동했다. 한국정치연구회는 국제정치·한국정치사·정치사상·정치이론·북한정치 연구 등 5개 분야로 나눠 연구를 진행했다. 이종석은 북한정치 연구팀 멤버였다. 그는 한국정치연구회와는 별도로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인근에 사무실을 얻어 젊은 석ㆍ박사들과 함께 북한 原典 공부를 시작했다. 이종석 팀은 매주 혹은 2주일에 한번씩 이 사무실에 모여 ‘조선노동당의 역사’ ‘金日成 著作 선집’, 金日成의 항일 빨치산 활동을 영웅시한 ‘항일무장투쟁사’등 북한에서 펴낸 原典을 갖고 북한을 공부했다. 1950년대 중반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전향한 것으로 알려진, ‘실록 南勞黨’의 저자 金南植씨가 이 사무실에서 젊은 석ㆍ박사들과 어울리는 장면이 노출되면서 공안당국은 이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들 역시 공안당국의 눈을 의식해서인지, 사무실을 수시로 옮겼으나 독립문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공안당국은 정체불명의 이 사무실에 대해 비밀 아지트 소재지를 근거로 ‘독립문 연구실’이란 이름을 붙였다.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이종석 파일’에 따르면, <이종석은 1988년 8월 정치학계의 좌익 성향 단체인 ‘한국정치연구회’에 가입, 1989년 3월 丁海龜 등 친북 인물 3명과 함께 ‘독립문 연구실’이란 비밀 아지트를 개설하고 親北 인물 金南植 등을 통해 북한 原典을 입수, 주체사상ㆍ남한혁명론ㆍ金日成의 抗日무장투쟁 등에 관해 집중 연구하여 대학 學報, 잡지 등을 통해 사회 각 분야에 親北 이념을 전파 확산>했다는 것이다. 이 파일에 따르면 <이종석은 1990년 2월 연구 결과를 종합한 ‘북한정치론’을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金日成은 抗日 무장투쟁의 최고 지도자였으며 6ㆍ25는 남침인지 북침인지 알 수 없다’는 利敵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이종석 사무차장의 석사학위 논문은 ‘북한 지도집단의 抗日 무장투쟁의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연구’이다. 북한정치를 연구한 한 교수는 “보천보 전투를 비롯한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운동은 북한의 일방적 주장일 뿐 학계에서도 검증되지 않은 분야인데, 이종석씨는 북한의 자료를 검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인용, 소개했다”고 지적했다. 이종석씨는 2년 만에 석사를, 4년 만에 박사를 끝냈다. 석사 학위 취득 후 경희대, 부산대, 서강대, 성균관대학에서 시간강사로 전전하던 그는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 되었다. 연구위원이 되는 과정에서 당시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이었던 林東源 前 국가정보원장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파일은 말한다 그의 正體를 이 후의 행적에 대해 정부 기관에서 작성한 ‘이종석 파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1994년 9월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임용된 후에는 노골적인 친북성향을 은폐하고 兩非論 등 교묘한 논리를 동원, 한겨레신문 등을 통해 정부 대북정책 비판, 북한 대남정책 비호, 국가보안법 철폐 요구 등 불순활동을 지속하면서 연구소의 대외적 공신력을 이용, 북한 학계 권위자로 행세하면서 1995년, 1997년 2회에 걸쳐 北京 ‘남북학술회의’에 참가하고 방송 출연 등 활동 반경을 확대해 왔음> 이 파일에는 이종석씨가 1988년 이후 대학 學報 등에 기고한 50여 건의 글과 강연회 발언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의 거주 이전ㆍ여행 자유 제한은 사회주의 특성과 남북 군사 대치 하에서 택한 방어적 조치이다.(1990년 2월호 사상문화운동)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은 反北 이데올로기를 타파하고 자주적인 통일운동을 촉진시키는 범국민운동이다.(1990년 역사비평 가을호) ◆통일의 제1요건은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자주성 확립과 평등의 존중이다. 주한미군이 북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라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변명이다.(1990년 3월 성균관대 學報) ◆문민정부는 反共, 反北에 의존했던 냉전 수구세력과 결별해야 하며, 정권 안보 수단으로 이용되어온 국가보안법 등 구시대적 反共 反北 관계 법안은 폐기해야 한다.(1994년 실천문학 봄호) ◆金正日 정권은 매우 안정적 구조를 띠고 있으며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金日成 시대보다 더 적극적이다.(1995년 2월 金正日 정권의 전망과 우리의 대응방향) 북한 노동당 비서 黃長燁씨는 자신의 訪美를 반대한 이종석씨 글에 대해 비판을 가한 뒤 이렇게 결론 내렸다. <나는 북한에 있을 때 세상에는 절대적인 천재가 한 사람밖에 없다는 주장을 반대해 보려고 헛되이 많은 애를 썼지만, 여기 남한에 와서는 천재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그들이 풍기는 냄새 때문이다. 아마도 젖비린내인 것 같다> 黃씨의 지적에서 이종석이 풍기는 젖비린내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미래한국 2006-01-03 오후 6:50:00 |
[ 2006-01-03, 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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