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스크랩] <pompei> 폼페이의 歷史와 발굴

鶴山 徐 仁 2005. 9. 6. 18:51


I T A L Y...............C A M P A N I A




폼페이의 歷史와 발굴

P o m p e i








1. 歷 史



교통의 요충, 비옥한 토지를 배경으로 일찍이 오스크인이 촌락을 이룬 뒤,
BC 8세기 이후 그리스의 식민자 에트루리아인이 이주하면서 마을이 확대되었다.
교역이 번창하여 농산물·포도주·어패류·경석(輕石)을 산출해 수출하였으며,
그리스 신전이 세워지는 한편 오스크이탈리아문화도 발전하였다.
BC 5세기 삼니움인에게 점령되었고,
누케리아를 맹주(盟主)로 하는 도시동맹의 일원이 되어 귀족공화정체제를 갖추었다.
BC 3세기 로마의 진출로 한때 독립하여 헬레니즘·로마문화를 급속히 받아들였다.
포에니전쟁 때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편에 섰으나 그 뒤 로마 지배 아래 들어갔으며,
동맹시(同盟市)전쟁에서 다시 로마에 저항했지만 결국 로마시민권을 얻어 복속되고
많은 로마인 식민자를 받아들였다.
도시제도를 정비하고 라틴어를 수용하였으며,
극장·베누스신전·이시스신전·목욕탕·바실리카 등을 세워 대도시로 발전하였다.
로마 부유층의 휴양지로서 별장은 호화로운 벽화·조각·모자이크로 장식되고
수도(水道)·포장로·상점도 갖추어졌다.
최성기 인구가 약 2만 명에 이르렀으나,
63년 대지진으로 재해를 입고
79년 8월 24일 베수비오산의 대폭발로 매몰되어 도시로서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2. 발 굴


16세기 말 우연히 발견된 뒤
1748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현재 약 80%가 발굴되었다.
삼니움시대에 세워진 성벽으로 둘러싸인 시가지는 공공광장을 중심으로
구시가구역과 신시가구역으로 나누어졌으며
대부분 바둑판 모양으로 정비되어 있다.
폼페이 발굴의 의의는 성벽 안에 남겨진 많은 주거지와 실내벽화에 있으며,
이로써 약 2세기 동안에 걸친 당시의 일상생활과 회화양식의 변천을 알 수 있다.
<외과의사의 집> 등 최고의 주거지는 BC 4세기 것으로 이탈리아양식이며,
BC 2세기부터는 <파우노의 집> 등과 같이 그리스헬레니즘적 요소인
페러스타일리움(건물을 둘러싸는 列柱廊)을 채용하고 있다.
벽면장식에서도 여러 가지 색의 회반죽장식에 의한 제 1 양식,
주로 건축 모티프를 묘사한 제 2 양식,
이집트적인 장식요소를 우아하게 배합한 제 3 양식,
환상적 장식인 제 4 양식의 4가지로 분류된다.
또 조각에서는 BC 4세기 프락시텔레스 등의 모각(模刻)을 선호하여
교양주의적이고 장식적인 조각에 대한 유행이 나타나 있다.
일상생활에서는 식생활·장신구·대차(貸借)관계·클리엔테라(클리엔테스)제에 기초하는 선거 및
가정에서의 신앙 등을 알수 있다.
그 밖에 아폴로신전· 베누스신전· 유피테르신전· 도리스식 신전·
선거투표장·시참사회(市參事會)회의장  시장·5개의 목욕탕·극장·체육관·원형경기장·
도량형관리소 등 도시에 있던 시설이 모두 남아 있어,
공공생활상을 알아보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Yahoo 백과사전 발췌










 
가져온 곳: [땅의 回想]  글쓴이: SHADHA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