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T A L Y..............C A M P A N I
A
베 수 비 오 火 山
V e s
u v i u s M t.
높이 1,281m. 나폴리 동쪽
12km 지점에 있는 현무암질의 2중식 활화산
유럽대륙 유일의 활화산으로 산꼭대기에는 지름 500m, 깊이 250m의 화구가 있고,
그 안에 중앙화구구(中央火口丘)가 있다.
소마산(1,132m)이라고 부르는 외륜산(外輪山)과 중앙화구구와의 사이에는
아트리오라는 길이 약 5km, 너비 600m의 초승달 모양의 화구원(火口原)이 펼쳐진다.
베수비오산은 BC 8세기에
분화(噴火)했다고 하며,
79년 8월의 대분화로 폼페이를 비롯한 여러 도시가 삽시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고
지하에
매몰되는 대참사가 있었고,
1631년에는 약 반 년에 걸친 진동 후 폭발하여 주변의 주민 1만 8000명이 희생되었다.
1944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장면
폼페이 최후의
날
지진은 로마의 티투스 황제가
집권한지 한 달이 지난 서기 79년 8월 24일 아침에 시작되었다.
베수비오산 정상에서부터 시작되어 나폴리만으로 내려오면서 그
때까지는 단순히 여기저기 농가와 포도밭으로 찼던 산이 검은 연기를 뿜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드문드문하던 진동들이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잦아졌으며 나중에는 계속된 진동으로 산꼭대기에서는 불꽃을 튀기면서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화산 폭발의 시작은
10세기가 넘도록 활동을 멈추었던 기존의 화산구 함몰지역에서 새 분화구가 터지면서 아침내내 계속되었다.
오후 한 시, 갑자기
베수비오는 굉음과 함께 수 킬로미터의 경석 기둥을 분출시키며 산꼭대기로부터 큰 소나무 모양의 엄청나게 큰 먹구름을 형성했다.
갑자기 온 세상이 깜깜해졌고 남동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어갔으며, 먹구름은 지표면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첫 번 굉음 후 반
시간이 지나자 재와 경석더미 위로 힘차게 퍼붓기 시작했다.
에르콜라노에서 쏘렌토 해안선 지역과 사르노 유역 안쪽,
남쪽으로는 파에스툼까지의 지역이 피해를 입었으나 그 중 가장 피해가 심한 곳은 폼페이었다.
폼페이는 사르노강 하구
화산의 경사지역에 위치한 도시로 약 17년 전, 즉 서기 62년 이미 지진을 겪었던 곳이다.
열 한시간 동안 쉬지 않고
경석과 재가 뿜어져나와 매 시간당 15cc씩 돌과 잿가루로 길거리, 동네, 정원은 물론이고 가옥들의 문지방을 넘어서 집들도 천천히
파묻히게 되자 잿더미는 엄청난 무게로 변해갔고 지붕 위의 재와 돌은 대부분의 가옥들을 무너뜨렸다.
집들이 무너지자 주민들은
창고로 대피하는가 하면 어떤 이들은 제일 견고하게 지어진 곳이라 생각되는 방으로 피해 결국은 이곳 저곳이 서로 엉켜 한 곳에
뭉치고 서로 부딪치기도 하는 동안에, 문들은 봉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민가를 버리고 지진이 없는 시골을 찾기도
했다. 무더기로 날아오는 돌멩이들을 피하기 위해 머리에는 망토나 방석을 뒤집어쓰고 돌 잿더미 위를 걸어 피신하는 폼페이인들은
목적지 없이 무작정 움직이는 피난민들이었다.
그동안 계속 성을 내던 화산은 자정 즈음 약간 누그러지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뜨거운 가스와 화산암 덩어리를 분출해 내면서 바위조각들을 화산 등성이에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유황과 염소, 화산암 조각들과
바위 조각들이 뒤섞인 가스가 잇달아 뜨거운 열풍이 되어 화산 등성이에 퍼지고 그 지역을 불태워 휩쓸기 시작했다.
그 뒤를
이어 진흙 사태와 쇄설성의 뜨거운 잿더미가 물에 범벅이 되자 속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진흙더미나 물과 재가 섞인 잿더미들은 모두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흘렀는데 그 곳은 급류가 흐르는 두 개의 대협곡으로 싸인 해각으로서 바로 에르콜라노 시가가 위치한 곳.
여기 이 곳 주민들은 하루내내 윗동네에서 일어난 엄청난 광경들을 지켜봤지만 그 순간까지는 엄청난 굉음조차도 그다지 무서운
소리로 들리지 않았고 손톱만큼의 재도 날아오지 않았었기 때문에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어떻든 그들도 만약의
비상사태를 감안해 이미 집들을 버리고 바다 쪽으로 피신을 시도했는데 화산은 그 쪽으로 지진 진동을 시작했고, 이 진동으로 엄청나게
큰 센 파도가 덮쳐 정박해 있던 배들은 모두 바위 덩어리에 부딪쳐 이미 떠내려갔기 때문에 바다로 피신한다는 것을 불가능하였다.
미세움에서 온 해군제독 카이오플리니오 트란킬로의 구조함선대 또한 접근하지 못하고 구조작업에 실패했다.
공포에
찬 에르콜라노인들은 무조건 바다 쪽으로 피신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질 뿐 당황해하면서 화산이 진정되고 바다가 평온을 되찾을 것만을
기원하였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되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백 명 정도의 남녀와 어린이 그리고 짐승들이 모여 있는 곳에 뜨거운
화산의 열기가 몰아쳤다.
그리고 그곳에 있던 생명체란 생명체는 모두 몰살되었다. 잠시후 도시의 광경은 죽은 시체만이 겹겹이
쌓이고 그 시체들 위로 가만히 진흙탕 물이 고이기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두 번의 뜨거운 열기와 진흙더미가 섞인 지진은 1시간 동안
도시를 덮은 후, 네 번째 열기가 25일 새벽에 또한번 휩쓸고 지나갔다. 가옥, 큰 건물할 것 없이 모든 건축물은 진흙 속에 잠기기
시작했으며, 바닷물조차 100m 정도나 밀려나 버렸다.
폼페이 최후의 고통은 에로콜라노보다 훨씬 더
연장되었다. 독가스가 세 번이나 도시의 성벽까지 퍼졌고, 아침 6시 경에는 도시 안으로까지 밀고 들어온 독가스와 네 번째로 불어온
뜨거운 화산 열기로 남아있던 생존자들마저 곧 모두 생명을 잃게 되었다.
또다시 두 시간 동안 두 번의 가스사태와 진흙사태가
해변에 침입했다. 에르콜라노시에는 죽어서 쌓인 시체들의 높이가 20미터에 이르고, 폼페이에는 2m 70cm의 경석이 쌓이게
되었는데, 이 고아경은 붕괴와 몰살이라는 표현의 말이 꼭 알맞았다.
그리고 이 곳에서 에르콜라노의 해군함선구조대를 지휘했던
카이오 플리니오 트란퀼로 제독이 수증기가 인 열풍에 질식해 사망했다.
이 천재지변은 로마제국의 가장 비옥하고 아름다운 지역
중의 하나였던 곳을 파괴하였다. 로마는 이 지진을 공포와 긴장으로 맞아들였고, 원로원은 피해복구를 위해 구조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단지 남은 사람들을 지진의 피해가 없었던 지역으로 피신시키는 일이었을 뿐, 그 밖에는 그다지 큰
해결책이 없었다. 후에 몇 명 사람들이 우물이나 굴을 파서 매장된 보물이나 재산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이것도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근처에 목자들과 농부들의 오막살이가 몇 채 들어서기도 했고, 화산의 비옥한 토지 경작을 위한 농가, 별장도
생겨났지만, 바로 그곳 폼페이와 에르콜라노 그리고 스타비아에는 세월이 흘렀고 그 때 그 사건은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세월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E.G.리턴.. 《폼페이 최후의 날》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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