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죄송하지만.. 학교 수행평가라고 해서.. 부탁드려요..
말 그대로 기모노의 기원입니다.. 어떤 이유로 생겨났는지..
이미지도 올려주면 좋겠습니다..
각 나라 혹은 민족마다 고유한 의상이 있습니다. 그 의상들의 유래나 기원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죠. 왜 그런 옷을 입었고 왜 그런 형태와 형식, 무늬들을 지녔는지 정확히 규명하기란 어렵습니다.
★전통의상의 기원이라는 것에 대해★
하지만 그 민족이 처한 기후, 환경, 자연조건, 민족이 가지는 생활방식과 사고방식, 문화, 역사에 따라 고유한 의상이 발전한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공통된 의견이죠. 일본의 기모노 역시 단편적인 것 하나로 설명하기는 힘들고 자연조건등의 주변사황과 일본인들의 생활과 사고에 의해 옷이 표현이 됩니다.
일본의 기모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은 여름은 고온다습하고 겨울은 북태평양의 기단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체격이 그리 큰편이 아니죠.(막부시대에 일본무사들의 어깨 넓은 장군복은 왜소한 체구를 크게 보이기 위한 것이죠.) 그리고 일본은 역사적으로 많은 내부적 전쟁을 치루기도 합니다. 이런 복잡한 상황에 의해 기모노 역시 시대와 그 시대에 맞는 풍조 혹은 사조와 함께 발전하게 됩니다.
기모노의 기본형태는 2000년 동안 크게 변한 것이 없으나 모양과 형태 그리고 색상, 부수적인 것들은 시대에 따라 발전을 합니다. 그 중에서 오비라는 것은 기모노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죠. 오비는 허리에 묶는 것으로 등에 간단한 것을 대어 기모노를 한층 돋보이게 하는 기모노의 부수적이지만 가장 기모노의 특징을 잘 대변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민속학자나 의상학자들은 "오비는 모든 외래 문화를 종합하여 일본인의 체형과 풍토, 습속에 맞게 환골탈태, 확대 재생산한 지혜의 산물"이라고 상당히 자랑스러워하고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합니다.
이렇듯 한 민족의 의상에 대해 명확히 그 기원이나 유래를 말한다는 것은 조금 어렵습니다.
아래에는 기모노의 기본형태와 유래에 대해 간단히 소개한 것고 기모노의 특징인 오비의 유래에 대한 것을 올립니다. 기모노의 역사와 종류에 대해서는 검색하시면 수많은 웹문서들이 나오는 것이니 올리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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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모노★
1. 기모노의 기본 형태
일본의상의 최초의 형태는 관두의로 목부분에 구멍이 있어 머리를 넣는 기모노였다. 후에 불편하다 하여 앞을 가로로 가르고 앞쪽으로도 입을 수 있도록 고안하였다. 그리고 옆선의 트인 부분은 맞물려 박고 소매를 붙이게 되었다.
현대 기모노의 기본형태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소매는 길고 넓으며 목부분이 V자로 패여있고 단추나 끈이 없이 왼쪽 옷자락으로 오른쪽 옷자락을 덮어 허리에 오비를 둘러 묶는다.
목적에 따라 옷감의 종류, 모양, 색깔, 입는 법 등이 다르고 기혼여성과 미혼여성, 또 정식방문인지 가벼운 외출인지에 따라서도 옷모양이 달라진다.
2. 기모노의 유래
남방의 개방적 요소의 기초위에 일본 야마또 민족이 고온다습한 여름과 한랭한 겨울을 나기 위한 대비책과 작은 체격상의 결함을 감추고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연구, 개발한 것이다.
http://w3.seoul-gchs.seoul.kr/~sh011010/a4.htm
★ 오비의 유래 ★
직선으로 구성된 기모노를,가로줄로 매듭을 지어 고아한 대조를 이루고,또한 몸의 중심인 허리 동체를 단단하게 지탱해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 오비.
단아한 일본의 미에 없어서는 안될 오비이지만, 기모노에 비해서 에도시대가 되기까지는 그다지 변화가 없었다
호화한 기모노가 유행하기 시작한 아즈찌모모야마(安土桃山時代)시대조차,오비는 아직 가늘고 긴 것을 앞으로 묶는 정도였다.
에도기(江戶期)에 상인의 힘이 증대해도,오비는 폭 2 촌 5 분,현재의 코시히모(腰紐-허리끈)를 조금 두껍게 한 것과 같은 것을 허리에 묶고 있었던 것이다.
묶는 법에는 정해진 규직이 없고,전후 좌우 매고 싶은 곳에 묶어 늘어뜨리는 방식이었다.
현대보다 스타일은 자유로왔지만,오늘날의 오비에 비해 오비라고 하기에 너무 간단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에도중기가 되어서야,가부키의 유행에 따라,
여자역의 남자배우가 여성다움을 강조하기위해 폭이 넓은 띠를 등에 묶는 방법을 고안하게 되었다.
그 우아한 모습이 순식간에 마을의 여성들에게 확대되어 인기를 얻어 무늬나 매듭의 변화가 고안되어 현재의 오비의 원형이 완성되기에 이른다.
유행의 근원은 카부키 배우에서 부터 시작했지만 부유한 상인이 보다 화려한 것을 요구해 에시(繪師-궁정 혹은 막부등에 직속되어 그림제작을 담당하는 직인)에게 호화로운 의장을 그리게 하고, 직인에게 정교하게 짜게 한 것이 점차 서민에게도 패션으로서의 기모노로 뿌리를 내려 갔다.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도 다투어 유행을 추구하고, 에도와 위쪽에서부터 전국으로 유젠 ( 비단 등에 화려한 채색으로 인물,꽃,새, 산수 따위 무늬를 선명하게 염색한 것 )의 기법과 새로운 오비의 형태가 확산 되어갔다.
http://hyuny50.made.com/obee.htm 에서 발췌
흠..몇학년이신지는 잘모르겠지만..
기모노라는 옷은 일본은 자기 나라에서 전쟁을 너무 많이 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남자들이 많이 없는 시대가 있었죠..
그래서 기모노란걸 입게 되엇는데요 기모노를 살펴보시면
끈하나 살짝 풀면 바로 알몸이 되게 되어있죠..
그래서 바로 성관계 이렇게 인구수를 늘릴수있게 고안된
옷이예요
먼저 한복........
당(唐) ·(元) ·명대(明代)의 관복제도를 받아들여 한국 고유의 복식과 조화시키면서 발전시킨 것으로,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역사】 고조선시대에 이미 초의생활(草衣生活)에서 벗어나 칡과 삼으로 짠 옷감을 사용하고, 전잠(田蠶)과 직조의 기예가 늘어감에 따라 의류문화에 진전을 보여주었다. 그 후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에는 옛 사기(史記)나 고분벽화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대체로 유(粱) ·고(袴)와 상(裳) ·포(袍)를 중심으로 한 복장이었으며, 여기에 관모(冠帽) ·대(帶) ·화(靴) 또는 이(履)가 첨부되었다. 유는 저고리로서 상체의 옷이고, 고는 바지, 상은 치마로서 하체의 옷이며, 여기에 머리에는 관모를 쓰고, 허리에는 대를 띠며, 발에는 화 또는 이를 신어 포피(包被)로서의 의복의 형태를 갖추는 동시에, 그 위에 두루마기로서의 포를 더함으로써 한대성(寒帶性) 의복 곧 북방 호복(胡服) 계통의 의복을 나타낸다. 이에 있어 유(저고리)는 곧은 깃에 앞을 왼쪽으로 여몄으며[左淪], 소매가 좁고[筒袖],길이는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것으로, 오늘날의 승복 ‘동방’과 비슷한 것이었으며, 허리에 띠를 둘렀는데, 특히 깃 ·도련 ·소맷부리에는 빛깔이 다른 천으로 선(這)을 둘렀다.
이후 중국과 교류가 잦아지면서 중국복식의 영향을 받아 좌임이 우임(右淪)으로 변하고 소매도 넓어지는데[寬袖], 선은 오늘날에도 회장 ·끝동 등으로 남아 있다. 이 저고리를 신라에서는 위해(尉解)라고 일컬었는데, 오늘날 저고리를 우티 ·우치라고 하는 방언(方言)도 이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저고리라는 표현은 조선 세종(世宗) 2년(1420) 원경왕후(元敬王后) 선전의(選奠儀)에 ‘赤古里’라는 말로 처음 나온다. 고(바지)는 용도에 따라 폭과 길이에 변화가 있었는데, 양복바지와 같이 폭이 좁은 궁고(窮袴:細袴)와 지금의 한복 바지와 같은 대구고(大口袴:또는 寬袴)가 있었고, 오늘날의 잠방이와 같은 가랑이가 짧은 곤(바)이 있었다. 궁고는 곤과 더불어 민층의 하의(下衣)였고, 대구고는 상류층의 하의였는데, 발목을 대님으로 묶기도 하였다. 이 바지를 신라에서는 가반(柯半) 또는 가배(柯背)라 하였는데, 지금 우리말의 고의 ·고쟁이도 이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으며, 바지라는 표현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인지(鄭麟趾)가 ‘把持’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하나, 이 호칭은 이미 널리 사용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왜냐하면 당시는 여자도 바지를 입는 것이 기본 복제(服制)였기 때문이다.
상(치마)은 여자 전용의 하의로서, 고와 상을 혼용하였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길이가 길고 폭이 넓어 땅에 끌릴 정도였으며, 허리 부분부터 치맛자락 끝까지 잔주름이 잡혔고, 다시 치맛자락 끝에 일종의 장식연(裝飾緣), 곧 선을 둘러 조선시대의 스란치마를 연상시키는 것이었다. 상을 치마로 표현한 첫 기록은 앞에서 든 원경왕후 선전의에 ‘赤古里’와 함께 나오는 ‘赤췻’로서, 한글로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빈(嬪)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만록(閑中慢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포(두루마기)는 표의(表衣)를 뜻하는 것으로서, 당시에는 유와 고 위에 착용하여 양복의 외투와 형상이 비슷하였는데, 오늘날의 두루마기에서와 같이 직령(直領) ·교임(交淪) ·중거형(重뢨型)의 것이 아니고 직령 ·교임 ·직수형(直垂型)의 것이었으며, 여기에 띠를 둘렀다. 이 포를 당시에는 왕공(王公) 이하 평민에 이르기까지 남녀가 모두 보편적으로 착용하였다. 포를 가지고 두루마기라 한 것은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옷의 폭을 쭉 돌아가면서 다 막았다는 데서 나온 순수한 우리말 표현이며, 주의(周衣)라는 명칭은 이를 거꾸로 한자화(漢字化)한 것이다.
이러한 한복의 기본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가 없다. 다만 관복(官服)에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무렵(眞德女王 2년) 중국 당(唐)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습용함으로써 고려 ·조선시대까지 중국의 제도를 준용하였다.
중국과 한국은 정치 ·문화 교류를 통하여 양국의 복식도 서로 영향을 끼쳤는데, 신라의 경우는 반비(半臂) ·배당(褙엇)을 비롯하여 여자 포제(袍制)로서의 활수의(闊袖衣) ·색사대(色絲帶)가 그것이다. 고려 때에는 제25대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元)나라의 부용국(附庸國)이 되면서 복식 풍습도 몽골풍(蒙古風)을 많이 따랐는데, 질적으로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었으며, 제31대 공민왕(恭愍王) 때 원나라가 쇠망하고 한족(漢族)의 명(明)나라가 다시 중국을 지배하게 되자 몽골풍은 사라졌다. 그러나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고 소매가 좁아진 것은 몽골 복식의 영향이며, 이로 말미암아 띠가 없어지고 대신 고름을 달게 되었다. 또 여자 화관(花冠)이 당나라에서 전해 온 것이라고 하면, 족두리는 몽골인의 고고리(古古里:姑姑, 顧姑)였다.
조선시대에는 임진(壬辰) ·병자(丙子)의 두 국란을 겪으면서 우리 민족의 자각심이 일기 시작하여 민족 복식을 형성한다. 이에서 두드러진 것은 남자의 포제와 입제(笠制)이며, 여자의 예복과 친의류(塾衣類:속옷류)이다. 남자의 포제는 포의 기본형에서 고려의 백저포(白紵袍)를 거쳐 직령(直領)→ 도포(道袍) → 창의(莎衣)에서 조선 말기의 주의(周衣)로 발전하며, 입제는 평량자(平梁子) → 초립(草笠) ·흑립(黑笠)으로 발전한다. 여자의 예복은 중국의 활수의 ·색사대에 속한 적의(翟衣) ·대삼(大衫) 등이 원삼 ·활옷 ·당의 등으로 국속화(國俗化)되었고, 친의류는 단속곳 ·바지 또는 고쟁이 ·속속곳 ·다리속곳 ·너른바지 등으로 다양해진다. 그리고 조선 말 개화기에는 양복 ·양장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한복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졌다.
기모노.....
세계적으로는 기모노[着物]로 알려졌고, 일본 복식사에서는 고소데[小袖]로 알려진 옷이다. 고소데는 원래 호[袍]·우치기[셤]와 같은 오소데[大袖:소맷부리가 넓은 옛날의 예복] 밑에 입는 통소매[筒袖]로 된 속옷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나중에는 속옷인 고소데가 겉옷이 되어 겉옷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고, 다시 비단에 솜을 두어 만든 솜 나가기[長着:길이가 긴 일본의 대표적인 옷]와 겹 나가기 전부를 가리키게 되었다. 그러나 고소데는 히로소데[廣袖:소맷부리의 아래쪽을 꿰매지 않은 소매]가 아니라 반드시 소맷부리가 좁은 옷을 가리키며, 현재의 일본옷은 모두 고소데로 되어 있다.
【종류】 일본옷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남자옷은 나가기·하오리[羽織]·하카마[袴]·유카타 [浴衣]·단젠[丹前] 등으로 구성되고, 여자옷은 나가기·하오리·유카타·히후[被布] 등으로 구성된다. ① 나가기:남녀가 함께 입는 주요 겉옷으로, 한국의 도포와 비슷하다. 허리에 오비[帶]라는 띠를 매어 옷을 여미며, 홑·겹·핫옷의 3종류가 있다. 소맷부리는 모두 고소데인데, 여자옷은 소매 배래 쪽에 늘어지는 부분의 길이에 따라서 오후리소데(큰소매)·나카후리소데(중간소매) 등 5∼6종류의 명칭이 있다. ② 하오리:나가기 위에 덧입는 방한·방진(防塵)을 목적으로 하는 기장이 짧은 옷으로, 실내·실외 어디서나 입을 수 있다. 남자의 경우는 예장용이지만 여자의 경우는 예장용이 아니다. ③ 하카마:남자의 예장용으로 허리 아래에 입는 품이 넓은 하의(下衣)이며, 앞에 주름을 깊게 잡아 아랫단까지 주름이 지는데, 한국의 통치마처럼 생긴 것과 너른바지처럼 양 가랑이가 갈라진 것이 있다. ④ 유카타:나가기와 같은 형태의 남녀가 함께 입는 옷이다. 원래는 목욕 후에 입는 옷이었으나 요즈음에는 주로 여름용 가정복으로 입는다. ⑤ 단젠:겹 나가기와 같은 형태로, 평상복이나 유카타 위에 껴입는 겨울용 가정복이다. ⑥ 히후:여성용으로 하오리와 같은 목적의 외출복이다. 앞이 막혀 있으며, 하오리 위에 덧입을 때가 많아 하오리보다 기장을 5cm 정도 더 길게 한다.
【특징】 일본옷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① 나가기는 보통나비의 천을 직사각형으로 재단하여 목이 들어갈 만한 깃고대를 파고 어깨로부터 앞뒤로 늘어뜨려 길을 삼고, 팔에서 앞뒤로 늘어뜨려 소매를 삼아 배래를 꿰매고 앞뒷길에 소매를 붙인다. ② 주반[粱펐:포르투갈어 '지방'에서 온 말로 속옷을 가리킨다]은 섶을 달지 않고 깃을 앞자락까지 달며, 소매는 소매나비 전부를 소맷부리로 하는 히로소데이다. ③ 하오리는 품에 여유를 주기 위해 양옆에 다른 천(한국 두루마기의 무와 비슷한 것)을 대고 서양풍을 본뜬 깃을 앞길 겉쪽으로 접었으며, 가슴에 끈을 달아서 맨다. ④ 남성용 훈도시[바:들보], 여성용의 고시마키[腰卷:아랫도리의 맨살에 두르는 천] 등은 모두 직사각형의 단순한 천에 끈만 달았다. ⑤ 전체적으로 몸에 붙지 않고 직선적인 재봉으로 품에 여유가 있으며, 머리부터 뒤집어써서 입는 형은 없고, 앞은 전부 트여 있어 좌우를 포개어서 여민다. ⑥ 어깨선은 어깨처짐이 없이 직선이므로 입었을 때 여유분이 겨드랑이밑으로 주름져 늘어진다. ⑦ 오비로 품의 여유분을 허리에 죄어 맨다. ⑧ 깃고대·소맷부리·아랫자락을 모두 넓게 터놓았으며, 가랑이가 달린 의류를 입지 않는다. 따라서 통풍은 잘되나 방한에는 부적당하며 활동적이지 못하다. ⑨ 앞자락을 겹쳐서 여밀 뿐 잠그개가 없고, 오비를 매어 고정시킬 뿐이므로 흐트러지기 쉽다. ⑩ 어깨산·소매산은 솔기가 직선이므로 소매·깃달이·옆솔기·섶달이 등을 반듯하게 개켜서 넣어 두어 접은 자국이 있는 것이 좋은 옷이다. ⑪ 형태는 일정하고, 개성은 천·빛깔·무늬 등으로 나타내므로 종류가 천차만별이며, 이것들을 서로 배합시켜 입음으로써 개성적인 조화를 만들어낸다. ⑫ 예장(禮裝)·나들이옷·일상복 등이 남자용 하카마를 제외하고는 남녀 모두가 모양에 차이가 없다. ⑬ 여자용 나가기는 기장을 신장과 같은 길이로 만들어, 입을 때 허리에 접어 질러 오비로 고정시키므로, 특히 흐트러지기 쉽다.
【입는 법】 일본옷의 특성은 같은 형의 의복을 겹쳐서 입는 데에 있다. 정식으로는 짧은 주반(속옷)에 고시마키(또는 오코시)·긴 주반을 속옷으로 입고 그 위에 나가기를 입어야 하는데, 오늘날에는 양장의 보급과 더불어 그와 같은 속옷 형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치파오...........
중국의 개화기때의 여성의 복식으로 그 기원은 기녀장포(만주족 여성의 긴포) 입니다. 치파오 역시 재단이 복잡하긴 한데 현대식으로 많이 변형되어서 한복보다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중국 전통옷이라 보면 무난하겠습니다. 만다린 칼라에 옆으로 뜯어진 스렉스가 있고 앞이나 옆에 트임이 있으며 반소매 민소매 등 개량화 된것이 있습니다, 길이역시 무릎위로 올라온건 개량된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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