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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란 진주성 전투 - 중세 최대의 전투<펌> 중국 고대사에 수십만 명 군사가 동원된 전투가 빈번하게 나온다. 그러나 역사와 군사 연구가들에 의하면 수십만 명은 과장된 숫자로 실제는 수만 명에 불과한 전투였다. 역사서에 백만 군사의 경우가 실제 십만 정도였다고 한다. 임진왜란 2차 진주성 전투 때 일본은 사무라이들의 십만 대군을 동원하였다. 당시, 십만 명은 조선 땅의 전체 일본 군사였을 뿐만이 아니라 전체 일본이 한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최대의 군사 수였다. 실로 전투 규모에서 진주성 전투는 중세 최대의 전투였다고 할 수가 있다. 십만의 일본군에 맞서 싸운 조선 측은 군관민 육만 명이었다. 그러나 정예병은 수백 명에 불과하였다. 십만 명 대 수백 명의 대결이었다. 그래서 이 전투를 두고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버마제비가 달려오는 수레바퀴를 밀어내려 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당시 조선 땅에는 명나라 이여송의 대군이 들어와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 측에도 십만의 대군이 있었다. 그런데도 연합군 측은 진주성 전투를 시종일관 수수방관하였다. 진주성 군민은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사무라이들의 십만 대군에 분연히 맞서 싸웠다. 열흘간의 전투 중 선조, 이여송, 권율, 이순신 등은 지원은 고사하고 멀리 후방에서 공포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주성 군민은 끝까지 항복을 거부하고 맞서 싸워 전원 장렬히 옥쇄(玉碎)하였다. <이순신과 도요토미 히데요시(경향미디어 刊)>에서는 임란 진주성 전투를 동서 역사상 최대의 전투인 2차 대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교하고 있다. 다음은 앞의 책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임진왜란 진주성 전투는 여러 면에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너무나 흡사하다. 진주성 전투는 히데요시의 세계 정복 야망을 좌절시킨, 세계의 운명을 바꾼 대전투였다. 중세에 벌어진 전쟁이기에 치열함과 규모에 있어서 현대전투인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세전투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진주성 전투도 치열함과 규모에 있어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뒤지지 않았다. 열흘 동안의 치열한 전투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성은 완전히 외부와 두절되어있었다. 이차 진주성 방어전은 독안에 든 쥐가 벌인 싸움 같은 것이었다. 이 싸움을 두고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던 버마재비가 달려오는 수레바퀴를 밀어내려 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성수비군은 일차전 때와는 정반대 외부와 연락두절, 지휘계통의 문란, 방어준비의 불철저 등의 상황에서 공성(攻城)의 대군과 싸웠다. 어떤 구원군도 오지 않는 고립된 상태였으나 십만 군의 강력한 공격에도 쉽사리 무너지지 않고 목숨을 걸고 잘 싸웠다. 아무리 공격해도 성은 함락되지 않고 전사자만 산같이 늘어나는 데도 공성군은 포기하지 않고 조선 땅 거의 모든 왜군을 동원하여 온갖 수를 다하여 공격을 계속하였다. 진주성 인민이, 할복자살에도 쾌락을 느끼는 병적인 인간들인 사무라이들의 십만 대군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진주성 인민의 혈투는 왜군에게 조선인과 조선의 읍성에 대한 공포심을 품게 만들었다. 무력해 보이는 조선민중이 때로는 얼마나 무서운 인간이 되며 담장 같은 조선 읍성이 철옹성이 된다는 것을 왜군은 온몸으로 체험하여 알았다. 조선을 점령하고 바로 명나라를 정벌한다는 첫 번째 작전계획은 조선 의병과 수군 때문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두 번째 작전 진주성 공략, 전라도 점령은 이윽고 성공하였다. 그러나 기진한 왜군의 몽롱한 시선에는 쥐구멍을 찾아 달아나는 전라도 민중이 호랑이같이 무섭게 보였으며 담장같이 보이던 읍성들이 변하여 철옹성으로 보였다. 저들은 어느 순간에는 진주성 수비병이 되며 저것들은 진주성이 될 것임이 틀림없다고 생각되었다. 사실 왜군 장수들은 지금 자기들이 미치광이의 명령 때문에 죽을 짓만 골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조명 연합군이, 전라도 민중들이 기진한 자신들을 공격해온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이 부산 기지 공략에 나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진주성 공략 후 해야 할 일은 전라도 공략이 아니라 부산기지로 신속히 퇴각하는 것이었다. 왜군은 전라도뿐만이 아니라 천신만고 끝에 점령한 진주성도 포기하고 부산으로 후퇴하였다. 당시 왜군이 진주성 공성으로 완전 탈진하여 있었음을 짐작할 수가 있다. 진주성 인민은 전라도 방어임무를 결국 완수한 것이다. 진주성 전투는 왜군 장수들로 하여금 문명 후진국 일본은 조선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진주성 전투는 비록 성은 함락되었지만 조선 측이 패배한 전투가 아니라 승리한 전투였다. 일본의 학자 소하리 이치로는, “진주성 함락은 조선의 치욕이 아니라 명예였다”고 말하였다. 1, 2차 진주성 전투는 조선이 일본에게 정신적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둔 전투였다.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고수 명령을 내렸고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독일군 모두가 옥쇄를 하기 원했다. 그래서 스탈린그라드 패배가, 패배가 아니라 승리가 되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구만 독일군은 소련군에 항복하였다. 선조와 이여송은 진주성 고수를 명령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부에서는 진주성 인민에게 성을 비워두고 피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진주성 인민은 그것을 거절하고 분연히 성 고수에 나섰다. 선조도 누구도 진주성 육만여 인민이 전원 옥쇄하여 패배가 승리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성 인민은 자신들 스스로 항복을 거부하고 전원 옥쇄를 선택하여 패배가 승리가 되게 하였다. 제삼제국 독일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하여 붕괴하였고 히데요시 조정은 진주성 전투에서 패하여 붕괴하였다. 진주성 전투는 전라도를 점령한다는 왜군 작전을 좌절시켰다. 조선을, 명나라를, 세계를 정복한다는 히데요시의 야망을 좌절시킨다. 진주성 전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같이 전쟁의 승패를 가름하였으며 세계운명을 바꾼 대 전투였다. 당시 조명 측 육군, 수군, 의병, 수군, 승병의 그 많은 장수들 중 그 전투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선조도 이여송도 알지 못하였다. 일본 측의 장수들도 마찬가지였고, 오직 도요토미 히데요시 한 사람만이 알고 있었을 뿐이다. 그는 진주성 전투에 전쟁의 승패를, 자신의 운명을 걸었다. 트로이와 진주성 서사시 두 차례의 치열한 공방전, 승패의 교환은 양국에 모두 진주성의 영웅을 탄생시켰다. 조선 측에서는 김시민,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이, 일본 측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모리모토 기다유, 이다 가쿠베, 오카모토 곤노조 등이 영웅이 되었다. 처절함을 다하였던 두 번의 진주성 전투는 양국에서 그 사건을 다룬 기록, 군기물 뿐만이 아니라 이 전투의 영웅들을 각색한 문예물을 통해서 읽히게 되고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전란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일찍부터 나왔다. 전쟁 후 겨우 이년 뒤에 나온 ‘달천몽유록’은 한일 양국을 합쳐 임진왜란에 대한 최초의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왜란 순국 충장 이십칠 명이 나온다. 김천일 최경회 등은 선무삼등 공신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달천몽유몽록’에서는 김시민은 말할 것도 없고 최경회, 김천일, 황진, 고종후 등도 당당히 등장한다. 진주성 전투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당 시대에도 있었던 것이다. 조선인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진주성 전투의 의미를 더 잘 알았던 것 같다. 임란 백년 후 일본의 셰익스피어라 일컬어지는 유명한 극작가가 김시민을 비록 악역이지만 주연으로 한 극작품을 내놓았다. 그 후로도 역시 악역이지만 김시민을 주연으로 한 극작품들이 계속 쏟아져 나왔다. 그 작품들에서 진주목사(김시민)는 한결같이 조선 충신 장군들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갖는다. 모쿠소(김시민) 관은 일본 근세문학의 심층에 각인되었다. 임란 후 오백년간 일본에서는 김시민을 악역 주연으로 한 극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앞으로 오백 년간은 한국에서 김시민을 악역이 아닌 진정한 주연으로 한 극작품이 나오게 될 것이다. 위대한 영웅 서사시 트로이는 전투 천 년 뒤에 나왔다. 진주성 전투 후 천년 세월이 흘렀을 때, 세상 사람들은 동양의 트로이 진주성 서사시를 즐겨 읽고 있지 않을까. 전쟁에서는 인민의 마음을 잃은 편이 패하게 되어있다. 히데요시는 임진년 조선 침공에 나서는 부하들에게 ‘조선인민을 보호하라’는 명을 내렸다. 왜군은 저항하는 조선인은 무자비하게 도륙시켰지만 ‘조선인민을 보호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대체적으로 따랐다. 조선천민들은 이씨왕조 치하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이 뒤집혀지기를 원하고 있었다. 천민들은 새 통치자가 왜군이 되던 누가 되든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고 불과 두달만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가 있었던 것은 그런 조선 정황 덕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을 움직이는 자는 천민들이 아니라, 비록 천민에 비하면 소수지만, 선비들이었다. 조선민중의 저항으로 왜군이 궁지에 빠지게 되자 히데요시 막부는 조선인으로 하여금 공포에 빠져 복종하게 만들려고 진주성 육만여 인민을 학살시켰다. 진주성 초토화는 이 전쟁에서 히데요시의 최대 악수이고 사무라이 집단 한계의 발로였다. 진주인민 학살 후 조선천민들의 마음은 히데요시 막부를 떠나게 되었다. 진주성 전투 후 히데요시 막부는 사실상 몰락의 길에 들어서버렸다. 사정이 그렇게 되자 히데요시는 발악적 방책으로 전라도 인민 학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조선민중의 마음을 완전히 잃게 되었다는 것이다. |
출처: http://brd3.chosun.com/brd/view.html?tb=BEMIL115&pn=1&num=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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