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그녀의 수상소감에 모두가 울다

鶴山 徐 仁 2006. 1. 3. 23:46
배우 52년만에 첫 연기상 탄 김지영씨

“전쟁때 시체 깔린 밤톨 빼내먹기도… 그런게 다 연기에 묻어나는 거예요”
“연기도 조연, 시상 때도 늘 들러리 그놈의 賞, 원망 참 많이 했었죠”

▲ 김지영 연기자
“상 받을 줄 알았으면 멋진 드레스 입고 오는 건데…. 연기 생활 52년 동안 나에게는 상(賞)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가슴이 드러나는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늘씬한 후배들 틈에서, 손목까지 덮이는 잿빛 원피스 차림의 그녀가 수줍게 수상 소감을 내뱉자, 무대는 일순간 숙연해졌고 시청자들 가슴도 저릿해졌다. ‘2005 KBS 연기대상’에서 드라마 ‘장밋빛 인생’의 ‘미스 봉’ 역할로 여우 조연상을 탄 배우 김지영(69)씨. 새해가 밝았지만, 그녀의 시계는 시상식이 열린 작년 12월 31일에 멈춰 있는 듯했다. 김씨의 들뜬 목소리엔 여전히 흥분의 잔상이 맴돌고 있었다. “그놈의 상, 원망 참 많이 했어요.” 연기력으로는 이미 정평 나있는 김씨지만, 유난히 상복이 없었다. “연기도 ‘조연’인데, 시상식에도 번번이 들러리 ‘조연’이었어요. 대상 후보 올라갔다 미끄러진 적도 있고, 수상자로 선정됐다기에 가보니까 후보에 올라가 있지도 않았던 배우가 가로채 버리고….” 한 방송사 국장은 “젊은 애들 포섭해야 하니까 ‘김 여사’가 이번 한 번만 이해해 달라”고 허탈해하는 그녀를 달랜 적도 있단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후보에 올랐단 얘기는 들었지만,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50년 만의 ‘한풀이’를 가능케 해준 배역 ‘미스 봉’에 대한 고마움은 애착을 넘어선다. “‘몸뻬’ 입고 구질구질하게 살아가는 억척 아줌마 역할만 진탕 해 왔는데 요란한 치장에, ‘각선미’ 자랑까지, 이 나이에 요런 캐릭터가 어디 쉬워요.” 대본 받자마자 남대문 시장, 수입 상가 뒷골목까지 싹싹 뒤지면서 샛노란 스타킹, 핫핑크 블라우스 등 한 번도 휘감아보지 못했던 소품을 준비했다.

“‘미스 봉’이 철없어 보이지만 한평생 첩으로 불쌍하게 산 사람이에요. 남의 것 욕심내지 않고, 사랑도 나눌 줄 알아요. ‘장밋빛 인생’이 어디 따로 있나요. 제 눈에는 미스 봉이야말로, 장밋빛 인생을 사는 사람으로 보여요. 나도 그런 태도를 배우려고 했다니까.”

코믹 캐릭터로 급선회했지만, 감칠맛 나는 연기는 그대로였다. “경험만한 연기는 없어요. 흉내는 아무리 잘 내도 어색하기 마련입니다. 저요? 전쟁 때 시체에 깔린 밤톨 빼내 먹고, 나무껍질 긁어 먹었어요. 그런 게 다 연기에 묻어나는 거예요.”

김씨의 단골 배역 ‘과부’도 같은 선상에 있다. 음악을 했던 김씨의 남편은 폐병에 걸려 고생하다 20여년 전 저 세상으로 갔다. 그녀가 연기 활동을 접지 않았던 건 연기에 대한 열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을 부양해야 하기 때문에라도 연기를 멈출 수는 없었다.

김씨는 ‘걸어다니는 사투리 사전’이다. 그녀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드라마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하면 토박이들조차 ‘토종’으로 속을 정도. 미스 봉 캐릭터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준 중요한 요소 중 하나도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였다. “사투리는 제게 생활입니다. 지방 촬영 갈 때마다 시장을 꼭 둘러봅니다. 사람들 얘기하는 것 듣고 머릿속에 저장해 두죠. 그렇게 머릿속에 입력된 사투리 테이프만 수만 개는 될 겁니다.” 1954년 ‘시집가기 싫어’ 극단 생활을 시작했던 이 노(老) 배우는 이제 ‘연기 관두기 싫어’ 대본에 파묻혀 산다. “이제 제게 주어진 세월이 많지 않습니다. 남은 세월 열심히 연기하고 가려는 생각, 오직 그 마음밖에 없어요.”

김미리기자 miri@chosun.com
입력 : 2006.01.02 19:13 43' / 수정 : 2006.01.03 02:54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