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소리·벌레소리에 실려 피아노 선율은 계곡을 흐르고…
나이 50에 학원장 박차고 오지로 오지로
길손에 슈베르트 들려주며 텃밭생활 18년
“이젠 그렇게 싫었던 세상이 그리워져…”
계곡길을 걷던 사람들이 그 선율에 홀려 언덕 위 집 마당에 들어서면 기다렸다는 듯이 한 노인이 나와 선물을 한아름 안기곤 했다. 텃밭에서
가꾼 콩, 부침개, 과실주…. 놀란 얼굴들이 다시 연주를 청하면 백발 성성한 노인은 방 안으로 들어갔고, 방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고
물으면 빙긋 웃었고, 행여 신문·방송에서 찾아오면 어느 틈에 피아니스트는 문을 꽁꽁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수수께끼. 하지만 덕풍계곡을 찾는
사람들 사이에 ‘산 속의 피아니스트’는 금세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주인공, 정세근(鄭世根·69). 서울에서 피아노학원을 운영하던 사내였다. 대학은 나오지 않았지만 가톨릭 미사곡도 여럿 지으며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울은 내가 살 곳이 아니더라”고 했다. “사람들이랑 부대끼며 사는 것도 지쳤고, 그래, 어디 숨어서 피아노만 치고
살다가 늙어 죽자고 했어요.”
2년 동안 전국 오지란 오지는 다 헤매고 다닌 끝에 1987년 이 계곡으로 마음을 정했다. 당시 이 집에 살던 노부부를 아홉 번 찾아
졸라대 집을 얻었다. 길도 없던 시절, 리어카에 실었던 피아노는 리어카째로 마을 청년들과 함께 날랐다. 그날 밤 처음으로 계곡에 피아노 소리가
울렸다. “그때 기분, 아무도 몰라요.” 그날을 회상하는 노 피아니스트의 얼굴이 밝아진다.
그해 여름, “혼자 살다 죽으려던” 사내 앞에 난데없이 미래의 아내가 나타났다. 오지를 찾고 있던 1986년 고속버스를 같이 탔던
김미옥(42)씨였다. 옆자리에 앉아 청포도와 송편을 얻어먹고, 답례로 책 한 권 사줬던 그 젊은 여인. 그때 연락처를 묻고선 몇 차례 안부전화를
하던 여인. 어느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녀가 아침밥을 짓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라고 했다고 한다. 운명 혹은 고집이라고
하자. 스물일곱 살 차이가 나는 두 영혼이 산중에서 만나 성당에서 혼인식을 치렀다. 그리고 아들 둘을 얻었다. 욕심 다 버리고 들어온 집,
치부(致富)할 마음은 애당초 없었다. 집에 딸린 밭과 과수원에서 이것저것 길러 먹는 게 전부다. 밭 몇 뙈기 소출로 ‘두 식구’ 먹고 나그네들
음식 해서 나눠주면 끝이다. 중2, 중3인 아이들은 대전 친지 집에서 학교를 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지난해 11월 땔감으로 쓸 참나무를 베다가 피아니스트는 그만 쓰러지는 나무에 깔려 뇌를 다쳤다. 다발성 뇌출혈.
의사들은 “살 가능성 1%”라고 했다. 부부는 포기하지 않았다.
“전남 나주에 ‘나주 성모님집’이라고 있어요. 아내가 그곳에서 떠온 물로 저를 닦아주고 기도하고 했어요….” ‘피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상’으로 알려진 곳이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정세근씨는 이틀 만에 눈을 뜨고 22일 만에 퇴원을 했다고 한다. 피아니스트는 아내의
기도와 신앙이 자기를 낫게 했다고 굳게 믿는다.
앞으로 어찌하실 거냐고 물으니 “이제 늙어서…”라며 말꼬리를 흐린다. 자, 아이들은 외지에 나가 있고 아니꼬웠던 세상이 조금은 그립다.
언뜻 얼굴에 그리움이 스쳐간다. 언젠가 이 집 주인이 바뀌지 않을까, 그런 느낌이 묻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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