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내가 행복을 느꼈을 때(1) ~ (4)

鶴山 徐 仁 2005. 11. 25. 18:22
내가 행복을 느꼈을 때(1)
행복은 객관 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주관의 확립에서 온다
姜英勳   
 사람이 살아가면서 행복한 시간을 경험하는 데는 대체로 객관과 주관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불편함 없는 부잣집이나 名門大家(명문대가)에 태어났다고 반드시 행복을 느낀다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不幸하고, 미천한 가정에 태어났다고 해서 계속 불행하고 좌절된 인생을 살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사람마다 주어진 객관 조건 속에서 건실한 주관이 배양·발전되어 객관 조건을 주관에 따라 잘 활용하거나, 불우한 객관 조건 속에서 오히려 주관을 단련·발전시켜서 자기의 꿈을 실현해 나가는 강철 같은 의지야말로 행복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는 근본에는 인간의 본성은 善(선)하고 義(의)롭다는 性善說(성선설)을 전제로 한 이야기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生의 思考(사고) 근본에는 나의 성장기의 가정환경과 사회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가정환경에서는 아무 부족함이 없는 小地主겸 自作農에다 한학자이신 부친의 訓導(훈도)와 儒敎(유교)문화 분위기 속에서 받은 영향이요, 사회환경에서는 부친의 村落(촌락) 지도자로서의 일상에서 보는 지도자상과 불우한 농민들에 대한 同情心(동정심)에서 나오는 자기 자신의 꿈, 즉 주관의 발전이었다.
 주관의 성장발전에 있어 새로운 객관적 조건에 봉착하거나, 동일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였을 때 우리는 행복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그와 같은 나의 첫 번째 경험은 民族協和(민족협화) 王道樂土建設의 이론을 탐구한다고 하는 만주건국대학 학생시절 대학 건학정신과 현실 사이의 乖離(괴리) 때문에 고민할 때 국제주의와 친일동화주의로 가는 동창도 있었지만 六堂(육당) 崔南善(최남선) 선생의 薰陶(훈도)로 민족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기를 수 있게 되었을 때의 기쁨을 잊을 수가 없다.
 두 번째로 행복했던 순간은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던 날이었다. 이날은 두말할 것도 없이 우리 민족 모두 한없는 기쁨에 가득찬 날이었다. 오랜 세월 고대했던 기쁨인 만큼 그 기쁨의 깊이와 폭도 비할 수 없이 깊고 컸다 할 것이다. 오랜 세월 기다리며 노력한 목표에 도달하였을 때의 기쁨의 度(도)를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이, 「빨리 빨리」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참을성 없고 조급해서 개인이나 민족 전체의 입장에서 千年을 내다보는 웅대한 꿈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恨(한)이다.
 나의 세 번째 행복의 순간은 평생 伴侶(반려)를 만나 서로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며 부모님 승낙을 얻어 결혼하던 날의 기쁨이었다. 성서 구절 가운데도 있듯이 둘이 하나가 되는 신비 속에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은 모든 사람이 가지는 경험일 것이다. 이 신비 속에 나 자신도 나의 모든 것을 아내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다는 서약을 마음속으로 하였던 것이다. 한평생 살면서 이기심이 고개를 들 때에 나는 언제나 결혼식 때의 맹서를 반성한다. 행복한 순간의 連續(연속)을 위해 하느님은 우리에게 自省(자성)의 지혜를 주신 줄 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함은 인간만이 자성할 수 있는 점을 말한 것일 것이다. 그러나 자성이나 자기 희생도 愛己(애기)의 연장선상에서의 愛他(애타)이기 쉽다 할 것이다.
 나의 네 번째의 행복의 순간은 유일 절대자에 순종하기를 서약하면서 천주교인이 되는 날의 행복감이었다. 愛己·愛他를 초월한 행복감이라 할 것이다. 愛己·愛他를 초월하였을 때 나는 어떤 이념의 객관 조건에 부딪쳐도 그것은 나에 대한 하느님의 시련이요, 격려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민이야 왜 없으랴. 그러나 그 고민 속에서도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나 온 한평생 행복한 순간 순간을 생각하면서 행복은 스스로 주어지거나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객관 조건을 통제할 수 있는 주관의 확립에서 오는 것이며, 오래 참고 노력한 끝에 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뿐이겠는가. 진정한 幸福은 나를 희생하여 상대방을 위하는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며, 무한한 행복은 小我(소아)를 초월하는 순간에 내려지는 것이라 생각된다. 小我를 초월한다고 해서 한 번 하면 永久不變(영구불변)한 것이 아님은 두말할 것도 없다. 계속 참고 인내하며 노력한 끝에 달성된 꿈의 실현 속에서와,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위하며 사회를 위하여 봉사하였을 때에 경험하는 것이 喜悅感(희열감)이요, 幸福感(행복감)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행복감은 어디까지나 자기 입장에서의 행복감이지만 진정한 순수무구한 행복감은 小我를 초월할 때에 가능한 것이라고 믿는다.
[ 2005-11-22, 09:50 ]

 

 

 

내가 행복을 느꼈을 때(2)
구걸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행복입니다
嚴相益   

 『이거 암 같은데…』
 
 CT 검사를 하던 의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마흔다섯 중년의 나이에 우연히 친구병원에서 신체검사를 하던 중이었다.
 『이거 아무래도 암 같은데…』
 의사인 친구가 무심코 툭 뱉었다. 그 한 마디가 날카로운 창 끝이 되어 나의 가슴에 와서 박혔다. 얼떨떨했다. 의사가 입을 열었다.
 『쓸개에 1.5cm짜리 혹이 보여』
 『설마…』
 나는 겁에 가득 질린 눈으로 의사를 올려다 보았다.
 『이 정도의 크기면 악성으로 됐을 확률도 많은데…』
 유명 전문의의 자신감에 찬 진단이었다. 그 선고를 받고 병원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이미 반쯤 죽어 있었다. 그동안 쌓아온 허깨비 같던 삶의 구조물들이 힘없이 허물어졌다. 내 몸 같던 가족도 함께 저 세상으로 가는 게 아닌가.
 의욕을 상실한 채 드러누워 있었다. 이상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무의식은 내가 당한 불행을 강하게 부인했다. 얼마 전 죽은 사촌형도 그랬다. 폐암을 선고받은 형은 죽기 전 엑스레이 필름을 내게 보냈다. 실력 있는 의사에게 보여서 확인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를 검사한 의사친구는 생명이 석 달 정도 남았다고 판단했다. 사촌형은 그 말대로 정확히 석 달 후에 죽었다. 그는 誤診이기를 바라면서 평소에 하던 금은 세공 일을 계속 하다가 갑자기 호흡곤란이 오자 죽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자니 답답했다. 살아 있는 동안은 마지막까지 이 세상 일을 하는 게 의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수술 스케줄을 잡아놓고 다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세상이 다시 보였다. 불쌍하게만 보이던 무기징역을 사는 죄수가 부러웠다. 받으면 기분이 좋던 돈도 시큰둥해졌다. 나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자책감이 들었다. 공기 중에 연기가 되어 사라질 허무한 내 몸뚱이에만 나는 봉사해 온 것이다. 수술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일단 나는 정리를 시작했다. 맡은 사건을 아는 변호사들에게 부탁했다. 아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하직 인사를 했다. 수술 전날 담당의사가 나를 불러 이렇게 설명했다.
 『암이 주위에 전이 되어 있으면 사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암은 생존기간이 6개월 정도입니다. 여기 서명 날인하시죠』
 의사가 내놓는 동의서에 사인을 하면서 비로소 실감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일단 주변을 정리해 둘 필요가 있었다. 아내에게 자식을 부탁했다. 새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문제는 늙은 홀어머니였다. 혼자 월남해서 핏줄이라곤 나 하나였다. 대책이 없었다. 나는 힘들게 입을 열었다.
 『만약 내가 죽으면 양로원으로 가세요. 죄송해요. 어머니』
 투명한 눈물 방울이 어머니의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내 걱정은 말어. 네가 시키는 대로 할게』
 대충 정리를 했다. 살고 싶었다. 나는 비로소 어느 종교단체 담 모퉁이에 써 있는 「구걸 할 수 있는 힘만 있어도 그것은 행복입니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음날 오전 비감한 마음으로 병원을 향했다. 세상은 봄의 향연이 펼쳐졌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흘러갔다. 야산에는 연록색 잎들이 아기 피부같이 부드럽게 돋아난 모습이 보였다. 그 총천연색 파노라마를 나는 처음 보았다. 이전에는 왜 그 경이가 흑백의 빛바랜 필름보다 못했을까. 돈에, 자리에 취해 있던 나는 그것들을 볼 마음의 눈이 없었다.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얼마 후 나는 개구리처럼 발가벗긴 채 십자형의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의사들이 주위에 둘러서서 무감각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마취의가 내 코에 가스를 흡입시키는 중이었다. 나는 마지막 기도를 했다.
 「세상에 태어나 잘 살다 갑니다. 감사합니다. 죽어도 좋습니다. 각오가 됐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요」
 갑자기 수술실 천장이 두 쪽이 나면서 나는 깊은 어둠의 심연 속에 빠져 들어갔다. 그곳은 아무것도 없는 無의 세계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어둠 가득한 넓은 창고 한구석에 나는 쥐처럼 웅크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 두런거리는 소리가 아스라이 들렸다. 여기가 어딜까 하는 의식이 드는 순간 눈꺼풀이 열리면서 확 밝은 세상이 나타났다. 의사 두 명이 내 옆에서 떠들고 있었다. 여섯 시간의 수술 끝에 나는 살아났다. 나는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숨을 쉴 수 있고 아름다운 색채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이후로 삶은 매일의 축제였다. 자연은 무한한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갤러리였다.
[ 2005-11-23, 09:29 ]

 

 

 

내가 행복을 느꼈을 때(3)
눈 오던 날 어머니의 체온
김진선   

 행복이란 신기루인가?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고 많은 것들이 그 본래의 의미와 색깔이 바래가는 요즈음에도, 아직 순수가 남아 있는 단어들이 있다.
 「행복」이라는 말도 그 중 하나가 아닐까?
 그러기에 TV 드라마나 범람하는 출판물 속에서 「행복론」이 여전히 중요한 話頭로 등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저마다 행복, 행복 하며 살아가는데, 과연 그 행복이란 게 도대체 무엇일까?
 『행복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행복 이외의 무엇인가를 목적으로 삼는 것이다』고 J.S. 밀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몸살을 앓듯 좇는 행복이라는 건 신기루란 말인가?
 혹자가 말하는 것처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한다면, 찌든 가난 속에 늘 부족함에 익숙해져 살아온 내 청년기까지의 기억 속에 그 무슨 행복한 순간이 있으랴.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단순히 지난 일에 대한 관대함이나 미화 때문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행복이란 어떤 한순간의 교감에 의해 느껴지는 자기 영혼의 미세한 떨림 같은 것이다.
 성찬 뒤의 포만감 따위와는 전혀 다른, 기다림만으로도 즐겁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초의 일이다.
 겨울이 뒷모습을 보이고 저만치 갔건만 여전히 쌀쌀하던 때였다.
 학교가 파할 때쯤부터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우리 집까지는 5리가 족히 넘어 그때 그 나이로서는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나는 담담히 학교 문을 나섰다.
 얼마쯤 걸었을까? 진눈깨비가 눈 앞을 가릴 정도로 쏟아지기 시작했고, 바람 역시 억세게 몰아쳐 걸음을 옮기기가 힘들 정도였다.
 바로 그때, 목을 움츠리고 고개를 푹 숙인 내 앞에 내 이름을 부르며 우뚝 앞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다.
 어머니였다.
 손에 무언가 포대기 같은 것을 드신 어머니였다.
 마땅히 병석에 누워 계셔야 할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오신 것이다.
 엄마는 나를 치마에 감싸 안으시고 눈비에 젖은 머리칼이며 얼굴을 닦아 주시고, 곧 업으셨다.
 기억이 머무는 저기 저 끝에 내가 어머니 등에 업힌 일이 희미하게 남아 있으니, 그날 그일이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인 어머니 등이다.
 포대기에 싸인 어머니의 등에서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병약한 몸에 진눈깨비 속을 헤쳐 가시며 가쁘게 몰아쉬는 어머니의 숨소리가 들썩이는 어머니의 가냘픈 등을 통해 들려왔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편안함, 그 따뜻함 속에서 왠지 모르게 자꾸만 눈물이 난 것 같다.
 
 병든 몸으로 자식을 등에 업고
 
 돌아가실 때까지 병석에 누워 계신 날이 많던 어머니.
 産後 조리를 잘못 해서 얻은 병이라고 했다.
 그런 어머니와 나는 서로 주고받은 대화도 많지 않았고, 내가 엄마에게 살갑게 군 것 같지도 않다.
 나는 그저, 어머니를 대신해서,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어머니는 그걸 안타까운 눈으로 힘없이 바라보실 뿐이었다.
 지금 기억으로는, 그날 그일이, 나와 어머니가 체온을 서로 나누며 함께했던 가장 긴 시간이었다. 내가 그때 어머니 등에서 가졌던 것과 똑같은 느낌을 아마 어머니도 느끼지 않았을까? 분명 그러셨을 게다.
 진눈깨비 속을 걸어올 자식이 눈에 밟혀 마중을 나오셨고, 자식을 등에 업고 병든 몸에 숨이 가빠 괴로우셨겠지만, 자식을 위해 당신께서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큰 기쁨이셨을 게다.
 만일 그때 어머니의 마음이 그렇지 않으셨다면, 내가 지금 그 일이 이토록 행복하게 여겨지지는 않을 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느끼는 행복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혼자만의 思惟(사유) 끝에 누릴 수 있는 만족스러움과는 또 다른, 측은지심의 공유 같은 것 말이다.
 톨스토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제가 인간이 되어서도 살아갈 수 있던 것은, 자신의 일을 걱정하고 염려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길을 가던 한 사람과 그 아내의 마음속에 깃든 사랑, 그들이 제게 보여준 동정심과 관심 때문이었습니다』라고 썼다.
 동정심과 관심을 서로 주고받는 것 - 그것이 곧 사랑이요, 행복의 원천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운 어머니
 
 내가 광복 이듬해 태어났으니, 그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호사와는 먼 삶을 사셨을 테지만, 병마에 시달리시던 내 어머니의 삶은 너무나 쓸쓸하셨으나, 자식에 대한 無言의 관심만은 남다르셨다.
 그 시절 그 어려웠던 시기에, 내가 절망의 벼랑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등에서 느낀 어머니의 사랑, 어머니의 체온이 늘 내 온몸과 온 마음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학업에서도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았음은 물론, 웅변이나 체육 등 학생회 특별활동으로 보람찬 생활을 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분의 애정 덕택이었고, 그분의 기쁨을 보는 내 기쁨 때문이었다.
 웬만한 세상일은 모두 알 나이였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백결 선생」이란 별명을 가질 만큼 누더기 교복을 입고 다녔지만, 내가 그걸 「불행」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는 것 또한 바로 그 때문이었다.
 고시에 합격하고,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맞아 자식을 셋씩이나 둔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에게 왜 즐겁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 없었으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끼니조차 잇기 어렵도록 가난했던 그때 그 시절의 일들이 더욱 행복스럽게 느껴지는 것은,『행복은 일상 속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제 깨달았기 때문도 아니요, 추억은 그저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지금은 없는 어머니의 동정심과 관심이 그때는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일을 누구보다도 기쁨으로 보아 주셨던 어머님의 사랑말이다.
 행복은 그런 것이다.
[ 2005-11-24, 10:14 ]

 

 

 

내가 행복을 느꼈을 때(4)
二星장군, 그는 30년 前 시험비행 때
金璟悟   

 미국 유학생활
 
 「한국 최초 여자 조종사 탄생, 공군소위 김경오」 1952년 5월12일자 국내 신문에 난 기사 제목이다. 신문 1면에 사진과 함께 난 기사를 보는 순간 가슴이 두근거리고 북받치는 흥분과 감격을 감당하기 힘들었다.
 이때부터 「한국 최초」라는 수식어가 꼭 붙어 다녔고, 온 국민의 격려와 사랑을 받으면서 하늘에서 땅에서 나의 생활은 절도 있게 바빴다. 내가 이 나라에 최초를 장식했다는 것도 뿌듯했지만 유명인이 되어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생활해야 하는 초긴장 인생은 무한한 행복감을 준다. 6·25 전쟁 중에는 6개의 훈장을 가슴에 달았고, 3시간20분 연속비행 공로로 渡美(도미), 유학길에 올랐다. 내가 살던 곳은 대부분 6·25 전쟁 중 한국에 참전한 사람들이 살았다.
 그래서인지 나에 관해 관심이 많았고, 신문에 나에 관한 기사가 크게 실리기도 했다. 당시 최장수 TV프로그램인 NBC 「나의 비밀」 프로그램에 출연해 1000달러 현금과 1만 달러어치의 부상도 받았다.
 공부할 시간은 없고, 「라이프 매거진」, 「뉴스위크」, 「타임」, 「리더스 다이제스트」 등의 언론과 인터뷰하기에 매일 바빴다. 밀러 총장은 개교한 지 120년 만에 처음으로 학교 선전이 되니까 좋아했다. 그러나 학점은 에누리 없이 냉정하여 F학점 두 개는 보통이었다. 나는 완전 인기 스타가 되어 캠퍼스를 걸으면 남학생들이 앞다투어 프러포즈를 했다. 내콧대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그러나 한 시간 접시 닦으면 50달러를 받는 상황에서 한 시간 비행교육비가 25달러인데 참으로 힘든 노동을 해야만 했다. 세 시간 수면을 취하고 그 외 시간에 학비·훈련비를 위해 뛰다보니 언제나 입술은 부르텄다.
 
 李承晩 대통령의 격려가 힘이 되어
 
 1953년 금의환향 후. 미국 50개 州 중 32개 州를 다니며 모금을 했다.
 눈만 뜨면 신문, 라디오, TV 등 인터뷰에 분주했다. 「한국의 홍일점 김경오 조종사를 돕자」는 기사로 인해 후원회가 생기게 되었고, 초청강연료도 100달러에서 300달러로 뛰었다. 각국 주재 한국대사관에서는 한국 홍보에 기여도가 크다며 격려 편지와 전화가 날아들었다.
 내 나이 25세 청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었던 힘은 대통령 李承晩의 『김경오 대위는 우리나라 단 하나밖에 없는 여자 비행사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꼭 성공하고 돌아와서 나라에 힘이 되세요』 이 짧은 한마디 말씀 때문이었다.
 귀국하니 이승만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고 군사 정부의 찬바람만이 불었다. 1963년 10월30일 미국에서 가져온 비행기로 당시 여의도 비행장에서 명명식과 시험비행을 했다. 2만 관중의 박수를 받으며 나는 높이 6000피트(feet) 고도를 취했다. 이 순간을 위해 긴 세월 참고 인내하고 노력했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파이퍼콜트(기명)機 양 날개로 춤을 추었다.
 시험비행을 마치고 착륙하니 관중 대표로 소년 한 명을 태워 달라는 청이 들어왔다. 아주 귀엽고 건강한 중학생이었다. 뒷좌석에 태우고 강원도 삼척에 착륙하여 바다도 보여 주고 모래도 밟게 했다. 소년은 매우 수줍어했다.
 1992년 2월 공군참모총장을 비롯 여러 명의 참모와 같이 오찬을 하게 됐다. 원탁 테이블에 음식이 놓였고, 내 바로 옆에 二星장군(별 두 개)이 앉았다. 역시 軍隊는 계급이라더니 총장 앞의 기라성 같은 장군들이 근엄한 자세로 식사를 했다. 참으로 딱딱한 분위기에 목에 음식 넘어가는 소리도 조심스러웠다. 주식이 끝나고 후식이 들어올 무렵 정막을 깨고 옆에 二星장군이 조용히, 아주 조용히 나에게 말했다.
 『저, 아주 옛날 이야긴데요. 그러니까 1963년 말인데 여의도 비행장에서 시험비행할 때 혹시 소년 태운 것을 기억하십니까?』
 그저 무심코 듣는 순간 그렇게 오랜 세월 궁금해했던 생각이 떠올라 『네, 혹시 그 소년의 소식을 아시나요?』 하니까 그는 매우 멋쩍은 표정을 하면서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세상에 이럴 수가, 그 얘기 왜 지금 하시는 겁니까?』
 나는 벌떡 일어나 그 장군을 쳐다본 순간 또 한 번 놀랐다. 180cm가 넘는 키에 잘생긴 외모, 양쪽 어깨 위에 빛나는 별, 영문을 모르는 참모총장과 참모들은 나의 돌발 행동에 그저쳐다만 보았다.
 그 장군은 현재 공군 요직에 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 비행기에 태운 그 소년이 오늘날 이렇게 큰사람이 됐구나 생각하니 절로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된다.
[ 2005-11-25, 1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