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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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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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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南京) 대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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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南京) 대학살 현장 |
나치조차도 ‘야수의 행위’라고 비난한 ‘난징(南京) 대학살’이 1937년 12월 13일부터 6주 동안
양쯔강 남안의 도시 난징(南京) 전역에서 자행됐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蘆溝橋)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군은 파죽지세로
톈진(天津), 베이징(北京) 등을 점령한 후,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항저우(杭州)와 상하이(上海)까지 점령한다. 12월 10일 마쓰이
이와네(松井石根) 중지나방면군(中支那方面軍) 사령관의 공격 명령을 신호탄으로 일본군 6개 사단 20여만명은 3개방면에서 난징을 향해 진격해
들어간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3일 전 이미 충칭(重慶)으로 탈출한 상태. 12월 13일 마침내 난징은 함락되고
대학살의 서막이 시작된다. 무차별 사격, 생매장, 휘발유를 뿌려 불태워 죽이는 등 잔인한 학살방법은 모두 동원됐다. 여자들은 소녀, 노파 할 것
없이 무차별로 강간당한 뒤 살해됐고, 젊은 남자들은 총검술훈련으로 베어졌다. 12월 13일자 도쿄(東京)일일신문에는 ‘중국인 참수(斬首)시합에
참가해 106명과 105명을 참수’한 두 소위의 사진과 찬양기사가 실렸다. 이렇게 희생된 사람이 30여만명. 당시 난징의 총 인구는
70여만명이었다. 마쓰이는 전후 도쿄극동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처형됐으나 일본인들은 그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등과 함께
‘순국칠사(殉國七士)’로 추앙하고 있다. 오늘날 일본의 우익들은 이 사건을 ‘20세기 최대의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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