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 Hymn
요한 복음 9장 39절 - 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우리 지체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눈입니다.
마태복음 6장 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우리는 눈이 없는 사람을 볼 때에 참으로 동정하게 됩니다. 밤이나 낮이나 똑 같이 캄캄하고 그 좋은 경치를 구경하지 못하니 얼마나 답답합니까?
물론 눈이 없어도 목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바늘에 실을 꿰어 양말을 깁는 양 정신 목사도 있기는 합니다. 그 사람의 수기를 읽어보니 일곱 살 때에 열병으로 실명되고 고아가 되어 눈이 없는 사람이 식모 사리를 하고 주인이 빨래를 시키면 손으로 빨래 때를 만져 보면서 빨래를 하고 나면 주인이 빨래를 깨끗케 못 하였다고 구박하는 일 등을 볼 때 참으로 눈이 없는 사람의 서러움을 동정하게 됩니다. 이 용복 집사의 간증을 들어보면 아침에 눈 없는 사람을 만나면 재수 없다 하여 침 뱉으며 차도 안태워 주어서 얼마나 많은 서러움을 당하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열고 밝은 눈을 열고 보고 있으니 그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은 예수님은 묘한 말을 하나 하였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를 보게 하고 보는 자는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게 하려고 세상에 왔다고 하시었습니다.
우리가 실제로 이 말씀을 깨달으려면 내가 보지 못하는 소경이 되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의 소경 됨을 인정하고 예수님 앞에 내가 나갈 때에 예수님은 그 사람의 눈을 환하게 떠서 밝은 세상을 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눈이라 하면은 육신의 눈만 생각하지만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의 눈이 있는 것입니다.
1. 육신의 눈이 있습니다.
잠언 27장 20절 “음부와 유명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
여기서의 눈은 육신의 눈을 말합니다. 사람의 눈은 만족함이 없어서 눈은 자꾸 높은 것을 요구합니다.
옛날 활동사진을 흑백으로는 볼 때 참으로 좋다 하며 넋을 놓고 보고 또 보고하면서 좋아하였지만 그 후에 천연색, 채색 영화가 나오니 더 좋아하고 흑백 영화는 안 보니 없어 졌습니다.
그러다가 그것도 넓은 화면의 CINEMASCOPE 의 넓은 화면을 보다가는 이제 좁은 화면의 영화는 보기 싫다고 합니다. 이제는 70mm 화면에 입체 음향에 iMax에 Dorby Surround Sound 가 되어야 영화를 보는 맛이 납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눈은 만족함이 없이 최고 최고를 찾아 나섭니다.
탐욕을 쫓는 눈, 정욕을 좇는 눈이 바로 이 육신의 눈입니다. 차라리 이러한 만족함이 없는 눈을 가지고 살 바에야 눈을 감고 사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 말씀입니다.
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요한 1서 2장 16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온 것이라”
우리가 이 육신의 눈이 요구하는 것만 쫓아서 사는 사람이 되어 정욕만 쫓아서 살다가 지옥에 갈 바에야 차라리 눈을 뽑아 버리는 것이 낫다고 주님은 말을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장 29절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우리는 이 눈의 욕심을 따라서 살아 가면은 안 될 것입니다.
건강한 육신의 눈은 먼데 것도 보고 가까운데 것도 잘 모이는 것이 건강한 눈입니다.
나도 이제 나이가 60이 훨씬 넘으니 노안이 되어 가까운 것이 안보이고 먼데 것이 보이는 돋보기가 필요한 눈이 되었습니다.
근시안의 눈이 있습니다.
오늘날 현대 사회의 사람들은 근시안의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눈앞에 있는 이익을 쫓아서 먼 날을 생각하거나 보지 않고 당장의 이익만을 위하여 사람을 속이고 도적질하고 욕하고 죽이는 일을 서슴없이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근시안은 빨리 고쳐서 먼데 것을 보는, 천국과 지옥을 바라 볼 줄 아는 눈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원시안이란 눈이 있습니다.
이 눈은 가까운데 것은 못보고 먼데 것만 잘 보이는 눈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잘 다니면서 헌금도 잘하고 모든 면에 열심히 천국의 보물을 쌓는데에 충실하지만 가까운데 것을 보지 못하는 원시안이 있습니다.
집에서 동고동락하는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집에 찾아온 거지를 박대하여 보내면서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당한 일로 이러한 장로님 가정이 있었습니다. 이 장로님은 교회에 헌금을 하기 위하여 옷을 헐음 하게 입고 지하철에서, 시장에서 노점을 하면서 하루 3 - 4만원을 손톱깎이, 면도칼 등을 팔아서 돈을 모아 주일날 새 양복을 입고 온갖 멋을 내고 교회에 나가서 헌금을 합니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장로입니다. 그런데 제가 중국에 선교사로 일하는 동안 서울에서 하룻밤을 그 집에서 유숙을 하고 아침 비행기로 중국에 갑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우리 집은 국제 호텔이 아니다 하면서 쫓아냄을 당했습니다.
나는 쫓겨나는 것이 서럽지는 않았지만 그 가정이 마음에 주님을 쫓아내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가까운 주의 종을 대접하지 못하는, 나그네를 대접하지 못하는 사람이 먼데 것만 바라보고 사는 원시안을 가진 신앙인입니다.
또 난시안도 있습니다.
난시안은 가까운 것도 먼 것도 잘 보이지 않는 눈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눈을 가진 것을 보게 됩니다. 한국이나 중국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미국에서도 성탄 때가 되면 구세군에서 자선냄비를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 걸어 두고 땡그랑 땡그랑하면서 종을 치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과 집이 없는 거지들과 인생의 실패자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아이들에게 Christmas 선물을 나누어주기 위한 모금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금 액수가 점점 작아져서 앞으로는 이러한 모금 운동을 중단하겠다고 말합니다.
저는 구세군에서 수집하여 팔고 있는 상점에 들려서 웬만하게 맞는 옷이면 거기서 옷을 사 입습니다. 내가 사서 입은 그 옷이 그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이 되어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물론 그 뜻을 모르는 우리 집 사람은 어디서 헌것만 사 갖고 온다고 합니다. 구두도 거기 가서 사서 신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은 죽은 사람 옷이고 죽은 사람 구두라고 말하지만 나는 관계가 없습니다.
이번에 입고 온 양복도 거기서 산 것입니다. 값도 싸고 가난한 사람에게 도움도 주고 하니 일거양득입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님이 자기는 호텔에서 안자고 여관에서 자고 그 남은 돈으로 도움을 준다고 큰 소리를 하여 제가 눈여겨보니 그 목사님이 사실 그렇지를 못한 것 같습니다. 양복도 최고로 비싼 것을 입고 코트도 비싼 것으로 입고 온갖 멋을 내고 있고 또 훈춘의 호텔에서 잤더니 거기는 여기만 못하다는 말을 하여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물론 본인은 말은 안하였지만 그 교회 장로님들이 자기 교회 목사님이 그렇게 검소하고 남을 생각한다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기에 사실 그런가 하는 관심을 갖고 본 것입니다. 들은 말과 내가 본 일이 다르기에 실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내 가까이에 있는 가까운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고 먼데 계신 하나님도, 장차의 천국도 생각하며 올바른 정상적인 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탐욕의 눈을 혹시 가졌거든 뽑아 버리고 주님이 주시는 더 좋은 눈을 갖도록 하여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2. 지식의 눈이 있습니다.
지식의 눈은 공부를 하고 배움으로 이 눈이 떠지는 것입니다.
학문을 배우지 않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을 지식이 없는 사람을 까막눈이라고 합니다.
요새는 문맹자가 없이 모두 글을 볼 줄 아는 눈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콤맹이란 까막눈이 있습니다.
COMPUTER를 할 줄 모르면 콤맹이라하여 글자를 모르는 사람과 같이 취급합니다. 중국도 이제는 컴맹을 탈출하려고 많은 젊은이들이 땐뇌(電腦)를 배우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는 콤맹이었지만 이제는 많이 배워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약간 할 줄 압니다. 부로그도 만들고 매일 300명 이상의 친구들이 부로그에 들리고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 정도이고 우리 아들은 전공을 하여 박사급이고 딸아이들은 대학 1년 정도입니다.
컴퓨터 지식이 없으면 컴맹이 되어서 이 편리하고 좋은 기구를 왜 사용할지 모르는지 모릅니다. 마치 비행기를 타고 가면 빠르고 편하고 시간이 절약되는데 왜 북경까지 걸어가고 있는 사람과 같습니다.
세상에서 심심하고 할 일이 없으면 인터넷을 컴퓨터에서 하십시오. 세계와 대화가 되고 라디오, 텔레비전, 잡지, 영화, 음악, 취미 등등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새는 줄 모르는 재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하면 대답이 나오고 백과사전, 세계 명작 등의 모든 책도 읽게 됩니다.
이것을 모르면 콤맹이지요. 컴퓨터 지식이 없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본인은 몰라도 아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을 깔보게 됩니다.
지식의 눈은 배워서 뜨는 것입니다. 낫 놓고 ㄱ자를 모르는 사람이나 지게 놓고 A자를 모르는 사람 참으로 한심스럽지요?
열심히 배워서 지식의 눈을 다 뜨시기를 바랍니다.
호세아서 4장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글자를 아는 지식, 컴퓨터를 아는 지식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몰라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답답하기는 하여도 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이 지식이 없으면 망하는 지식이 있습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장차 심판을 하시는데 의인과 악인을 심판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농촌에 부흥회를 갔더니 어떤 84살 먹은 할머니가 저를 찾아 왔습니다. 그 할머니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질문을 합니다.
나는 성경도 읽지 못하고 찬송도 부르지 못하고 아는 것도 없는데 나 같은 사람도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까라오? 하면서 전라도 사투리로 물어 봅니다. 저는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예수를 믿지요?.” “예 믿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란 것을 믿으세요?” “그럼은요”
“예수님이 내 죄 대신 죽으신 것을 믿으세요?” “그럼은요”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믿으세요?” “암요”
그러면 됐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니 염려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하였더니 할머니는 기쁜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8년 후에 다시 그 교회 갔더니 할머니는 별세하고 없었지만 나는 그 할머니가 천국에 분명히 갔을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지식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나라 예수가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믿는 지식만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부르는 찬송 102장을 작곡하고 부르는 조지 바라라 쉐 (George B. Shea)씨는 노래를 잘 부르는 오페라 가수이고 돈을 잘 벌었지만 예수님을 안 후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 예수 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찬송을 작곡하고 부르면서 빌리그래함 목사를 90이 넘은 노령에도 아직까지 따라 다니며 그 부흥짐회에 꼭 그 노래를 부르고 많은 사람을 주님께 돌아오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만 있으면 다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은 배워야, 들어야 얻어 지는 것임으로 이 지식을 알리기 위하여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로마서 10장 13절 - 17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는 저들에게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것을 가르쳐 저들이 듣고 믿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게끔 전도를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의 눈이 열려서 구원에 참례하는 저들이 되도록 열심히 가르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3. 마음의 눈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8절 - 19절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마음의 눈은 무엇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리면 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지,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내가 앞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다가 어디에 갈 것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눈이 열리면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다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감긴 자는 자기가 왜 세상에 살고 있으며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떤 길로 가고 있는가를 알지 못하고 방탕과 방황으로 삶의 목표를 정하지 못하고 되는대로 가치 없는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장차 내 고향을 바라보고 거기에 많은 투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면서 사는 성도가 됩니다. 양심을 따라 살기를 원합니다. 의롭게 살기를 원합니다. 보람 있게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넒은 마음을 가지고 양보하면서 너그럽게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좋다고 흔히 말합니다. 이것은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에게 사람들이 칭찬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마음의 눈을 열고 넒은 마음으로 장래의 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4. 영의 눈을 열어야 합니다.
요한 계시록 3장 18절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영안을 연다는 것은 신령한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영안은 하나님께 기도를 많이 할 때에 영안이 열려서 영적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45편 18절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 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영안이 열렸을 때에는 하나님이 정말 내 가까이에 계심을 알게 되어 하나님하고 부를 때 “오냐”하는 음성이 들리는 정도로 가까이 내 곁에 계신 하나님을 느끼게 됩니다.
예레미야 23장 23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가까운 데 하나님이요 먼 데 하나님은 아니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가까이 내 곁에 충만히 계시는데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으로만 알게 되는 것은 영안이 안 열린 사람이 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천지에 충만한 하나님이심으로 지금도 내 곁에 충만히 계신 것입니다.
영안이 열릴 때는 가까이 계신 하나님이 보여 집니다. 그러나 기도를 아니 하고 영안이 닫힐 때에는 하나님은 저 멀리 저 하늘 위에만 계신 것으로 여겨지고 죄를 지어도 하나님이 모르고 못 보실 것으로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은 가까이 내 곁에, 내 안에 계십니다.
제가 금식 기도를 산에 가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3일을 할 때 마지막 날에는 하나님이 너무 가까이 계셔서 하나님과 대화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기도가 멀어지면 하나님도 멀어지게 느껴집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가까이 계십니다.
욥기서 11장 11절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치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
하나님은 숨어 계신 듯하지만 나를 다 보시고 내 곁에 항상 충만히 있는 것인데 내 영안이 열리는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을 다르게 느끼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정리:
우리는 이 내 가지의 눈을 다 열고 살아야 온전한 눈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육신의 눈을 열어 원근을 다 잘 보고 내 눈에 보이는 이웃과 하나님을 보면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식의 눈을 열어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살아가십시다.
마음의 눈을 열고 세상의 삶의 목적과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고 장차 어디에 갈 것을 알고, 보고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영의 눈을 열고 하나님이 내 곁에 가까이 계심을 느끼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온전한 눈을 이 네 가지의 눈을 열린 사람이 온전한 눈을 열고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육신의 눈만 열고 눈을 떴다는 사람은 예수님께 겸손하게 나아 와 내 눈을 열어 달라고 간구 하여 눈을 뜨는 역사가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이러 할 때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보고 장래를 보면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