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도시 프놈펜..
그 곳의 아픔을 안다는 건 무리다.
캄보디아 인들의 죽음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를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그들 만큼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 역시 거짓말이다.
눈물이 났다..가슴에서 부터 우러 나오는 슬픔..
그것은 죽은자에게 느끼는 산자의 미안함이었다.
'
툴슬랭 박물관'과 '킬링필드'는 1975년 4월에서 1979년 1월까지
폴폿과 크메르루즈가 자행한 만행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캄보디아 인들은 귀신을 믿는다고 했다
새벽녁 같은 시간에 이유없이 개들이 짖는다고 한다.
옛부터 개는 귀신을 본다는 말이 있다.
툴슬랭 박물관
원래는 1962년에 개교한 고등학교다.
크메르루즈군이 프놈펜에 입성한 후 폴폿의 보안대 건물로 개조된 곳으로
고문과 살인이 아무런 제재없이 자행되던 곳이기도 하다.
크메르루즈군은 주로 13세에서 18세의 인격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소년들로 이루어졌다.
'나는 정복자로 왔노라'를 외치면 약 200만명의 론놀의 추종자들을 죽였다.
스님.영문서적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안경를 쓴 사람들,손에 굳은 살이 없는 사람들.....
그들에게 인텔리는 죽임의 대상이며 이유 없는 악의 존재였다.
야자 나무에는 아직도 채찍의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방방마다 살해한 장면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고문 침대..
아직도 바닥에는 피자국이 남아있다.
이 사진을 찍고 이들은 바로 살해 되었다.
어떤 이유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그들의 만행을 볼수 있는 자료들이다.
정말 무서운건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표정 없이 카메라 앵글을 바라보던 이들의 마지막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그 당시 내무부 장관 부인의 사진이다.
돌이 채 지나지 않은 아이를 안고 무표정한 모습이지만
한방울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
아이의 운명은....
위 여인의 옆 모습으로 너무도 잔인하게 뒤에서 뇌를 찔러서 죽이는 장면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는다는게 너무나 두려웠다.
툴슬랭에서 고문한 사람들을 집단 살해한 킬링 필드..
1980년에 발견된 이곳은 유골들들 모아 성별 나이별로 탑안에 전시 되어있다.
8900여개의 대부분의 유골들은 머리뼈가 갈라져 있다.
총알이 아깝다는 이유로 쇠막대기나 팜나무 줄기등을 이용해 처형 했다고 한다.
유골탑
죽어서는 좀 편했으면 좋으련만..
유골이 있었던 무덤들
킬링필드의 아이들
기브 미 캔디를 외치면 따라 붙던 아이들이다.
사탕을 주었지만 서로 싸우는 모습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거리에는 아이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학살로 인해서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 40%를 차지하는 인구 피라미드를 형성하고 있다.
카메라를 보더니 포즈를 취한다.
힘든 생활 속에서도 천진함은 남아 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가져다준 티셔츠인 듯하다
비더 레드가 적혀 있다.
프놈펜을 관광한다고 표현하기는 어렵다.
눈물 없이는 이곳을 보기가 어렵다.
다들 말 잇지 못했다..
남편이나 아들놈 역시 마음이 무거웠는지 말이 없었다.
괜히 왔다고 후회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너무나 억울하게 죽었는데 모든 사람이 외면한다면 얼마나 슬플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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