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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北美洲.濠洲

[스크랩] 카리브 해의 미항 카르타헤나

鶴山 徐 仁 2005. 8. 20. 14:40
 카리브 해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에메랄드 빛의 카리브 해를 바라보면 누구나 마음이 느긋해지는 것을 느끼고, 그네들의 음악을 들으면 저절로 흥겨워짐을 느낀다. 그래서 카리브 해는 사람들에게 막연한 동경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 사람들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이나 유럽 사람들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카리브에서 휴가를 보내는 낭만을 꿈꾼다.

 

어쩌면 카리브의 축복받은 운명은 콜럼버스가 처음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정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근대로 가는 문을 활짝 열렸던 1492년, 카리브 해를 탐험하던 콜럼버스는 그의 항해일기에 그곳을 파라다이스라고 규정했다. 그런가 하면 토머스 모어는 그의 <<유토피아>>에서 쿠바의 자연 환경을 떠올리며 지상낙원을 상상했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미국이 카리브 일대를 자신의 뒷마당쯤으로 여겼을 때, 카리브를 파라다이스로 생각하는 인류의 상상력이 완결되었다. 미국인들이 현대사회의 번잡함과 치열한 생존경쟁에서 탈주하게 해주는 곳으로 카리브 해를 첫 손가락으로 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에게 카리브 해는 팍스 아메리카나의 구성요소 중 하나였던 셈이다.


그러나 카리브 해의 수많은 휴양지들 중에서 과연 어디를 가는 것이 좋을까? 많은 사람들은 쿠바를 꼽는다. 도미니카나 이름 없는 조그만 섬들을 꼽는 이들도 제법 있다. 하지만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도 매력 있는 곳이다.

 

 

콜롬비아는 수도 보고타가 내륙지대에 있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분지에 위치해 있으니, 볼리비아에서 절정을 이루는 안데스 산맥이 페루, 에콰도르를 거쳐 콜롬비아에서까지 위세를 떨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보고타의 정서는 카리브 해안지대의 정서와는 영 딴판이다. 그래서 콜롬비아의 세계적인 문호이며 전형적인 카리브인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보고타 유학시절 경험한 쌀쌀한 날씨와, 카리브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쌀쌀한 사람들 때문에 평생 보고타에 사는 것을 꺼렸다. 대신 그가 콜롬비아에 거주했을 때 택한 도시가 바로 카르타헤나였다.

 

보고타에 여행 갔을 때의 아득한 기억을 더듬어보면 반군과 마약 마피아로 악명 높은 콜롬비아임에도 특별히 위험을 느꼈던 것 같지는 않다. 그 당시는 반군이나 마피아들의 활동이 잠시 뜸해서였다는 것이 콜롬비아를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그런데 카르타헤나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보고타보다 훨씬 치안이 좋다고 하니 별다른 걱정 없이 갈만한 곳이리라.


카르타헤나는 스페인의 남미 진출 초기인 1533년에 창건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에 주교가 파견되었다. 또한 1573년에는 이미 400가구에 달하는 스페인인들이 정착했다. 카르타헤나가 이처럼 일찍부터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천혜의 자연조건 때문이다. 식민시대 카르타헤나인들이 전 세계 모든 선박을 다 수용할 수 있다고 큰소리칠 정도로 드넓은 만을 지니고 있으니 항구를 건설하기 적당했던 것이다.

 


덕분에 카르타헤나는 이내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특히 스페인에서 무역선 선단이 올 때면 카르타헤나는 당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을 만큼 커다란 장이 서는 도시로 변했다. 부는 넘쳐나는데 상대적으로 원주민 노동력이 적다 보니 다른 카리브 지역과 마찬가지로 많은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기도 했다.

그 넘치는 부는 해적의 잦은 출몰을 초래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해적은 물론 심지어 스페인 해적까지 카리브 해를 무대로 암약했을 정도이며 카르타헤나는 식민시대 네 번이나 해적의 침입을 겪어야 했다.


특히 그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1585년 무려 20척의 해적선에 부하 3천 명을 이끌고 침입해 카르타헤나를 점령하기도 했다. 그는 아바나에 이어 카르타헤나를 약탈했고,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 태평양으로 나가 페루 앞바다에서 은을 잔뜩 실은 배를 나포하고, 이어 당시 스페인 식민지였던 필리핀도 덮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스페인 본토에서 대 라틴아메리카 무역을 독점한 유일한 항구였던 카디스까지 노략질한 뒤 유유히 영국으로 귀국한 바 있다. 마젤란에 이어 두 번째로 세계일주를 한 사람이 바로 드레이크였다. 그리고 그 혁혁한 전과 덕분에 드레이크는 엘리사베스 여왕에 의해 발탁되어 해적이라는 딱지를 뗄 수 있었고, 결국 몇 년 후 스페인 무적함대를 궤멸시키는 전공을 세웠다.


드레이크 덕분에 카리브 해의 몇몇 도시는, 오늘날까지 그 위용을 자랑하며 여행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성채와 포대를 갖추게 되었다. 스페인 왕실이 이탈리아 건축가를 스카우트하여 아바나, 산토도밍고(도미니카), 산후안(푸에르토리코), 카르타헤나에 성채를 쌓기 시작한 것은 1588년의 일이었다. 현재 카르타헤나는 남미 도시들 중 유일하게 도시 전체가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이다.

 


식민시대 전반기에 카르타헤나는 부가 넘치는 도시였다. 스페인 본국에서 가져온 물건들과 남미 각 지역의 물건들이 거래되는 곳이었고, 카리브 해 일대에 일찍부터 뿌리를 내린 사탕수수 농업을 위해 대규모로 아프리카 흑인들을 수입하던 시절에는 중요한 노예시장으로 꼽히던 도시가 카르타헤나였던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남미의 키토나 리마 혹은 쿠스코에 비해 남은 유물이 많지 않다는 점이다. 해적들의 약탈 때문이다. 하지만 웅장한 성채와 수많은 교회 건물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방문할 만한 가치가 있다. 1811년까지 존속된 종교재판소가 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천혜의 풍광만으로도 카르타헤나를 방문할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카르타헤나가 리우 데 자네이루와 푼타 델 에스테(우루과이)와 더불어 남미 3대 미항으로 꼽히고 있으니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랴!

 

 

 


 
가져온 곳: [라틴아메리카의 향기]  글쓴이: 라틴아메리카 바로 가기