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교수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김용준’이 아니라 ‘가네미쓰요슝(金光容駿김광용준)이었다”고 말하고 “지금도 소학교에 다니던 때 밤
자정 무렵에 나가 중국으로 가는 출정군인(出征軍人)을 환송하느라 일장기를 손에 들고 천황폐하를 부르짖던 추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했다. 김
교수는 그런 속에서 “천황폐하의 赤子적자로서 폐하를 위해 내 생명을 새털과 같이 바치는 일이야말로 男兒남아로서 가장 보람있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던” 자신이 춘원의 소설을 읽고 “조선 사람들의 생활 배경에서 황국신민의 세계와는 분명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한글
일기를 쓰게 됐다”고 옛일을 돌아봤다. 그는 “춘원을 친일 문인 운운하며 매도하는 기사를 대할 때마다 그래도 나는 춘원을 나무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면서 “춘원의 친일 행각을 옹호하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가 나를 충직한 황국신민으로부터 한국사람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란 사실을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교수는 고려대 설립자인 仁村인촌 金性洙김성수에 대해서도 “좀처럼 남을 칭찬 안하는 (종교인) 多夕다석 柳永模유영모선생이 두시간 넘게
인촌을 칭찬하는 걸 듣고 알게 됐다”며 “내가 高大고대를 택한 것은 다석이 심어준 인촌의 모습 때문이며 지금까지 高大고대 교수였음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김 교수는 일제 통치 36년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는 1927년에 태어나 유년기에서 청년기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겪고 출정군인을 전송하면서
일장기 흔들며 ‘천황폐하’를 외쳤던 그 시대의 숱한 젊은이 가운데 한사람이다.
김 교수의 述懷술회는 우리가 겪어보지 않았던 인물의 삶과, 살아보지 않았던 시대의 참모습을 이해하고 평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깨닫게 한다. 자신이 지나온 날을 되돌아보지도 않은 채, 또 非常口비상구마저 폐쇄됐던 그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야 했던 개인 개인의 가슴 속 계단을 내려가 보지도 않은 채, 너나 없이 또 아무 스스럼도 없이 다른 사람의 한 생애를 심판하고 재판하는 자리에 앉으려는 게 요즘 세상이다. 이런 세상, 이런 세태이기에, 험난한 시대의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老노교수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담담하게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여느때와는 다른 울림으로 다가서는 듯하다.
'一般的인 news'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대통령 "서울대 강남학생 60%" 논란 (0) | 2005.09.08 |
---|---|
왜 “초당내각”이냐 (0) | 2005.09.08 |
카트리나 재앙에 빛난 '코리안의 정(情)' (0) | 2005.09.06 |
[스크랩] 미국 루이지내아주 뉴올리언스 종합적인 기사 (0) | 2005.09.06 |
바그다드보다 더 참혹한 '뉴올리언스' (0) | 2005.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