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ree Opinion

영국 魂은 굴하지 않는다

鶴山 徐 仁 2005. 9. 19. 17:24
동시다발 폭탄테러와 싸우는 런던 市民의 강인함을 배우자   
日 PHP연구소 간행 Voice 9월호 - 도미야마 야스시(富山泰) 국제저널리스트

시민들은 냉정 침착했다
런던의 명물인 2층 버스와 지하철을 통근시간대에 노린 7월 7일의 동시 폭탄 테러에 영국인들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지하에 갇혀 버린 승객은 패닉현상조차 일으키지 않고 경관의 지시에 좇아 침착하게 피난했다. 테러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런던 시민들의 일상 복귀도 빠르게 이루어졌다.

국가 비상사태에 영국인들이 보여준 이와 같은 강인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 비밀을 찾으려 할수록 동경에서 만약 그와 같은 테러가 일어났을 경우 일본인들이 영국인들처럼 냉정하게 행동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런던의 지하철 역사는 일본의 메이지유신(1868년)보다 빨라 1863년에 이미 세계 최초의 지하철인 서클라인의 일부가 도입되었다. 일본의 지하철에 비해 차량은 작고 노후화했지만 런던의 지하철은 시민생활과 불가분한 필수시설이 되어 있다.

日 Voice 9월호
한편 버스는 시내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고 운임도 지하철의 거의 반값 정도로 싼 데다 철야 운전하는 ‘나이트 버스’도 있기 때문에 지하철 이상으로 시민이 애호하고 있다. 차내에서 정거장 안내 같은 것은 없고 지리에 밝지 못한 승객에게는 친절 결여로 느껴지는 것이 ‘옥에 티’라 하겠지만 익숙해지면 이것처럼 편리한 교통기관도 없다. 거의 2층짜리 빨간 버스로서 런던 명물의 하나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지하철과 버스는 런던 시민의 ‘발’ 구실을 해 온 셈이다. 이 가장 서민적인 두 개의 공공 교통기관이 테러분자들에게 동시에 폭파당했다는 충격이 적을 리가 없다.

그런데 런던 시민의 대부분은 7일의 테러에 당황해하지 않고 시종 냉정 침착한 행동을 취했다. 지하에 갇혀버린 승객 대부분이 피난 통로로 한꺼번에 쇄도하지 않고 침착하게 행동함으로써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경찰, 소방, 의료관계자의 긴급 대응팀은 재빠르게 구조활동을 펴 시민들로부터 절찬을 받았다.

일반 시민의 살상을 노린 무차별 테러의 실태가 밝혀졌는데도 사람들은 위험을 피해서 집안에만 있지 않고 보통 때와 다름없이 일상 생활에 의연하게 복귀했다.

이 사건 후 BBC 등 영국의 주요 보도기관의 웹사이트는 테러에 굴하지 말고 단결하자고 호소하는 시민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파키스탄계 영국적을 가진 이슬람 과격파 4명이 실행한 자폭 테러로 판명된 뒤에도, 여론의 기조는 달라지지 않았다. 사이트에 올라온 시민들의 목소리와 영국 체재중인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영국인의 이 인내심 강한 체질의 비밀을 찾아보고자 한다.

‘괴로워도 불평을 말하지 말라’

먼저 지하철 승객의 태반이 패닉에 빠지지 않았던 요인의 하나는 폭탄 테러의 발생을 통보받지 않았다는 데 있다.

출근길 승객으로 혼잡한 런던 지하철 3개선이 거의 동시에 폭파된 것은 7월 7일 오전 8시 50분경이었다. 폭파 현장 지하철에 타고 있던 여성 승객에 의하면, 폭발음이 들리고 주변이 정전이 되어, 승객들이 전기 고장인가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킹스크로즈역에 러셀스퀘어역으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다른 폭발을 만난 승객 한 사람도 타고 있던 승객의 거의 전원이 전기 계통의 고장인 줄로 알고 30분 후에 구출될 때까지 냉정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설사 폭탄테러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뭔가 큰 사고가 났구나 하는 느낌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가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승객은 패닉에 빠지지 않았다. 승객이 패닉에 빠지지 않은 큰 요인의 하나로서 어린 시절부터 가정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진 교육을 지적하는 이도 적지 않다.

어떤 영국인은 “우리들은 괴로워도 불평을 말하지 않고 감정을 억제하도록 길들여져 있다”고 말했으며, 영국 체류 20년 이상된 일본 여성도 “큰 소리를 내지 않는다든가 패닉에 빠지지 않는다는 교육이 행해지고 있어, 그 성과일지 모른다”고 동의하고 있다.

킹즈크로스역을 출발한 후 폭파된 차량에 때마침 타고 있었던 승객은 큰 폭발이 일어나고 차 안이 캄캄해지고 연기가 자욱하여 ‘이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증언했다. 얼마 후 비상등이 켜지고 참사가 일어난 것을 알게 되자 차 안에서 비명소리가 났지만 승객들은 서로 말을 나눔으로써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애썼으며 차내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기관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 승객은 “연기로 숨쉬기 힘들게 됐지만 패닉에 빠지면 정말로 끝장이라고 판단했다”고 회상한다. 또 “회사의 상사가 지각한 것을 따지고 들면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죠”라고 조크를 던져 주위의 승객들을 웃기는 여유를 가졌다고 증언했다. 경관에 의해 유도되어 전동차에서 탈출하는 시간은 20~30분간인데, 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순간 냉정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유머마저 잃지 않았다는 것은 높이 평가할 일이다. 그것이 교육의 성과라면 역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확립된 危機 관리 시스템

지면(知面) 있는 영국인의 얘기를 들으면 “긴급사태에 대한 당국의 체제가 확립돼 있고 경찰·소방·의료 등 여러 기관이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되어 있기 때문에 냉정하고 신속하게 행동할 수 있었고, 승객을 안전하게 유도하여 희생자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고 한다.

런던 금융가 중심의 영국 중앙은행에 근접한 뱅크역에서는 2003년 9월 약 500명의 경관·소방사와 인근의 병원 스탭이 참가해 동경의 지하철 사린 사건과 같은 화학 테러에 대비한 가상 구조 훈련이 실시됐었다. 뱅크역은 이번 폭파 현장인 비바풀스트리트역의 이웃에 있다. 이번의 테러는 화학무기는 아니고 보통의 폭탄이 쓰였는데 2년 전의 훈련이 이번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일본에도 이와 같은 위기관리 시스템이 확립돼 있을 것인가.

영국인은 2001년 9월의 미국 9·11 테러 이후 영국도 조만간 테러를 당할 가능성을 깨닫고 있었다. 특히 미영 주도의 이라크전을 적극 지지한 스페인에서 2004년 3월에 대규모 열차 폭탄테러가 일어난 후로는 런던 경시청 경시총감부터가 “런던에 어떠한 공격이 가해지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발언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이번 테러는 런던 시민으로서는 예상 밖의 일은 아니었다. 영국에서는 테러리스트에 대한 경계가 엄해서 폭탄테러를 일으키기란 어렵지 않겠는가 라는 희망적 억측이 시민 일부에 있기는 했지만, 미리 예상해 왔었던 만큼 사건의 충격은 그만큼 적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인은 1970년대에서 1990년대 중반까지 영국 영내 북아일랜드의 카톨릭 과격파 아일랜드 공화군(IRA)에 의한 폭탄 투쟁을 경험했다.
그러나 IRA의 폭탄테러는 영국정부에 정치적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주목적이고 시민을 말려 들게 하지 않도록 사전 경고를 발하기도 하여 시민의 살상을 목적으로 하는 무차별 테러와는 성질이 다르다. 영국인으로서도 이번과 같은 무차별 폭탄테러는 첫 경험인 것이다.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블레어 총리는 폭탄 테러 발생 보고를 받은 7일, 선진국 정상회의 개최 중이던 북부의 그렌이글즈에서 런던으로 긴급 귀환해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해 테러와 싸울 결의를 표명했다.

“그들(테러리스트)이 위협하려 하지만 우리들은 위협받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들의 나라나 생활양식을 이러한 방법으로 바꾸려 하지만 우리들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이 국민을 분열시키든가 국민의 결의를 약화시키려 해도 우리들은 분열하지 않으며 우리들의 결의는 흔들림이 없다… 테러리즘의 목적은 사람들을 두렵게 하려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총리의 성명에 공감해 BBC 등의 사이트는 테러에 굴하지 않고 단결하도록 호소하는 국민의 목소리로 가득찼다.
사실 폭탄테러는 런던에서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총회가 열려 파리 등의 여러 라이벌 도시를 물리치고 2012년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됨으로써 시내가 환희의 도가니에 빠졌었던 7월 6일 다음날 아침 일어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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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民族국가 영국, 테러 영향 없어

국가 비상시에 단결하고 불굴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은 영국인이 자랑하는 국민성이기도 하다. 이러한 국민성은 기원 전후의 로마군 침공, 8~10세기의 바이킹 내습, 11세기의 노르만인의 정복, 프랑스와의 수차례의 전쟁 등 약 2천년에 걸쳐 외적과 싸워 온 영국 역사를 배경으로 배양되었다. 특히 제2차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한 영국 본토 공습을 견뎌내고 전후에는 IRA의 폭탄테러를 체험함으로써 국민의 대비태세나 저항력이 강해졌다고 한다.

한편 문제는 테러범들이 파키스탄계 3명, 자마이카계 1명 등 모두 영국 국적의 청년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영국은 문자 그대로 다민족 다문화국가이다. 제2차 대전 후에는 식민지가 모두 독립을 하였고, 대영제국이 해체됨과 동시에 1950년대 중반부터 구 식민지인 자마이카 등 서인도제도의 흑인이나 인도·파키스탄계의 이민이 늘어났다. 지금이야말로 런던은 대영제국의 축소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각종 잡다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에는 유럽연합(EU)의 동방 확대에 따라 동유럽으로부터 슬라브계 백인의 타관벌이 노동자도 증가해 다민족화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영국적의 이슬람 과격파에 의한 자폭 테러이었음이 판명된 후에도, BBC 등의 사이트에는 ‘영국의 강함은 다양성에 있다’면서, 일반의 이슬람 교인 보복을 경계하고 국민의 단결을 재삼 호소하는 여론이 계속 주류를 이루었다.

일본은 테러 대비 미흡

일본의 입장에서 런던의 동시 다발 테러가 결코 강건너 불일 수만은 없다. 일본은 테러와의 전쟁에서 미국과의 연대를 명확히 표명하고 이라크전 개전 이후 다국적군의 일부로서 자위대를 이라크에 파견하고 있는 만큼, 테러리스트의 표적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동경 지하철이나 신간선 등 공공 교통기관을 표적으로 하는 자폭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영국인이 테러에 왜 냉정히 대처할 수 있었는가를 분석해보면 일본 국민들이 같은 수준으로 대처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일본은 영국과 달라서 공공 교통기관의 고장이 거의 없으므로, 폭탄테러가 발생했을 때 승객이 고장으로 여기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비상시에 패닉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교육도 받지 않으므로 ‘피난 통로로 내가 먼저’하는 식으로 덤비는 승객이 줄줄이 넘어져 피해가 확대되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영국인과 달리 일본인은 폭탄테러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고도 볼 수도 없다. 역사적으로 일본이 외적의 침공을 받은 예는 가미구라(鎌倉)시대의 몽골 내습(蒙古 內襲)뿐이고, 태평양전쟁 말기에 동경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미군에 의한 공습을 겪은 체험은 있어도, 이로 인해 일본국민이 비상시의 저항력이 강화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 없다.

번역/李英勳 교포교육연구소 대표
미래한국  2005-09-17 오후 9:5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