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비교. 통계자료

''과거사 정리'' 대신 ''안정''을 택했다고요

鶴山 徐 仁 2005. 12. 1. 18:06

 

 

침대만 과학이 아니라 여론조사도 과학입니다. 제 주장이 아니라 여론조사 선진국이라고 할 수 있는 유럽과 미국 여론조사협회의 믿음입니다. 여론조사가 ‘과학’이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대표성 있는 표본을 엄격하게 선정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질문지를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방식으로 작성하는 것입니다.

조사결과 발표 시 표본오차를 밝히는 것이 일반화된 데서 알 수 있듯이 표본 선정에 대해선 우리도 제법 과학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질문지 작성의 과학에 대해선 그동안 관심이 부족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질문지 작성의 경우엔 과학성을 담보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지만 말입니다.

질문문항과 응답항목으로 이루어진 질문지 작성에 있어서 ‘과학’ 여부는 주로 응답항목에 달려 있습니다. 질문내용과 분석수준을 고려해 응답항목이 만들어져야 하며, 그 이전에 포괄성(응답자가 생각할 수 있는 내용이 모두 포함돼야 한다는 뜻입니다)과 상호배타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또한 전체 질문내용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Social Desirability)을 묻지 않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국무총리 산하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29일 ‘선진한국 국민의식’이라는 제목의 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지난달 17일부터 4일까지 한국갤럽에 의뢰 실시한 이 여론조사는 전국의 만 20세 이상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가정방문에 의한 개별면접방식으로 진행됐습니다(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 포인트입니다).

질문내용도 과학이어야 한다

먼저 언론에서 가장 많이 언급한 과거사 정리 대 사회 안정 질문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는데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와 “사회의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은 77.7% 대 22.3%로 나왔습니다.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것이 서로 배타적인 응답으로 구성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두 응답 모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을 묻고 있습니다.

과거 잘못을 바로잡는 것의 반대편 응답으론 잘못을 묻지 말고 그대로 안고 가자는 방향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만약 사회 안정을 이룩하는 것에 대해 묻고 싶다면 반대편 응답으로 어떤 형태로든 변화가 필요하다는 쪽으로 만들어야 서로 배타적인 응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방향으로 응답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봅니다. 만약 현재의 두 가지 응답항목으로 질문하고 싶다면, 서로 배타적으로 구성할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응답항목에 대한 동의 정도를 서로 비교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상호배타성과 Social Desirability에 위배되는 질문은 대개 응답결과를 사전에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고, 나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응답을 유도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음 두 가지 질문도 동일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새롭게 하기 위해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국민의 직접 참여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68.9%)는 응답이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정당의 역할이 더욱 강화되어야 한다’
(31.1%)는 응답보다 더 높게 나타났음.

‘양심적 병역 거부자에게는 대체복무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응답자가 전체 조사대상 국민의
24.6%였으며, ‘병역 의무는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75.3%로 나타났음.

현대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직접 참여는 제한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 직접 참여가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은 대안이 될 수 없습니다.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와 정당의 역할을 더 늘려야 하느냐 혹은 줄여야 하느냐는 쪽으로 응답항목을 만드는 것이 방법일 수 있겠습니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의 대체복무 방안 마련과 병역 의무의 평등한 부과 역시 상호배타성이 약합니다. 대체복무 방안을 마련하는 것의 반대편 응답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인정하거나 강제 징집하는 쪽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국민에게 평등하게 병역 의무를 부과하는 것의 반대편 응답은 일부에게 병역 관련 특혜 조치를 취하는 것입니다(가령, 면제 혹은 병역 특례 등).

더 큰 문제는 두 질문 모두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을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제 실현 가능성은 두고서라도) “국정의 모든 분야에서 국민의 직접 참여가 더욱 확대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반대해야 할 이유가 별로 없습니다. “모든 국민에게 병역 의무가 평등하게 부과되어야 한다는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하고 바람직한 방향입니다. 이 응답 대신 다른 응답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도 보편적 인권 존중돼야' 대 '공산주의자 인권까지 존중할 필요 없어'

국무총리 산하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의 여론조사 중 언론이 가장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내용은 ‘역동적 균형’에 대한 국민의식 부분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 질문내용에서 가장 많은 문제점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과학성이 부족한 조사결과를 대대적으로 발표했고 언론은 아무런 검토 없이 인용 보도했습니다.

끝으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문제를 하나 내겠습니다. 기념사업추진위 여론조사에 포함된 질문입니다. ‘공산주의자라고 하더라도 보편적 인권은 존중되어야 한다’와 ‘남북 대치상황에서 공산주의자의 인권까지 존중할 필요는 없다’는 두 가지 주장에 대한 응답결과가 어떻게 나왔을까요. 바람직하거나 윤리적인 방향을 묻는 쪽으로 응답이 많이 나온다는 것이 힌트입니다.

만약 당신이 조사결과를 대략적으로 맞혔다면, 이것은 제대로 된 ‘과학적인’ 질문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수고스럽겠지만 조사결과는 광복60년 기념사업추진위 홈페이지나 언론사 및 포탈 뉴스를 통해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