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은 200년 전
세계사의 결정적인 전투가 지금의 체코 브루노 근방 아우스텔리츠(Austerlitz)에서 벌어졌던 날이다. 현지에선 이 결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올해 10월21일은 또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무찌른 200주년이 되는 날이어서 기념행사가
대단했었다. 한 해에 두 번의 결전이 있었던 1805년은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을 일단 마감한 한 해였다. 비록 海戰에서는 패배했으나 그 한 달
보름 뒤 나폴레옹은 아우스텔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연합군을 대파하여 유럽을 손아귀에 넣게 된다.
아우스텔리츠 전투는 1804년3월 나폴레옹이 자신의 암살을 꾀하는 독일 공작을 납치하여 처형한 데서
비롯되었다. 영국의 윌리엄 피트 수상은 나폴레옹의 행동에 분노한 유럽왕가를 선동하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황제를 설득하여 세번째의 對프랑스
연합전선을 구성한다. 1805년 가을 선수를 친 것은 오스트리아였다. 황태자 페르디난드가 이끄는 7만2000명의 대군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지금의 독일 바바리아 지방을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반격하여 10월15일 우름(Ulm)이란 곳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격멸했다. 프랑스 군대는 비엔나와 오스트리아의 대부분을 점령한 뒤 지금의 체코 땅으로 진격하여
아우스텔리츠에서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과 대치했다.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이기도 했던 프란시스 1세와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가
직접 군을 지휘했다. 이렇게 해서 '세 황제의 전투'로 불리게 되었다. 나폴레옹 군대는 7만3000명에
139문의 대포를 가졌고, 오스트리아-러시아 연합군은 8만5000명에 대포 278문을 보유했다. 연합군은 지휘체제가 2원화되어 혼란을 겪었다.
결전이 시작된 날은 안개가 끼고 추웠다. 나폴레옹은 연합군의 우익이 프랑스 군대를 포위하려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연합군의 취약해진 右중앙을 돌파하여 배후로 진출, 적군을 늪지대로 몰아넣는 전술을 성공시켰다. 적군이 얼어붙은 호수를 건너서 달아나자
나폴레옹은 빙판을 향해서 포격하게 했다. 연합군 대포 38문과 수많은 병력이 꺼진 얼음 밑으로 수장되었다. 19세기 말 이 호수가 말랐을 때
130마리분의 말뼈가 발굴되었다. 이때 러시아 군대를 지휘했던 사람은 미하일 쿠투초프였다. 그는 8년 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쳐들어오자 방어전을 지휘하여 프랑스 육군에 최초의 대패를 안겨주는데 아우스텔리츠 싸움에선 敗將이 되었다.
오후 2시에 이 결전은 나폴레옹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프랑스 군대는 약9000명의 사상자, 연합군은
1만5000명의 사상자와 1만2000명의 포로를 남겼다. 오스트리아 프란시스 황제는 나폴레옹에게 휴전을 제의했다.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맹주가
되어 독일연방처럼 통치하던 신성로마제국을 해산하고 라인연방을 만들어 독일남부를 지배하게 된다. 이 전투로
해서 영국을 제외한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은 일단 완성된다. 이 전투는 그 외교적 영향면에서나 뛰어난 전술면에서 나폴레옹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필자는 작년 가을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로 슬로바키아의 블라티슬라바를 거쳐 체코의 브루노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잔 적이 있으나 21km 떨어진 아우스텔리츠엔 가보지 못했다. 브루노는 사회주의의 그늘이 아직 짙어 쓸쓸하게 보이는 아름다운 古都인데
17세기 이후 모라비아 지방의 수도이다. 인구 약40만의 브루노는 유전학자인 멘델이 연구했던 아우구스틴
수도원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도시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하나 있다. 20세기 모더니즘 건축의 대표 중 한 사람인 미스 판 델 로에가
지은 투겐트하트 저택이다. 1930년에 완성한 집이 세계문화유산이 된 것은 이 저택이 20세기의 실용적 주택의 한 모델이 되었기 때문이다.
로에는 바우하우스 건축思潮의 대표인물인데 이 현대식 저택을 지으면서 건축재료의 질감을 중시하고 단순한 공간을 선보였다. 들어가보니 서울 강남에
금방 지은 집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예약한 손님들만 받아주기 때문에 헛걸음을 할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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