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고구려 무사

鶴山 徐 仁 2005. 8. 25. 19:50
추천 0    스크랩 0

을파소(?~ AD 203)가 국상이 되었을때 나이 어린 준걸들을 뽑아서 선인도랑仙人道朗이라 하였다.  (사내 랑)
교화(敎化 - 널리 가르쳐서 변화시키다)를 맡은 사람을 참전(參佺 간여할 참, 신선이름 전)이라 했으며,  계율을 지키고 신과 관계되는 일을 맡겼다.
무예를 관장하는 자를 조의라 하였으며 행동을 바르게 하고 규율을 만들고 공동체를 위하여 몸을 바친다.

연개소문은 홍무 14년 5월 10일에 태어났으며 9살에 조의선인에 뽑혔다.      (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 )

선인도를 보면 최치원의 낭랑비 서문에 적혀 있는 바로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유,불,선 3교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풍류도가 있다"고 하였는데, 바로 풍류도의 다른 이름인 듯 싶다.

지금은 그 맥이 다 끊어지고 없으나 다시 부활의 움직임을 펴고 있으니 바로 증산도이다.

 

고구려 무사

 

예(濊)와 맥(貊)은 누구인가 ?

청동기시대 중국동북지역에 등장하는 종족명은 '숙신족', '예맥족', '동호족', '산융족', '조선족', '발족' 등이다. 예맥족(濊貊族)에 관해서는 고조선을 이룬 중심세력이라는 것과 그 위치가 부여·고구려지역에서 원래부터 분포하고 있었던 종족이 예족(濊族)이고 서쪽에서 이동해 들어가 예족과 융합하여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이 맥족(貊族)이라는 견해에 일반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문헌상에서 보면 고대 중국동북지역에 관한 종족명칭으로 예(濊)와 맥(貊)이 많이 등장한다. 중국측의 문헌에서는 주로 춘추시대이후 형성된 것으로 보는 중화사상(華夷觀)에 의해 주말(周末)에서 진통일(秦統一)까지 동이(東夷)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고 진한(秦漢) 이후는 예맥(濊貊)이 등장한다. 이러한 현상은 진나라가 강족(羌族=西夷의 갈래)출신이었기에 중국지역에 분포하는 이(夷)에 대한 관념을 비하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이(夷)나 예맥(濊貊)은 아마도 종족칭이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최근의 북경에서 펴낸 『중국대백과전서(中國大百科全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夷)는 중국 동북지방 특히 발해연안에 거주하였고 그 분포가 강회지방(江淮地方:양자강유역)에 이른다. 이들은 하(夏), 상(商(殷)), 주(周) 삼대(三代)때는 이(夷) 혹은 구이(九夷)라 하고 서주초(西周初) 성왕(成王)때는 한동안 이(夷)가 서로 연합하였으며 그들 종족의 본원지는 동북지방에 있었다.’

'호(胡)는 북방(北方)거주족이며 맥(貊)은 동북(東北)거주족이다. 「注」맥은 즉 예이다.’

예와 맥은 고고학상으로 볼 때, 신석기시대인이 아니고 청동기시대인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당시 중국고대에는 예와 맥에 대해서 별로 구분없이 비하적 표현으로 사용한 것처럼 보인다. 고구려를 맥이라 하고 부여에 대해서는 예라 하는 관점을 일부학자들은 각기 다른 지역경제를 반영한 명칭이라고도 보기도 하는데, 한자(漢字)의 의미구성을 고려하여 맥을 산악지역의 거주족으로 보고 예를 하천지역의 거주족으로 보는 견해로 아직 명확한 근거는 없다. 한가지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夷), 예(濊), 여(黎), 여(麗), 여(餘) 등의 연관성과 맥(貊), 낙(駱), 백(白), 호(毫), 발(發), ㅂ·ㄺ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가 맥족이란 사실이 고대사의 통설이다. 고조선지역에 예족이 있었는데 고구려의 맥족이 이동해 들어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족은 전통적으로 이어져온 동이족중 토착민이고 맥족은 유목적 기질을 지닌 이주민들이라는 의미가 짙게 배여 있다. 후대의 '예맥조선'이라는 표현도 예족과 맥족의 조선이란 의미이지 그 자체가 국가명칭은 아닌 것이다.

종족별로 구별한다면 이미 중원지역에 중국계 종족이 형성되기 전에 중국동부연안의 평야지대에는 발해연안에서 진출한 '이족(夷族)'이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 중 일부가 황하문명을 발전시킨 은(段)나라 문화를 창조하였을 정도로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하였었는데 또 하나의 이족(夷族) 출신인 진시황의 통일이후 독자적 세력이 와해되고 중국내륙에서 다른 종족과 동화되어 버렸던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사서에는 '발조선(發朝鮮)'이란 명칭이 자주 등장한다. 일부학자들은 '발조선(發朝鮮)'을 '발(發)'과 '조선(朝鮮)'으로 분리시켜서 보려고 하는데, '발(發)'을 '맥(貊)'과 연관지으려는 태도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發'과 '貊'은 어원의 형성과정이 다르다. 후술하겠지만,'發'은 '밝'의 알타이어계 한자표기로써 '백(白, 百)'과 같고 후에 '번(番)'과 연결되는 음차(音借)일 뿐 '맥(貊)'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맥은 락(手+各)자로부터 비롯되는데 '各'은 갑골문에서 혈거(穴居:지하식 주거지)를 뜻하고, 부수 '豕'는 '돼지, 벌레'를 뜻하므로 맥은 혈거에서 돼지를 기르며 생활하는 모습을 표현한 상형문자의 합성이다. 락(手+各)은 호(胡)락(手+各)으로 연칭되다가 '胡貊'으로 바뀌는데 맥의 등장은 발(發), 백(白), 백(百)과 연계성이 확인된 이후의 호칭으로 변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기(史記)』에는 '예락(濊(豕+各))'의 기록이 보편적인데 진(秦)나라 이전의 선진시대부터 맥보다 낙이 먼저 등장한다. 『순자(荀子)』에는 "진북계에 호락이 있다”하였고, 『전국책(戰國策)』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한편, 춘추시대의 유가경전류에는 모두 맥으로만 표기되어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유가사상가들이 편찬한 개작이기 때문이다.

『좌전(左傳)』의 소공구년조(召公九年條)에 있는 '숙신(肅愼), 연(燕), 호(毫)이 북토(北土)’라는 기사는 『좌전』이 춘추시대 당시 그대로의 기록을 담고 있다고 보면 이들 세 지역은 중원문화권을 벗어난 북방문화권적 성격을 암시하는 말로 풀이된다. 춘추시대까지만 해도 임호(林胡), 누번(樓煩) 등 북방민족이 장성 이남까지 내려와 점거하고 있었는데 소위 몽골남부지역의 수원(綏遠:Ordos)청동문화의 분포권이다.

따라서 맥의 전신인 락은 호(胡)와 이웃하고 있었고 호는 전형적인 중국북방의 유목민족을 일컫는 호칭이므로, 호락(胡(豕+各))이 연합하여 연(燕)과 제(齊)를 침범하였다가 제환공에게 패하여 퇴각하였다는 『관자(管子)』「소광편(小匡篇)」 기사는 낙(手+各)의 위치가 요서지역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낙(豕+各)은 곧 맥(貊)으로 변하고 예(濊)와 함께 동이족(東夷族)이라는 것은 주지된 사실이다.

중국동북지역의 중원지방과 가까운 발해북안 요서지역에 일정한 시기동안 맥족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이 맥이 중국북방의 호와 함께 서주말부터 춘추시대에 걸쳐 중원지방으로 빈번하게 침범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중원식 청동기물을 반입하게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양상이 하가점상층문화에 반영되어 부분적으로 중원식 청동기물들이 나타나고 있다.

맥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한 대수맥(大水貊)과 소수맥(小水貊)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문헌상의 기록으로 맥족이 부여와 고구려가 설립된 만주지역에 이동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흉노(匈奴)가 강성하였던 모돈시대(冒頓時代)일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의 강력한 대추장 모돈(冒頓)에 의해 동호(東胡)가 격파되고 그 여파로 맥(貊)도 동쪽으로 이동하여 예족(濊族) 지역에 들어가 부여와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것이다.

『사기』에 “흉노(匈奴)가 동으로 예맥조선(濊貊朝鮮)과 접하게 되었다”는 기사에서 '濊貊'연칭은 이러한 시대적 정황을 반영한 표기이다. 따라서 예는 요동지방을 중심으로 신석기시대부터 강이나 하천을 터전으로 농경생활을 영위해왔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 예족도 맥족과는 자연환경이 달라 경제생활 방식이 달랐지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중국지역으로 이주해 간 사람들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다.

맥은 하가점상층문화에서 나타난 기마풍속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고 또한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를 구성한 중요집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맥족은 비록 목축을 주로 하였지만 농경을 바탕으로 한 예족과 같은 동이족(東夷族)이었기 때문에 상호 융화에 큰 무리가 없었을 줄 안다. 이것은 요동지역과 길림장춘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의 주인공은 예족이고 요서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는 맥족이라는 결론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맥족이 동천하기 전의 하가점상층문화와 요동지역 청동문화가 지역에 따른 문화적 성격은 다를지라도 종족적으로는 같은 동이족으로서 상호연계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산동반도와 회하 유역에 있던 동이족들은 동이족과 관계가 깊던 은(殷)이 망하고 서쪽에서 진출하여온 주나라의 침입을 받아 싸우게 되었다. 그 결과 동이족의 일부는 중국 한족(漢族)에게 흡수되고, 그 일부는 남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산동반도 지역과 회화 유역에 계속 남아 있다가 한족에게 흡수된 동이족은 주나라 이후에도 상당기간 세력을 유지하고 있어서 전국시대 말기까지 많은 부족국가를 건설하였다. 후한시대에 건설된 산동성 가상현 소재의 무씨사당 석실의 화상석에 삼국유사가 전하는 단군설화의 내용이 그대로 묘사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사실을 말해준다. 또 이런 점을 볼 때 우리에게 단지 신화나 허구로 취급받는 단군설화가 우리 민족이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해답을 담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가져온 곳: [ⓒ에스페란토]  글쓴이: 푸른소나무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