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2차세계대전에서 나치독일이 쏘련을 굴복시켰으면 , 지금 세계는 어떻게 되였을까? 전 유럽이 히틀러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20세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승승장구하며, 파죽지세로 유럽을 강탈하던 '무적' 독일군을 섬멸하고 , 쏘련을 사수하고, 나아가서 유럽을
해방하고 나치독일을 패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쏘련, 그러나 전쟁초기 동유럽전선의 대부분의 정규군을 잃어버리고, 수도 모스크바까지
위협받았던 쏘련군에 힘을 실어주고, 반격으로 나설 수있는 원동력을 준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이사람이였다. 전설속의 쏘련간첩 리하르트
조르게 였다.
제 2차세계대전기간에 한 국제간첩그루빠가 일본 도꾜에서 은밀히 활동 하였었다. 이 그루빠의 책임자는
견강한 반파쑈투사이며, 쏘련 공산당원인 국제주의 전사 리하르트 조르게였다. 이 그루빠는 일본에서 8년 남짓이 활동하다가 1941년 말에
일본 특고과에 의해 실체가 드러났다. 조르게 사건은 일본정부에 일장 위기를 초래하였는바, 고노에 내각은 바로 이사건으로 총
사퇴한다. 조르게 사건이 있은지도 이젠 60년이 넘었지만, 전기적 인물인 조르게의 이름과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 까지도
전세계에 널리 전하여 지고 있으며 , 간첩 (정보원) 의 신화를 창조했고, 역사를 바꾸었다. 70년대에 프랑스에서는 '조르게 박사여,
그대는 어떤 사람인가?' 라는 영화를 찍었고, 1980년에 런던 영국방송회사에서 출판한 '간첩' 이라는 책에는 조르게 간첩사건이 20세기
6대 간첩사건의 하나로 지적 되여있다. 서방 여러나라의 작가와 기자들은 조르게의 경험을 연구하고 조르게가 성공할수 있은 비결을 밝히는
많은 책과 글들을 쓰고있다. 그럼 조르게는 어떤 사람인가?
조르게는 독일사람으로서, 1895년 에 태어났다. 제 2차 세계대전기간에
그의 공개적 신분은 독일에서 높은 성망을 갖고 있는 ' 프란크프신문' 의 일본 주재 기자였고, 나치스당 당원이였다. 후에 일본주재
독일대사관의 신문전원으로 된 그는 대사 아우젠 오토의 '심복' 이기도 하였다. 이 간첩그루빠의 핵심인물로는 또 일본의 중국문제 전문가이며
반전주의자인 오자끼 히데노리, 일찍 미국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접수한 일본화가 미야지로 욘도꾸, 정보를 극소형필림으로 촬영, 제작하는
임무를 전담한 유고 국적을 가진 프랑스기자 우케리치와, 조르게의 무전수인 독일사람 맑스 크라우쎈이 있었다. 또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그루빠의
외곽에는 일본, 독일, 조선, 중국, 영국, 미국 등 9개 나라의 반파쑈투사들이 망라되여 있었는바, 이그루빠는 실로 광범성을 띤 국제
간첩조직이였다. 조르게의 진짜 신분은 쏘련공산당 당원이였다. 그는 맑스 와 엥겔스의 전우인 프리드리히 조르게의 손자로서 원래는
독일공산당 당원이였다. 일본으로 가기전에 제 3 국제공산당 국제 정보처에서 사업하였고, 그후 쏘련군 정보국으로 조동되여 오랜 자격자인
베르찐의 수하에서 사업하였다. 1933년 베르찐의 파견을 받은 조르게는 '라무자' 라는 암호명대호를 가지고 일본에가서 그루빠를
만든다. 당시 그들은 독일을 등에 업고 일본의 여러 중요부문에 침투하여 들어간후 일본을 통하여 독일 과 일본의 침략의도를 알아내며,
특히는 쏘련에 대한 일본의 제반 정책에 연관되는 정보들을 수집할 행동계획을 작성하였다. 일본에서 조르게는 외교계, 공상계, 정계, 군부 와
문화계의 많은 요인들과 널리 사귀였고 '프란크신문' 과 '베를린신문'에 적지않은 글들을 발표하며 높은 명성을 쌓아갔다. 동시에 그는
해박한 학식과 출중한 재능 , 그리고 예민한 관찰력으로 대사관 일꾼들의 호평을 받았다. 미구하여 조르게는 대사관의 군사무관으로 있다가
대사로 승진한 아우젠 오토와 막역한 사이로 지내게 되였다. 오토는 일본의 정치국세에 대한 조르게의 심각하고 완벽한 분석을 자못
찬상하였고, 사업가운데서 여러번 조르게의 조언 과 도움을 받았다. 하여 그들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호형, 호제 하며 흉,허물없이 지내는
사이가 되였다. 그 둘 사이에는 비밀이 없었다. 그후 대사관에서 신문업무를 책임지게된 조르게는 대사관의 기요기관인 비밀 암호실에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최신정보에 대한 자료들을 읽을수 있게 되였고, 거기에서 기초자료들을 손에 넣을수 있었다.
조르게의 지도하에
이 그루빠의 두번째 핵심인물인 오자끼 히데노리도 전개력있게 사업을 추진 시켜 나갔다. 1937년 고노에 수상이 내각을 조직할때 오자끼
히데노리는 수상의 중국문제고문으로 초청되였다. 그리하여 그는 내각의 가장 비밀적인 '구수회의' 와 '수요일 조찬회' 또 다른
비밀회의에 참가할수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였다. 조르게 와 히데노리는 독일 과 일본에서 차지한 이런 유리한 지위를 놓치지 않고 가장
새롭고 가장 핵심적인 기밀정보들을 제때에 손에 넣었다. 하여 조르게는 1934년에 쏘련 과 무선전연계를 맺은 그날부터 '모스크바중심"에
많은 중요한 정보들을 제때에 제공하였다. 일본의 군사, 정치, 경제, 외교정책 그리고 독일 과 일본의 결탁과 독일의 동향 등에 관한
정보들 가운데서 몇가지만 보면 아래 와 같다. 1. 1939년 봄에 조르게는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해들어갈 계획을 작성하고있다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2. 1941년 3월 05일 에 조르게는 대사 오토에게 보낸 독일외상 립벤드로프의 전보내용을 보아 히틀러가 6월 하순에
쏘련을 침공하려 한다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제공 한다. 1941년 5월 15일 조르게는 독일이 쏘련을 침략하는 확실한 날짜가 6월
22일이라고 알려준다. 3. 1941년 7월 그는 독일이 지금 계속 일본에 압력을 가하고 있지만 일본은 잠시 대쏘 작전을 벌리지
않기로 결정하였다고 알렸다. 4. 1941년 10월 그는 일본이 태평양에서 대미작전을 벌리기로 결정하였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이 4번째 정보가 피투성이 쏘련을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조르게가 제공한 정보가운데서 두가지
가장 중요한 정보는 전반 쏘-독 전쟁의 승패 와 관계된는 중요한 정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하나는 독일이 쏘련을 진공하려 한다는
확실한 정보였다. 1941년 5월 초순 그는 '독일의 많은 대표들이 베를린에 돌아갔음. 그들은 대쏘전쟁이 5월말에 개시될것이라 고
인정함.' 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이어 5월 15일에는 전쟁이 확실하게 6월 22일에 시작될것이라고 알렸다. 또 5월 19일, 전쟁이
일어나기 한달전 조르게는 '독일이 9개 집단군, 150개 사단을 집결하여 전쟁을 시작할것임" 이라는 전보를 재차 알렸다. 6월 1일
조르게는 '독일군이 양익으로부터 우회책략으로 각 쏘련집단군을 포위하고 고립시킬것임.' 이라고 알렸다. 실로 귀중한 정보가 아닐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쓰딸린은 쏘련이 독일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였다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조르게가 제공한 정보의 믿음성에 대해 의심하였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조르게가 몇번이나 무선전보를 친 후인데도 , 따스 통신사에서는 쏘련에 대한 독일의 진공에 대해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요언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쓰딸린의 중대한 실수 였다. 지금에 와서 볼때 만약 쓰딸린이 그때 조르게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제때에 조치를 강구 하였더라면, 쏘-독 전쟁초기에 그토록 급작스러운감을 느끼는 그런 피동적 국면에
빠지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것이다.
두번째로 중요한 정보는 , 원동에서의 일본의 군사동향을 제때에 쏘련에 알려준것이다.
독일은 일본과의 방공조약을 체결한 뒤 , 원동에서 일본을 출병케 함으로써 쏘련을 양면협공의 궁지에 밀어녛으려고 하였다. 하여 독일은
여러번이나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일본군은 30년대 중반에 할힐골, 하싼하 일대에서 여러차레 쏘련에 도발하였지만, 조르게의 정확한
정보에 근거한 쏘련군은 , 시탐성을 띤 일본군의 몇 차례의 도발에 힘있는 반격을 가하였다. 그때 조르게는 일본의 군사동향을 면밀히
주시하는 한편, 오자끼 히데노리를 통하여 일본의 정책에 침을 놓게 하였다. 일본은 원동에서의 몇차례의 시도가 실패당한후, 더는 경거
망동할 엄두를 못하였고 나중에는 좀더 기회를 기다렸다가 원동전선을 개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쏘-독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일본군부의 정책에도 영향을 미친다. 조르게는 이러한 정황을 즉시 포착하고 또 일본이 태평양에서 대미작전을 준비중이며, 일본군은 남방을
노리고 있다는 중대한 정보를 제때에 모스크바에 알린다. 쏘련은 원동에서의 일본군의 위협에 대한 우려를 없애고 전력을 집중하여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의 진공을 대처함으로써 모스크바 전투 와 이후 진행된 쓰딸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두게 되며,
나아가서는 반파쇼전쟁의 전면적 승리를 거두게 된다. 전투 와 행군, 피로 와 추위에 지친 독일군이 모스크바 전방 지역에 도달 했을 때는
이미 조르게의 정보를 중요시한 쏘련군수뇌부의 결정에 의하여 , 100만 원동군이 모스크바를 철통같이 방어할수 있었다. 이것이
독일군의 패망을 가져올줄이야 ,,,,,,,,,,,,,,,,,,,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던 조르게의 그루빠는 자못
험악한 조건하에서 사업을 해야만 했다. 일본 특고과의 특무들은 시시각각으로 그들의 뒤를 밟았다. 그러나 급격히 악화되는 국제형세는
그들에게 범의 굴에서 시시각각 경각성을 높이면서 여러가지 정보들을 수집할것을 요구했다. 장기간의 긴장한 사업으로 인하여 그루빠성원들의
건강은 날마다 악화되였으며, 게다가 경비난에 허덕이며 멀리 이국 타향에서 쓸쓸한 생활을 하여야 하였다. 조르게를 포함하여 일부
성원들은 사업에 싫증을 느꼈다. 하여 조르게는 장기간의 불안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으려고 자기들 몇사람을 쏘련에 소환하여줄것을 여러번
청원 하였다. 그는 ' 모스크바중심' 에 보낸 전문에 이렇게 말했다. ' 신체가 아무리 건장한 젊은이라 해도 여기 사업조건에서는
견디여내기 어려울것임. ,,,,, 내가 여기에서 객지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바람. 인망있는 외국인은 3 ~ 4 년에
한번씩 휴가를 보냄. 이로 인해 내가 지금 의심을 사고 있음' 조르게는 몇년동안 축적한 사업경험을 조용히 앉아 정리할수 있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랬던가 ! 사회학자인 그에게는 여러분야의 장서만 수천권이나 있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면 학술연구에 정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형세의 발전은 그가 휴식할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여 그는 일본에 남아 계속 강의한 의지로 싸워 나갔다. 이때 천라지망은
사면 팔방으로 부터 ' 라자무 ' 그루빠에 덮쳐왔다. 그들은 아침에 저녘일을 담보할수 없는 위험한 처지에 놓이게 되였다. 워낙 일본의
반간첩기관에서는 1934년부터 이상한 한 비밀전파를 발견하였다. 그 전파는 번마다 같지않은 파장, 같지 않은 비밀암호를 썼고 이번에
여기서 나타나는가 하면, 그 다음번엔 또 다른곳에서 나타나군 하였다. 1940년에 이르러 경찰특고과 보관서류실에는 수백통의 기괴한 전문이
보관되여 있었다. 그러나 그 전문을 번역해내는 수가 없었다. 코밑에 있는 비밀 무전기를 들춰내지 못하는 것으로 하여 특고과 과장은
매우 골머리를 앓았다. 특고과의 특무들을 조금이라도 의심되거나 꺼림직한 사람들의 이름은 몽땅 적어넣은 혐의자 명단을 작성하였다. 처음 그
명단에는 수천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으나, 그후 점차 조사 범위를 좁혀 혐의자를 수천명으로부터 몇십명으로 줄이였고 나중에는 조르게,
오자끼 히데노리, 등 20명만 남겨 놓았다. 그 때로부터 조르게에 대한 감시는 갈수록 엄밀해졌다. 그러나 기민하고 신중한 조르게에게서
그들은 아무런 끈턱도 잡아쥘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일본공산당원이 체포되여 ' 라자무 ' 그루빠의 성원인 미야지로 욘도꾸가
미국에 거류할때 사귄적 있는 세집주인의 이름을 대는 바람에 미야지로 욘도꾸가 먼저 체포되였다. 그때에 가서야 일본 특고과는 이 돌파구를
통하여 ' 라자무 ' 그루빠의 내막을 알게 되였다. 조르게가 체포되였다는 소식이 일본주재 독일대사관에 전해졌을때 오토대사와 대사관의
당위군 두목 모쎈게는 자기 귀를 의심하였다고 한다. 오토는 ' 당신들은 미치지 않았소? 조르게를 쏘련간첩으로 몰다니, 건 당치도 않는
소리요 ' 하며 고래고래 소리쳤고, 모쎈게도 ' 조르게는 어디까지나 내사람이요 ' 라고 하면서 보증을 섰다. 오토는 조르게 사건때문에
해임 당했지만 , 조르게가 쏘련간첩이라는 사실을 감옥에 면회가서 조르게 본인한테서 직접 확인 받기 전까지는 시종 믿지 않았다고 한다.
실로 조르게의 간첩기술은 세계 1등급의 수준에 이르렀다. 그는 일본 특무들의 코밑에서 장기간 정보사업에 종사하면서 여러번 큰 공을
세웠다. 그는 문건들이 저절로 찾아드는 기요부문에 있었으니 경보장치가 달린 기밀금고들을 뜯고 문건들을 훔칠 필요가
없었고, 보안요원들이 공손하게 문을 열고 들여 놓기때문에 총을 꼬나들고 어느곳에 뛰어들 필요도 없었다. 정치적 두뇌가 발달한
그에게는 책략가에게가 있을뻔한 고유한 사유능력 과 분석능력이 있었고, 세심하고 예민한 관찰력이 있었다. 교제에 능한 그는 또 독일대사관에서
많은 벗을 사귀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사람들과도 잘 어울리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조르게는 쏘련을 위하여 큰 공훈을
세웠고, 반파쑈전쟁을 위해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치였다. 그러나 쏘련은 그가 희생된지 20년이 되는 1960년에 가서야 그를 쏘련영웅으로
추인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 들이 떠돌고 있지만 , 한가지 사실만은 확실하였다. 그것은 조르게의 원래의 직접
상급으로서 그를 직접 일본에 파견한 베르찐 과 그의 계승자인 우르쯔끼가 숙반확대화 과정에서 쓰딸린의 의심을 받아 선, 후로 총살당한것이다.
이로인하여 조르게의 충성심도 마찬가지로 신임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1944녀 11월 07일 쏘련에서는 러시아 10월 사회주의
혁명 승리 27돐을 성대히 경축하였다. 또 그날 신문에는 전쟁의 승리에 이바지하고있는 정보기관에 경의를 드린다는 글이 대서 특서
되였고, 일부 정보원과 특공대원들에게 쏘련 영웅훈장을 수여한다는 소식이 발표 되였다. 그러나 그 쏘련영웅 명단에는 조르게의 이름이
없었다. 바로 이날, 멀리 도꾜에 있는 스가모 감옥에서 조르게는 홀로 교수대를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사형 집행직전에
감옥장은 마지막으로 할말이 없는 가고 조르게에게 물었다. 조르게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 난 할말을 이미 다했소 ' 하고는 교수대아래의
상자위에 의젓이 올라서서 팔을 내두르며 러시아어로 이렇게 소리높여 웨쳤다. ' 쏘련 만세 ! 위대한 붉은군대 만세,,,,,,, '
그는 사명을 완수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49 살이였다. 1964년 조르게의 옛 상관인 베르찐 과 우르쯔끼의 억울한 사건이 그
잘못됨을 시정 받았다. 그해 10월 혁명 전야에 쏘련정부에서는 조르게를 쏘련영웅으로 추인하였고, 그의 사적을 선전하는 글들을
신문들에 발표하였다. 그리고 전국가적으로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고 일부 거리와 유조선 들이 그의 이름으로 명명 되였다.
견강한 반파쑈투사였으며, 충성스럽고 훌륭한 공산주의자였던 리하르트 조르게의 이름은 세계 반파쑈역사에 길이 남아 있을 것이다. '
끝 '
~ 지금 이순간도 멀리 타향에서 국가 와 민족의 안녕을 위하여 목숨걸고 사업하시는 대한민국의 정보원들에게 영광이
있으라 ~ 그들은 희생되도 국가간의 관례 와 체면때문에 인정도 못해주고 때로는 시신도 수습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모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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